-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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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은 1944년 6월 13일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서 태어났다. 1970년 2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1990년 외무부 미주국장, 1995년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1차관보 등을 거쳐 1996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외교통상부 차관을,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다.
2006년 10월 14일 제8대 국제연합(UN) 사무총장에 당선되어 2007년 1월 1일부터 5년 동안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임했으며, 2011년 유엔 안보리 만장일치와 지역그룹 전원(192개국) 서명으로 2016년까지 5년 연임에 성공했다.
- 경영활동의 공과
- 비전과 과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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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외교부 내에서 대표적 미국통으로 알려져 있으며, 뛰어난 외교감각과 예리한 정치감각을 겸비했다고 평가받는다.
근면하고 솔선수범한 관료로 통한다. 상하좌우 모든 인사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정도로 성실해 ‘특기’라고도 불린다. ‘특별히 기수가 없다’는 뜻이다. ‘적이 없는 사람’으로도 통한다.
주변에서 그가 윗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본다. 선배들이 장관에 오르면 대부분 그를 가까이 두었다. 한 전직장관은 "반기문이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부드럽지만 안으로 독하고 독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외유내강에 강이 하나 더 붙은 `외유내강강(外柔內剛剛)'형으로 불린다. 겉으로 성격이 온화하고 예의를 차린다. 부하들을 질책할 때도 큰소리를 내는 일이 거의 없다. 예법이 몸에 배어 부하 직원에게 출입문을 열어주는 친절을 베풀어 상대를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
속으로 철두철미하며 의지가 강하다. 미흡한 점과 잘못은 분명히 지적하고 대안을 요구해 부하들이 준비 없이 보고했다가 당황하기 일쑤라고 한다. 일에 대한 집념이 강해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반드시 이루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
철저하게 연공서열 중심으로 인사를 관리하는 보수적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이후 ‘관운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권 교체에도 외교부 요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외교안보수석을, 김대중 정부 때 외교통상부 차관을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재미있는 사람으로 통하지 않는다. 일 밖에 모르는 ‘워커홀릭(workaholic)’이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 취미를 가지지 못했고, 전공 외에 영어와 프랑스어 공부에 집중한 ‘모범생’이었다.
외교관이 된 후 일하는 것이 좋아 특별히 휴가를 가지 않았다. 일요일에 출근하거나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것이 새삼스럽지 않으며, 미국과 유럽, 중동, 아프리카 출장의 경우 시차를 감안해 이동하는 시간에 비행기에서 숙박하는 일정을 잡는 게 다반사다.위키리크스가 공개한 2006년 7월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에서 반기문을 미국사람들의 가치, 정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미국 전반에 대해 호의적이고, 이라크 파병부터 주한 미군기지 문제까지 언제나 (미국에)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 사건사고
- 경력/학력/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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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치고 인도로 부임했다. 워싱턴이 아닌 인도 뉴델리로 간 이유는 위험비 수당을 벌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고 싶은 이유였다. 1972년 주인도대사관 부영사, 1974년 주인도대사관 2등 서기관, 1976년 주인도 대사관 1등 서기관 등을 거쳤다.
당시 주인도 대사였던 노신영 전 국무총리가 반기문의 능력을 높이 사 1985년 그를 총리 의전비서관으로 발탁했다. 이후 승승장구해 1987년 7월 주미대사관 총영사, 1990년 6월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2월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 1992년 9월 주미공사를 역임했다.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국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총책을 맡았으며 그해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체결과정에 기여했다. 1995년 2월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외무부 차관보를, 1996년 11월 외교안보수석를 맡았다. 1998년 주오스트리아 대사관 대사 겸 주비엔나 국제기구대표부 대사를 맡았다.
2000년 외교통상부 차관으로 발탁되었으나 2001년 한-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 조약이 들어가는 실수로 외교부 차관에서 물러났다. 2001년 9월 한승수 당시 외교부 장관이 겸임했던 제 56차 유엔총회의장을 보조하는 비서실장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2002년 외교부 유엔본부 대사를 맡았다. 9.11사건이 발생해 그와 관련된 유엔 차원의 테러리즘 대응조치, 그리고 이견조율 업무를 수행하는 등 국제경험을 쌓았다.2003년 2월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외교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4년 1월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2006년 11월까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초보 외교관 시절부터 틈틈이 유엔 업무를 맡았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외무부 주UN 1등서기관을, 1991년 외무부 UN 과장을 거쳤다. 2001년 유엔총회의장을 겸임한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을 보조해 비서실장 및 유엔본부 대사로 활동했다.
