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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가포르 대표적 랜드마크 마리나베이샌즈 호텔에 조명이 들어온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은 2025년 9월 국민성장펀드 보고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투자를 1조3천억 원 정도 받으면 아무도 실패하지 않는다”며 셀트리온의 생사를 가른 순간으로 싱가포르 정부의 ‘투자’를 꼽았다.
한국도 한낮의 햇볕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던 6월 둘째 주, 일주일 가량 머물렀던 싱가포르는 끊임없이 셀트리온 같은 곳을 육성하는 나라였다.
아직 가능성에 불과한 기업과 기술로 ‘돈’이 흘러갈 수 있는 시스템을 일찌감치 구축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장기적 목표와 정책 방향성을 바탕으로 투자자와 기업, 연구개발 인프라, 정책까지 ‘잘’ 구성한 촘촘한 연결망에서 2009년 당시 셀트리온 투자는 ‘무모한’ 결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많은 투자 결정 중 하나로 싱가포르에서 이 같은 과감한 스타트업과 벤처투자는 싱가포르 금융시장과 산업 생태계를 발전시키는 토양이 됐다.
싱가포르는 지하철 한 두 정거장 사이에 대형 금융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마리나베이부터 가든스 더 베이, 시내에서 떨어진 센토사섬까지도 보통 30분 정도면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은 나라다.
하지만 현지에서 느낀 싱가포르 금융시장은 미래를 보고 차근차근 쌓아올린 견고하고 촘촘한 시스템 속에서 쥬얼창이(싱가포르 대형 쇼핑몰)의 거대한 인공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처럼 힘차고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방법은 명확했다. 판을 짜는 정부와 이를 따르는 민간과의 시너지.
“정부는 시장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움직일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은행과 증권사, 정책금융기관, 스타트업 지원기관, 거래소, 학계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꼽은 ‘금융강국’ 싱가포르의 성공 비결이다.
◆ 아세안 잇고 혁신산업 키우는 싱가포르, 비결은 '연결'과 ‘연속성’
▲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연결통로에 설치된 글로벌 금융사 HSBC 광고. '당신의 사업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How do you grow your business?)'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이한다. <비즈니스포스트>
기술이 있다고 해서 산업이 저절로 자라지도 않는다. 기업이 성장하려면 초기 투자와 기술검증, 후속 투자, 자금 회수시장, 글로벌 네트워크가 모두 맞물려야 한다.
싱가포르 생산적 금융 생태계의 경쟁력은 바로 이 맞물림에 있다.
싱가포르는 규제당국과 자본시장, 스타트업, 대학과 연구기관, 글로벌 기업 등 시장 관계자들이 각각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역할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을 설계했다.
자본이 혁신으로 흘러가고, 혁신이 다시 산업 성장과 투자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든 셈이다.
이런 생산적 구조를 바탕으로 싱가포르는 단순히 글로벌 자본이 모이는 ‘금융 허브’가 아니라 아세안으로 향하는 자본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등 아세안지역의 금융수요를 연결하고 나아가 인도 등 성장시장의 계약도 싱가포르를 통한다.
한국 금융사들도 싱가포르를 내수 시장이 아닌 현지 거점이 없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 주변시장을 연결하는 전략적 거점으로 두고 있다.
이런 경쟁력 뒤에는 싱가포르통화청(MAS)의 역할이 있다.
싱가포르통화청은 중앙은행과 금융감독 기능을 함께 수행하면서 단순히 규제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혁신 금융과 산업이 싱가포르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제도와 시장을 함께 설계한다.
글로벌 기준에 맞는 시스템으로 다양한 국가, 지역의 프로젝트와 계약이 들어올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다
안정적 정치 구조 아래 단발성 정책이 아닌 장기 계획으로 국가 경제와 금융시장을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거래소(SGX)는 성장기업이 자금을 조달하고 투자자가 회수할 수 있는 시장을 계속 넓혀가고 있다.
