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성기학은 영원무역 대표이사 회장이다.

영원무역을 창립했고 영원아웃도어의 대표이사도 맡고 있다. 아웃도어라는 한우물만 파서 영원무역을 매출 2조 원의 글로벌기업으로 키웠다.

노스페이스 등 해외 유명 스포츠브랜드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OEM)으로 수출하며 방글라데시, 베트남, 중국, 엘살바도르 등 세계 4개국에 생산거점을 두고 있다.

1947년 7월8일 태어났다.

서울대 무역학과 학생시절부터 스포츠를 좋아했고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아웃도어 스포츠웨어에 관심을 품게 됐다.

무역회사를 다니다 외국인 바이어의 권유로 불과 27세 때 영원무역을 세웠다. 영원무역은 창립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적자를 내지 않고 흑자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시장을 잘 읽어 과감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양성평등과 여성일자리 창출에 힘쓰고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경영활동의 공과


△불황에도 안정적 성장
영원무역은 패션업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성기학의 스포츠웨어 집중전략 덕분에 안정적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영원무역은 스포츠웨어의 일종인 애슬레저(운동+여가)웨어시장이 빠르게 커지면서 수혜를 보고 있다.

애슬러제웨어시장의 규모는 2009년 약 5천억 원에 불과했으나 7년 만에 3배 늘었고 2018년에는 2조 원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해외시장에서도 애슬레저웨어를 포함한 스포츠웨어의 성장세가 빠른 것으로 알려졌다.

영원무역의 주요 고객 가운데 하나인 글로벌 애슬레저 브랜드 언더아머는 2016년 매출이 2015년 대비 21.8%, 룰루레몬은 14.0% 늘어났다.

영원무역은 2017년 매출 2조936억 원, 영업이익 1928억 원을 거둘 것으로 추산된다. 2016년보다 매출은 4.6%, 영업이익은 7.5% 늘어나는 것이다.
[Who Is ?]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성기학(왼쪽)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과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2015년 9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프리뷰 인 서울 2015(대한민국섬유교역전)'을 방문해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다.<뉴시스>

△노스페이스로 아웃도어시장 열어
영원무역이 단순한 의류 OEM회사에서 국내를 대표하는 아웃도어회사로 부상한 배경에 미국 아웃도어브랜드 노스페이스가 있다.

성기학은 영원무역의 자회사 골드윈코리아(영원아웃도어)를 통해 1997년 노스페이스를 국내에 소개하면서 판권도 확보해 직접 판매를 시작했다.

노스페이스가 국내에 도입된 1990년대 후반에는 아웃도어시장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아웃도어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노스페이스는 선풍적 인기를 끌며 국내 아웃도어시장을 장악했다.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 노스페이스 옷을 입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성기학은 아웃도어제품을 일상복패션의 영역까지 넓히며 성장을 이끌었다. 용도, 연령, 성별에 따라 시장을 세분화하고 전문화해 시장 자체를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술개발에도 공을 들인 덕분에 영원무역의 전문 기능성소재 기술, 무봉제 생산기술 등은 글로벌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영원무역 창업
성기학은 1974년 지인 2명과 함께 영원무역을 설립했다. 회사이름 영원은 팝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히트곡 ‘더 영 원스(The Young Ones)’에서 따왔다. 졸업 후 서울통상에 다니던 중 외국인 바이어 권유로 창업했다.

영원무역은 미국에 스키복 납품으로 시작했다. 성기학은 서울대 무역학과에 다닐 당시 산악부원으로 활동했는데 그때부터 산악용품에 관심이 많았다.

사업영역을 확장해 1990년대 들어서부터는 노스페이스 등 다양한 해외 유명 스포츠브랜드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OEM)으로 수출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베트남, 중국, 엘살바도르 등 세계 4개국에 생산거점을 뒀고 거느린 현지 직원만 8만 명에 가깝다.