2006년 아시아에 돌아갈 차례였던 유엔 사무총장직을 놓고 인도 출신의 샤시 타루르와 경쟁했다. 결국 수차례 예비투표를 거쳐 최종 후보로 결정되었고, 총회의 표결을 거쳐 2006년 10월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011년 6월에 반기문 사무총장 연임 추천 결의안에 대해 안보리의 만장일치와 지역그룹 전원이 서명한 가운데 총회에서 192개 회원국의 박수로 통과되었다. 2012년 1월부터 두번째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학력
충주중학교, 충주고등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3학년 이후 미군부대에서 반출된 타임(Time)을 사서 영어를 배웠다. 충주고 2학년 때 미국 적십자사에서 주최하는 영어경시대회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부상으로 비스타(VISTA, Visit of International Student to America)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1962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했다. 한 달간 미국 연수 및 봉사활동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했다. 1970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제3회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해 그해 3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칠 때 수석을 차지했다.
외교관 재직중 외무부 지원으로 하버드대학교 케네디 행정대학원으로 유학했으며 1985년 4월 졸업하여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8년 서울대학교 명예외교학박사, 페어리디킨슨대학교 명예박사를 수여받았다. 2010년 난징대학교 명예법학박사 및 모스크바국립국제관계대학교 외교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반기문의 가정은 1950년대 말까지 유복한 편이었으나, 부친의 창고업이 부도나면서 어려워졌다.
1971년 결혼한 배우자 류순택은 충주고와 충주여고간 학생회장단 간부 교류로 만났다. 슬하에 1남(반우현), 2녀(반선용, 반현희)를 두었다. 둘째 딸 반현희는 유엔 산하기구 유엔아동기금(UNICEF)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 상훈
1975년 녹조근정훈장, 1986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01년 3년 이상 주재 경력이 없었지만 예외적으로 오스트리아 명예 대훈장을 받았다. 2002년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브라질 리오블랑코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이외에도 2006년 페루 태양 대십자훈장, 2008년 필리핀 최고 훈장 ‘시카투나 훈장’, 200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청조근정훈장도 받았다.◆ 상훈
1975년 녹조근정훈장, 1986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01년 3년 이상 주재 경력이 없었지만 예외적으로 오스트리아 명예 대훈장을 받았다. 2002년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브라질 리오블랑코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이외에도 2006년 페루 태양 대십자훈장, 2008년 필리핀 최고 훈장 ‘시카투나 훈장’, 200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청조근정훈장도 받았다.
-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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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은) 외교관입니다.” (1963년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비스타(VISTA) 프로그램 연수생인 고등학생 반기문에게 장래희망을 묻자.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대답을 듣고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신웅진 저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 세계의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아름다운 꿈과 도전의 메시지'에서)
“공직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심하기도 했지만 묵묵히 일해 결국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됐다.”(2001년 차관직에서 물러나 유엔 총회 비서실장으로 좌천되자)
“북한이 지금 현재 진행 중이거나 진행하려고 하는 모든 핵 관련 활동 이것은 6자 회담에서 합의가 이뤄진다면 당연히 중단되고 폐기돼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5/7/14 CBS 라디오 <뉴스레이더 5부>에서 6자회담과 북핵 문제를 놓고)
"평화적 핵이용을 위해 핵폐기로 신뢰가 회복되면 (핵이용을) 북한과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5/8/22 미국 CNN에 출연해 북핵 문제에 대해 답하면서)
“UN의 성공에 관한 진정한 평가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약속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이 일을 수행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조직(UN)의 항구적 목적과 우리를 고취시키는 원칙들을 감안할 때 우리는 UN을 요란하게 칭송하거나 UN의 미덕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을 하나하나 프로그램 별로 실천해 나가면 됩니다.” [The true measure of success for the UN is not how much we promise, but how much we deliver for those who need us most. Given the enduring purposes and inspiring principles of our Organization, we need not shout its praises or preach its virtues. We simply need to live them every day ; step by step, program by program, mandate by mandate.]