중소형주 활성화 프로그램(EDP)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고 홍콩·베트남·인도네시아·태국 기업의 SDR 상장을 유치했다. SDR은 해외 기업 주식을 싱가포르 거래소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발행하는 예탁증서다.
최근에는 나스닥과 공동 상장 플랫폼도 추진하며 동남아 기업의 글로벌 자본시장 진출 통로를 만들고 있다.
장기자본을 공급하는 테마섹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싱가포르 국영 투자회사 테마섹은 단기 수익보다 산업 경쟁력과 시장 신뢰를 중시하는 투자 철학 아래 장기자본을 공급한다. 정부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투자 의사결정은 독립적으로 이뤄지고 시장 논리에 바탕해 장기적 관점에서 산업을 육성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혁신과 모험자본을 공급하는 체계도 세분화돼 있다.
싱가포르 재무부 산하 투자기관 SG이노베이트는 양자기술과 핵융합 등 상용화까지 10~20년이 걸리는 초기 기술 스타트업을 지원한다.
통상산업부 산하 SG그로스캐피탈은 시장 진입 단계의 딥테크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고 국방부 산하 캡비스타는 안보·국방 기술을 육성하는 등 기술의 성장 단계와 분야에 맞춰 투자 기능을 나눠 수행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들 기관으로 초기 위험을 분담해 시장을 만들고 산업이 일정 궤도에 오르면 민간으로 넘기는 구조로 혁신 생태계를 뒷받침하고 있다.
결국 싱가포르통화청은 제도를 연결하고, 싱가포르거래소는 자본시장을 연결하며, 테마섹과 SG이노베이트 SG그로스캐피탈 캡비스타는 성장 단계별 자본을 연결한다.
싱가포르 선진 금융시장의 경쟁력은 개별 기관이 아니라 이 연결과 연속성의 구조에서 나왔다.
◆ '생산적 생태계', 투자 규모 아닌 '시장 신뢰'와 '유기적 구조'가 중요하다
▲ 마리나베이에서 바라본 싱가포르 금융지구의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정부는 150조 원 규모 국민성장펀드를 중심으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에너지 등 국가 전략산업에 정책자금을 공급하고 있다.
국민성장펀드는 출범 뒤 6개월 만에 인공지능(AI)과 반도체, 2차전지, 바이오, 방산분야 기업 17곳과 해상풍력과 육성풍력 등 에너지, AI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 사업 4개의 투자지원을 승인했다.
직·간접 투자와 저리대출 등을 통한 누적 지원 규모는 14조6천억 원에 이른다.
삼성전자, 네이버, LS전선, 심텍, 근우, 이수스테셜티, SK바이오사이언스, 리벨리온, 퓨리오사AI, 리가켐바이오, LIG D&A 등과 국가AI컴퓨팅센터와 스마일게이트 데이터센터, 영양 육상풍력, 신안우이 해상풍력 등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국민성장펀드가 미래 산업으로 자본을 흘려보내는 역할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것이다.
다만 싱가포르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생산적 금융 성공의 열쇠는 투자 규모보다 구조에 달려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싱가포르 현지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국민성장펀드가 성공하려면 정부가 산업과 기업을 직접 선택하는 구조보다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원칙과 목적(맨데이트)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이어져야 하고 시장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며 "정부는 초기 위험을 분담하되 이후에는 시장이 자율적으로 혁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남준 난양공대 교수 역시 생산적 금융은 특정 산업에 돈을 공급하는 정책을 넘어 금융과 기술, 기업, 시장이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이 수익을 내야 고용과 투자가 이어지고 결국 혁신도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생산적 금융 역시 시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바라봤다.
국민성장펀드는 이제 출발선에 섰다.
싱가포르는 알려줬다. 정부가 제도를 만들고 시장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장기자본과 혁신기업, 자본시장이 하나의 구조 안에서 연결될 때 생산적 금융은 비로소 지속가능한 경쟁력이 된다고.
한국 생산적 금융도 이제는 '얼마를 투자할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박혜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