영원무역은 창업 이래 43년째 흑자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인수합병으로 사업 다각화
성기학은 2015년 초 글로벌 자전거업체 스캇코퍼레이션을 인수했다. 당시 노스페이스 등이 아웃도어시장 침체로 성장둔화를 겪자 해외로 눈을 돌려 글로벌로 확장하기 위해서다.

2013년 프랑스 아웃도어 브랜드 ‘프아블랑(POIVRE BLANC)’도 인수했고 2014년 4월 미국 아웃도어 업체인 아웃도어 리서치도 인수하는 등 사업과 시장 다각화에 힘쓰고 있다.
[Who Is ?]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 영원무역 실적 추세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아웃도어시장이 성장둔화를 겪으면서 새로운 시장을 공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노스페이스를 운영하는 영원아웃도어의 수익성이 최근 2년 사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2012년부터 3년 동안 영업이익률이 10%대를 유지했으나 2015년 8%로 하락한 데 이어 2016년 4.4%까지 떨어졌다.

시장침체와 경쟁심화로 대부분 아웃도어회사들이 고전하고 있지만 영원아웃도어의 수익성 악화는 다른 곳보다 더욱 가파르다.

영원아웃도어는 2016년 매출 3901억 원, 영업이익 173억 원을 냈다. 2015년보다 매출은 3%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43% 급감했다.

2011년부터 4년 동안 5천억 원대 매출을 유지했으나 2015년부터 3천억 원대로 크게 줄었다. 영업이익도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내리막길을 걸었다.

영원아웃도어의 실적이 부진한 이유로 브랜드 충성도가 약해진 점이 꼽힌다. 경쟁이 과열되고 아웃도어시장 전체가 침체되면서 노스페이스의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영원아웃도어의 실적 부진은 그룹 중간지주사인 영원무역홀딩스에도 부담을 안기고 있다. 영원무역홀딩스는 영원아웃도어 지분 59.3%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 평가

성기학은 사업가 집안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1920년대에 마산에서 미곡 수출사업을 했고 아버지도 창녕에서 대규모 양파농장을 했다. 친형 성기상 회장과 동생 성기준 사장이 가업을 이어받아 푸드웰을 경영하고 있다.

성기학은 “(아버지에게서) 이상한 꼼수를 부리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업하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성기학의 고조할아버지는 1876년 흉년이 들자 땅을 팔아 주변 사람들을 구제하고 조부 역시 일제강점기 때 사재로 자양강습소라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다가 1·4후퇴 때 고향 창녕으로 피난을 간 뒤 정착했다.

대학 졸업 후 가발과 스웨터 수출업체인 서울통상에 들어가 1년 반 동안 회사원 생활을 했다. 신입사원 때부터 “내가 사장이다”는 생각으로 일했다고 한다. 업무 적응력이 높고 영어도 잘해 스웨덴과 유럽 거래처를 맡았다.

창업 이듬해 공장을 짓기도 전에 당시 세계 최대 스키복업체로부터 수주에 성공했다. 미국 화이트스텍의 도널드 케네디 회장이 성남 공장 부지를 둘러본 뒤 품질이 나쁘면 반품하겠다는 조건으로 오리털이 들어간 스키복 1만 벌을 주문한 것이다. 성기학은 동료들과 밤샘작업에 돌입했고 약속대로 스키복 9600벌을 미국행 배에 실어보냈다.

1984년 영원무역의 단독 오너가 된 뒤 아웃도어시장에 눈을 돌렸다. 국내에선 아웃도어라는 용어조차 낯설었지만 선진국에선 아웃도어 열풍이 불기 시작하던 때다.

카메라 모으는 취미가 있어 집에 4천 대 넘는 카메라가 보관돼 있다. 고등학생 때인 1963년 처음 카메라를 산 이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산악반으로 활동했다. 북한산에서부터 설악산,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의 산을 탔다. 그때부터 사진을 좋아해 함께 등산간 친구들 사진을 도맡아 찍어줬다고 한다.

