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모터쇼 전시장에 4월23일 방문객이 포르쉐 타이칸 GTS 전기차에 탑승해 보고 있다. <연합뉴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한국 배터리 3사는 고급형 차량에 들어가는 삼원계(NCM) 배터리를 주력으로 삼는데 미국에서 시장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는 위기에 놓였다.
13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테슬라 모델S와 GMC 허머, 포르쉐 타이칸 등 8만 달러(약 1억1700만 원) 이상 가격대의 전기차 판매가 크게 정체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전기차에 최대 7500달러(약 1천만 원)까지 제공하던 세액공제 혜택을 9월 철회해 소비자가 고급형 차량에 지갑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테슬라와 포드 등 기업은 이러한 상황을 고급형 전기차의 생산과 판매를 축소하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
고급형 전기차는 팔았을 때 제조사에게 더 큰 수익을 안기지만 반대로 재고로 쌓이면 손실 규모를 키울 수 있어 완성차 제조기업들이 이에 발맞춰 빠르게 저가형 차량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셈이다.
테슬라는 고급형 라인업인 모델S와 모델X, 사이버트럭 등 3종 생산을 대폭 축소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포드는 고급형 전기 픽업트럭인 F-150 라이트닝의 단종까지 검토하고 있다.
고급형 자동차에 대표격인 포르쉐 또한 올해 9월19일 신형 전기차 개발을 중단하고 내연기관 추가 모델에 투자하겠다며 방향을 선회했다.
당초 미국 전기차 시장은 고급형과 저가형으로 양분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 저가형이 낫다고 판단해 고급형 전기차는 설 자리가 좁아진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전기차 시장 침체가 기업에게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며 “고급 모델에서 가장 큰 손실을 입었는데 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 배터리 기업에 악재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모두 미국에 수십억 달러씩 투자해 고급형 전기차에 주로 사용하는 삼원계 생산 라인을 갖췄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산 저가 배터리가 세계 시장을 휩쓰는 상황에서 고율 관세로 중국산 배터리 수입이 어려운 미국 고급형 전기차 시장은 한국 배터리 기업에 버팀목 역할을 해줬는데 이 시장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 미국 테네시주 브라운스빌에서 9월16일 열린 내셔널나이트아웃 주민 행사에서 포드 F-150 라이트닝 차량이 잔디밭에 주차돼 있다. < 블루오벌SK >
한국 배터리 3사는 삼원계 배터리가 에너지 밀도와 주행거리 등에 장점을 갖춰 고급형 전기차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투자해 왔다.
LG에너지솔루션은 GM과 합작법인 ‘얼티엄셀즈’의 미국 테네시주와 오하이오 공장을 삼원계 배터리 생산 설비로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SK온이 포드와 세운 합작법인 ‘블루오벌SK’, 삼성SDI와 GM이 2027년 양산을 목표로 건설하는 합작공장 ‘시너지셀즈’의 미국 공장 모두 삼원계 배터리에 기반한다.
그러나 시장 상황이 저가형 전기차 중심으로 바뀌면서 이러한 투자가 무색하게 됐다.
실제로 판매가 줄거나 생산 축소 대상인 포르쉐 타이칸과 포드 F-150 라이트닝은 각각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의 삼원계 배터리를 사용한다.
반면 GM이 최근 생산을 시작한 쉐보레 볼트 전기차는 중국 CATL이 납품할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탑재할 예정이다.
특히 저가형 차량의 대명사격인 볼트는 그동안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를 CATL 제품으로 전환했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GM은 미국의 대중 고율 관세에도 CATL 배터리를 들여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다만 CATL 배터리는 단기적으로만 사용하고 LG에너지솔루션과 중장기적으로 저가형 배터리를 개발하면 다시 대체할 가능성도 월스트리트저널은 언급했다.
물론 한국 배터리 3사도 미국 현지에 저가형 전기차를 겨냥한 LFP 배터리 라인을 추가해 수요에 대응하려 한다. 미국 전력 수요 급증에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기회로 보고 이를 위한 생산라인을 구비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지만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요컨대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삼성SDI는 삼원계 배터리에 공을 들였지만 미국 도로에서 고급형 전기차가 사라질 판이라 위기감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조사업체 에드먼즈의 제시카 콜드웰 부사장은 뉴욕타임스를 통해 “고급 전기차 시장이 계속 성장하리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예상만큼 커지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이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