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맨 왼쪽)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가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4년 전 국민의힘 의원들이 당시 김명수 대법원장 사퇴를 촉구하며 대법원 앞에서 벌인 시위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부는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어 민주당 주도의 '사법개혁'에 반대 뜻을 명확히 하면서도 내란 재판의 재판부에 법관을 1명 충원하며 정면 충돌에 대비하고 있다. 사법개혁을 둘러싸고 민주당과 사법부가 정면충돌 조짐을 보이면서 '타협'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2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사법부는 내란을 끝내고 정의와 민주주의를 지킬 의지가 있다면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며 “지귀연 재판부의 교체, 그것이 신뢰 회복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사건 1심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지귀연 부장판사의 교체를 명시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김 원내대표의 이런 요구를 두고 '지귀연 교체'라는 최소 요구에 머물렀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법관 증원 등을 핵심으로 하는 사법개혁, 조희대 대법원장의 퇴진까지 추진하는 당내 강경파의 요구와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일정한 성의를 보이면 민주당도 숨고르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신호'를 사법부에 보낸 것이라는 풀이도 나온다.
하지만 사법부는 물러설 뜻이 없어 보인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이날 국회에서 우원식 국회의장과 만나 “국민들 관심이 높은 내란 재판에 대해 헌법과 법률, 직업적 양심에 따라 신속하게 재판이 진행될 수 있도록 모든 사무행정적 지원조치를 다할 것”이라며 ‘재판장 교체’에는 거리를 뒀다.
앞서 서울중앙지법은 18일 내란 재판을 담당하는 형사합의25부(재판장 지귀연)에 판사 1명을 추가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재판장을 포함한 기존 판사 3명의 재판 부담을 덜어주고 특검 재판에 집중하도록 지원하기 위한 조치다.
민주당이 지귀연 재판부의 '재판 지연'을 문제삼자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을 내놓은 것이지만 사실상 재판장을 교체하는 것은 거부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전선을 '조희대 퇴진'으로 계속 확대하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사법부 수장인 조희대 대법원장을 직접 겨냥한 국회 청문회를 여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국회가 가진 합법적 권한을 활용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2021년 4월 국민의힘 의원들이 직접 대법원으로 가 김명수 당시 대법원장 사퇴를 촉구하며 차량출근 저지와 몸싸움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영상을 보여주며 “이런 국민의힘 행패가 삼권분립 침해 사례”라고 직격했다.
정 대표는 이어 “조희대 청문회는 대선을 코앞에 두고 대선후보를 바꿔치기할 수 있다는 오만이 부른 자업자득”이라며 “국민이 불의한 대통령을 다 쫓아냈는데 대법원장이 뭐라고 이렇게 호들갑이냐”라고 말했다.
당 지도부도 직접적으로 조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조희대 때리기’에 가세한 것이다.
김병주 의원도 이날 회의에서 “조 대법원장의 사퇴는 대한민국 법 역사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라며 “민주당은 조희대를 반드시 사퇴시키고 사법개혁을 확실히 완수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이처럼 강경한 자세를 보이는 배경에는 사법개혁을 둘러싼 여론전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조 대법원장이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사건 처리에 관해 발언했다는 '조희대 회동설'과 관련해 보수진영의 역공이 시작되면서 여기서 물러서면 자칫 사법개혁의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조희대 청문회를 통해 다시 조 대법원장의 '대선 개입'을 강조하고 조 대법원장의 불출석할 경우 정치적 이슈로 부각시키겠다는 것이다.
김준일 시사평론가는 23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법원 내에서도 조 대법원장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며 “민주당은 결과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어쨌든 조희대 사퇴가 최고의 카드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조희대 대법원장이 22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 개회식에 참석해 행사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조 대법원장이 최근 세종시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세종대왕은 법을 왕권 강화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정부여당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면서 민주당 대 사법부의 정면 충돌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추미애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 대법원장의 ‘세종대왕 발언’을 두고 “헌법에 귀속되는 대통령이면서 영구독재를 기도했던 내란수괴 윤석열이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습격하고 포고령을 발동해 헌법상의 국민기본권을 침탈해도 조 대법원장은 침묵했다”며 “조희대의 세종대왕 끌어다 쓰기는 자기 죄를 덮기 위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김상일 시사평론가는 조 대법원장의 ‘세종대왕 발언’으로 빚어진 상황에 관해 “상대방(민주당)이 섭섭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똑같이 맞대응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항상 생각해봐야 된다”며 “지금 사법부가 정치권과 맞서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저런 얘기를 했을 때 파장을 좀 더 고려하셨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있다”고 바라봤다.
민주당이 '조희대 청문회'를 추진하는 동안 사법부는 '집단 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사법부는 25일 전국법관대표회의를 통해 '대법관 수 증원안'과 '대법관 추천방식 개선안'을 토론하며 민주당 움직임에 본격적인 대응에 나선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각급 법원에서 선출된 대표판사들이 모여 사법행정 및 법관 독립에 관해 의견을 표명하거나 건의하는 회의체인 만큼 사법부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민주당과 사법부가 서로를 마주보며 달리고 있어 정면충돌을 피할 ‘타협점’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민주당은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퇴와 지귀연 재판부 교체를 요구하고 있지만 법원은 이를 ‘사법부 독립 침해’로 인식하면서 받아들일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이날 천 법원행정처장을 만난 자리에서 “유감스럽게도 정의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의 역할에 대한 국민 불신이 높다”며 “지금은 국민들이 왜 사법부에 대해 걱정하고 불신하는지 돌아보고 사법부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첫 번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 법원행정처장은 우 의장의 발언을 들은 뒤 “삼권분립, 사법부의 독립을 통해 재판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돼야 한다”며 “사법권의 온전하고 합리적인 행사를 통해 국민의 기본권 행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사법부가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겠다”고 말했다. 김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