당시 설악산 등반 때 만난 일본인 등반객이 입은 다운재킷에 충격을 받아 언젠가 한국도 이 시장이 뜰 것이라고 눈여겨 봐왔다고 한다. 다운웨어, 스키웨어뿐 아니라 방수복, 쿨맥스, 고어텍스 같은 제품도 그가 국내에 제일 먼저 소개했거나 직접 개발했다.

경영 스타일이 치밀하고 과감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섬유산업이 사양산업 취급을 받기 시작하던 1980년대에 오히려 방글라데시, 자메이카, 중국, 베트남 등에 차례차례 공장을 지어 나이키, 폴로 등 유명 브랜드를 고객사로 보유한 OEM기업으로 성장했다. 국내에 아웃도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1997년에 노스페이스를 도입해 국내에 아웃도어시장을 본격적으로 열었다.

존경하는 인물로 미국의 전설적인 소방관인 폴 레드 어데어를 꼽는다. 그는 1962년 사하라 사막의 가스전 화재 진압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소방영웅인데 이름을 딴 소방장비업체 레드 어데어를 세운 기업인이기도 하다. 직원들에게도 그의 열정적인 삶의 자세와 프로 정신을 틈나는 대로 강조한다.

일이 아닌 외부 활동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리면서 아웃도어업계에서 대표적인 ‘은둔형 CEO’로 분류됐지만 한국섬유산업연합회의 새 회장에 취임하면서 대외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산악인들을 오랫동안 후원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영석씨 등 정상급 산악인부터 김자인, 신윤선씨 등 클라이밍계의 주역들을 꾸준히 후원해왔다. 지난 2014년에는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에 취임해 국내 섬유패션 업계를 이끌고 있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창녕에 70억 원을 투자해 지상 3층(건평 1100평) 규모의 대규모 마을회관 '경화회관'을 지어 기부했다.

기업경영의 철학에 대해 ‘경근일신(敬勤日新)’이라고 답했다. 사무실 벽에 붙여두고 늘 새기고 있다고 한다. 경근은 노동을 존중한다는 뜻이고 일신은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
[Who Is ?]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이 2016년 6월11일 오전 평창 알펜시아리조트 스키점프대 앞에서 개최된 제1회 ‘노스페이스100 코리아’ 대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서울통상에서 근무했다.

1974년 영원무역을 설립했다.

1974년부터 1984년까지 영원무역 이사를 지냈다.

1984년 영원무역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1992년부터 영원아웃도어 대표이사를 지내고 있다.

1995년 한-방글라데시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2014년 8월 제13대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에 올라 14대 회장까지 연임했다.

2016년 3월까지 영원무역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 학력

196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0년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한림대학교에서 경영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이선진 갤러리목금토 관장과 사이에 3녀를 두고 있다.

큰딸 성시은 이사는 영원무역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와이엠에스에이(YMSA)의 사내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둘째인 성래은 영원무역홀딩스 사장이 가장 먼저 대표이사에 오르며 경영능력을 검증받았다.

막내인 성가은 영원아웃도어 상무는 영원아웃도어에서 노스페이스 등 브랜드 경영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 상훈

1997년 무역진흥대상을 받았다.

2005년 제12회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패션대상을 받았다.

2006년 납세자의 날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9년 제3회 언스트앤영 소비재부문 최우수 기업가상을 받았다.

2016년 전문직여성 한국연맹이 수여하는 BPW골드어워드를 받았다. 양성평등과 여성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공로가 평가됐다.

◆ 기타

성기학은 2016년 계열사에서 모두 154억8700만 원의 보수를 받았다.

영원무역홀딩스에서 급여와 퇴직소득을 포함해 141억6600만 원을 받았고 영원무역에서 13억2100만 원을 받았다.

영원무역홀딩스서 받은 퇴직금 138억4400만 원은 1974년 12월 26일부터 2016년 3월 18일까지 41년3개월 동안 근속한 대가로 지급됐다.
[Who Is ?]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성기학(오른쪽) 영원무역 회장이 평창동계올림픽 스포츠 의류부분 공식 후원사 협약식에서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왼쪽)에게 기념품을 전달하고 있다.