(2006/12/15 제8대 유엔 사무총장 취임 선서에서)“사무총장으로 서 있는 저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신 각국 사절단 여러분 모두의 아낌없는 지지와 협력과 신뢰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의 모든 진심과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여러분을 위해 충실히 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As your Secretary-General, I am far from being perfect,and I will need the unsparing support,cooperation and trust from all of the representatives present here. But I pledge to serve you well,with all of my heart and to the best of my abilities]
(2006/12/15 제8대 유엔 사무총장 취임 선서에서)“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한반도 평화증진을 위해 필요한 모든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반도가 도전의 땅에서 진정한 기회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2012/10/30 대한민국 국회에서 열린 ‘유엔과 한국, 함께 이루는 인류의 꿈’ 연설에서)
"역사에 관해 올바른 인식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나라들로부터도 존경과 신뢰를 받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013/8/26 정부서울청사 기자회견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및 평화헌법 수정 등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을 비판하며)
"북한의 불안정한 상황 또 불가측한 도발 가능성은 한반도뿐 아니라 국제사회에 큰 안보 위협이 돼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반도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화와 신뢰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2014/1/7 뉴욕 소재 주유엔 한국대표부에서 열린 '제23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수상식'에 참여해)
◆ 평가
외교부 내에서 대표적 미국통으로 알려져 있으며, 뛰어난 외교감각과 예리한 정치감각을 겸비했다고 평가받는다.
근면하고 솔선수범한 관료로 통한다. 상하좌우 모든 인사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정도로 성실해 ‘특기’라고도 불린다. ‘특별히 기수가 없다’는 뜻이다. ‘적이 없는 사람’으로도 통한다.
주변에서 그가 윗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본다. 선배들이 장관에 오르면 대부분 그를 가까이 두었다. 한 전직장관은 "반기문이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부드럽지만 안으로 독하고 독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외유내강에 강이 하나 더 붙은 `외유내강강(外柔內剛剛)'형으로 불린다. 겉으로 성격이 온화하고 예의를 차린다. 부하들을 질책할 때도 큰소리를 내는 일이 거의 없다. 예법이 몸에 배어 부하 직원에게 출입문을 열어주는 친절을 베풀어 상대를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
속으로 철두철미하며 의지가 강하다. 미흡한 점과 잘못은 분명히 지적하고 대안을 요구해 부하들이 준비 없이 보고했다가 당황하기 일쑤라고 한다. 일에 대한 집념이 강해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반드시 이루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
철저하게 연공서열 중심으로 인사를 관리하는 보수적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이후 ‘관운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권 교체에도 외교부 요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외교안보수석을, 김대중 정부 때 외교통상부 차관을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재미있는 사람으로 통하지 않는다. 일 밖에 모르는 ‘워커홀릭(workaholic)’이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 취미를 가지지 못했고, 전공 외에 영어와 프랑스어 공부에 집중한 ‘모범생’이었다.
외교관이 된 후 일하는 것이 좋아 특별히 휴가를 가지 않았다. 일요일에 출근하거나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것이 새삼스럽지 않으며, 미국과 유럽, 중동, 아프리카 출장의 경우 시차를 감안해 이동하는 시간에 비행기에서 숙박하는 일정을 잡는 게 다반사다.위키리크스가 공개한 2006년 7월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에서 반기문을 미국사람들의 가치, 정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미국 전반에 대해 호의적이고, 이라크 파병부터 주한 미군기지 문제까지 언제나 (미국에)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 기타
한 때 `반주사', ‘반대리’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 고위직이면서도 그 직급에 관계없이 자질구레한 일도 손수 챙겼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다.
아무리 바빠도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에게 반드시 회신을 해주며, 수많은 연하장을 보낼 때도 자신의 이름은 직접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 자신이 모셨던 노신영 전 총리에게서 '사람관리'의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낮잠'을 자지 않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외교통상부 장관 시절 주요 간부들이 점심식사 후 10∼20분의 토막잠을 멀리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토막잠이 필요한 간부들은 부하직원에게 `세면장에 갔다'는 본의 아닌 거짓말을 준비시키기도 했다.
"일하는 것 자체가 체력관리"라고 생각해서 별도의 운동을 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서 반기문의 강의 노트가 인기 있었다. 강의 노트가 정말 꼼꼼하고 하나도 빠지지 않는 어떤 면에서 교과서보다 더 나았기 때문에 동기생들 사이에서 서로 보겠다고 경쟁이 치열할 정도였다.
2001년 차관에서 물러나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부임했을 때 반기문은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보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의 국제 경험과 인맥이 전화위복되어 유엔 사무총장 당선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