어록


“노동 생산성이 세계 10위권은 안 된다.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 잠재성장률을 높일 수 있도록 제반능력을 키워야 한다다. 직원들도 좋은 교육을 시켜야 하고 회사의 정직성과 합법성도 높여야 장기적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게 된다.”

“사실 특별히 여성 우대를 찬성하거나 주장한 적은 없다. 일 잘하는 사람을 뽑고 대우해준 것일 뿐이다." “여성의 잠재력을 회사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사용했다. 12억불 수출도 여성 임원들이 주도적으로 해나갔다. 자연히 성별 임금 격차도 안 두게 되더라”

“나는 사실 구호경영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42년 동안 오랫동안 견딘 기업인으로 경영 철학은 있다. 우선 포기하지 않았고 작은 조짐도 중시했다. 또 경쟁심을 가지고 시장에 나섰고 눈앞의 성공과 긴 성공을 같이 중요하게 여겼다. 장?단기 경영이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성과가 나온다. ‘천천히’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지만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덤빌 때는 팍 덤벼야 한다. 나는 공장을 지을 때 너무 정밀하게 안 하고 70% 얼개만 만들어둔다. 시장은 끝없이 바뀌기 때문이다. 시장에 맞는 공장이어야지. 공장을 완벽하게 지어놓으면 나중에 시장과 안 맞는다.” (2016/03/13, 여성신문과 인터뷰에서)

“효율성을 키우고 신뢰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뢰는 스피드 경영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잘해보겠다는 의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2016/03/13, 여성신문과 인터뷰에서 개인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사양기업은 있어도 사양산업이란 것은 없다. 섬유가 왜 사양산업인가. 사람이 옷 안 입고 살 수 있나?”

“정부의 역할은 일관성을 갖고 전체적인 정책 협조를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나선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근본적인 답은 역시 시장과 공장에 올인하는 것이다.”

“우리도 매일 위기감 속에서 살고 있다. 조금만 잘못하면 매출 떨어지고 이익률 떨어지고, 시장에서 ‘벌’받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더러 ‘회장님은 사업도 잘되고 하니 쉬엄쉬엄 하시죠’라고 얘기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나. 그러니 지금도 밤 비행기 타고 와서 아침에 일하고 그러는 거다.”

“사업한다는 사람이 대범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별로 좋은 거 같지 않다. 지금도 회사에서 단돈 100달러 나가는 클레임까지 제가 사인한다. 직원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다. 작은 사인을 무시하면 나중에 큰일난다. 남들이 보면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 같지만 저 자신은 소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산업계에서 참 안타까운 점은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좀 된다 싶으면 우르르 달려가고 사양이라는 말이 나오면 깊이 생각도 안 하고 침몰하는 배에 탄 것처럼 얼른 옮겨 타야겠다고만 생각한다. 사양이라고 한번 라벨이 붙으면 은행에선 자금을 안 대준다. 버릴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 앞으로 성장성이 있는데도 말이다”(2014/10/27, 한국경제와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책상머리에 앉아서 시작했으면 배운 게 거의 없었을 거다. 심부름도 열심히 하면 결국 내 자산이 된다. 누구에게도 천한 일이란 없다. 요즘 청년들은 자기한테 걸맞은 곳에 들어가겠다고 하지만 시장의 순리에 따라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카메라를 보면 비즈니스라는 건 참 예측할 수가 없다는 걸 느낀다. 캐논은 새로운 기술을 과감히 도입해 니콘을 눌렀다. 그렇다고 무조건 똑똑한 기술자들이 모여 만든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오스카 바르낙이라는 무명의 장인이 만든 라이카는 카메라의 명품으로 대접을 받는다.”

“기업이란 게 이모저모 따져보고 계산은 해야 되지만 무조건 안 된다고 겁만 내서도 안된다. ‘계산된 리스크(calculated risk)’라면 과감하게 떠안아야 한다.”

“경기가 안 좋을 때가 더 좋은 기회다. 경기 좋을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하는 거다.”(2014/09/03, 한국경제와 인터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