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소프트뱅크 손정의 인생을 바꾼 '일기일회'의 순간

▲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손정의 회장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지원 아래 오픈AI의 샘 올트먼,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과 함께 5천억 달러 규모의 '스타게이트(Stargate)'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 2월4일엔 샘 올트먼과 함께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이재용 회장을 만나 스타게이트 협력을 논의했다. <소프트뱅크 페이스북>

[비즈니스포스트]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일기일회(一期一会)란 게 있다. 일본 다도를 정립시킨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일기일회는 ‘평생 한 번의 기회, 평생 한 번의 만남’을 의미한다. 일본어로 읽으면 ‘이치고 이치에’라 한다. 

예전 일본 비즈니스맨들을 만날 때마다 좌우명을 물어본 적이 있는데, 의외로 일기일회를 꼽는 사람들이 많아 적잖이 놀랐다. 사람과의 관계(인맥)를 중요시하는 비즈니스맨 입장에서는 그 누군가와의 ‘한 번의 만남’이 인생을, 기업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필자는 생각해 보았다. “기업 리더 중에 ‘일기일회’로 미래를 개척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누가 있을까?”라고. 가장 먼저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의 손정의 회장이 떠올랐다. 

최근 미일 인공지능(AI) 인프라 프로젝트인 스타게이트(Stargate)를 추진하고 있는 손정의야말로 가장 드라마틱하고, 가장 임팩트 있는 ‘일기일회’의 순간을 맞았던 인물이 아닐까 싶다. 
 
때는 1993년 가을의 어느 날. 35세의 벤처기업가 손정의는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당시 그는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회인 컴덱스(COMDEX)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눈독을 넘어 ‘아예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매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컴덱스는 최신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동향을 살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밀려든 정보가 넘쳐나던 곳이었다. 그런 컴덱스를 설립된 지 10년이 조금 넘은 소프트뱅크가 품는다는 건 무모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1990년대 당시 일본은 버블 붕괴 후유증 속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본 경제의 그런 무기력함은 야심만만한 손정의에겐 오히려 자극제가 되었다. 

손정의는 면담을 요청해 컴덱스 소유주인 쉘던 아델슨(Sheldon Adelson: 1933~2021)을 만날 수 있었다. 협상의 달인, 게다가 노회한 유대계 출신. 그런 아델슨은 손정의가 상대하기엔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가 쓴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스기모토 다카시 저, 서울문화사)이라는 책은 그날의 상황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컴덱스를 사고 싶습니다.”

손정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돌한 요구에 놀란 아델슨이 되물었다.

“그만한 자금이 확보됐나?”

“지금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만들 겁니다. 그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컴덱스를 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자금이 마련되는 대로 다시 오게.”

아델슨은 아마 손정의가 돈 보따리를 들고 다시 찾아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손정의는 다음 해 소프트뱅크를 주식 상장(점두 공개)하면서 2천억 엔이라는 실탄을 확보했다. 그러곤 재차 아델슨 앞에 나타났다. 

“매수 가격을 깎을 생각은 없습니다. 단 한 번에 승부를 결정짓고 싶습니다. 받고 싶은 가격을 말씀해 주십시오.”

손정의는 컴덱스를 매수하기 전까지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아델슨이 잠시 뒤 입을 열었다.

“8억 달러.”

손정의는 주저하지 않고 “좋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초대형 M&A가 한 방에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손정의의 배짱이 이룬 결과였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소프트뱅크 손정의 인생을 바꾼 '일기일회'의 순간

▲ 일기일회(一期一会). 일본 다도에서 유래한 일기일회는 '평생 한 번의 기회, 평생 한 번의 만남'을 의미한다. 손정의 회장은 30대 시절, 카지노 재벌 라스베이거스 샌즈(Las Vegas Sands) 창업주 쉘던 아델슨과 '일기일회'의 협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손 회장의 배짱에 감동한 아델슨은 훗날 손 회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픽사베이>

컴덱스 인수로 손정의는 소프트뱅크의 존재를 알림과 동시에 미국 IT업계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프트뱅크의 손에 넘어간 컴덱스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IT업계가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이동하면서 PC 산업은 서서히 내리막을 걸었고, 게다가 혁신적인 정보기술 쇼 CES가 약진하면서 컴덱스는 2003년의 개최를 마지막으로 소멸해 버렸다. 

소프트뱅크 입장에선 8억 달러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셈이다. 따지고 보면 소프트뱅크로서는 흑역사임에 틀림없다. 손정의의 그런 실패와는 정반대로 쉘덴 아델슨은 새로운 성공의 길을 달렸다. 

컴덱스 매각 대금 8억 달러를 밑천 삼아 거대한 호텔을 건설하고, 라스베이거스를 넘어 마카오, 싱가포르까지 진출하는 등 비즈니스 세계를 넓혀 카지노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카지노 대기업 라스베이거스 샌즈(Las Vegas Sands)는 그렇게 급성장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손정의의 승부수가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반전은 22년 뒤 일어났다. 

때는 2016년 12월6일. 손정의는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있는 트럼프 타워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도널드 트럼프와 전격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트럼프는 “마사(masa)는 멋진 남자”라며 보도진에게 손정의를 소개했다. ‘마사’는 손정의의 일본 이름 ‘손 마사요시’의 애칭이다. 대선에서 승리한 차기 대통령이 일개 기업의 사장에게 애정을 표한 것이다. 

손정의는 어떻게 까다롭기로 소문난 트럼프를 만날 수 있었을까? 둘을 연결시켜 준 건 다름 아닌 컴덱스를 매각했던 쉘던 아델슨이었다. 그는 20년이 지나서도 배짱 좋은 승부사 손정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카지노 재벌 아델슨은 트럼프의 초고액 후원자가 되면서 취임위원 명단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그런 아델슨이 손정의에게 먼저 연락해 트럼프와 만나도록 주선했던 것이다. 

손정의의 삶을 복기해보자면, 쉘던 아델슨과의 만남이 평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기일회’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유대계 출신인 아델슨은 트럼프 집권 1기 당시, 이스라엘 외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많은 유대인 및 시오니스트 조직을 폭넓게 지원한 덕에 이스라엘 정계에 많은 우군을 갖고 있었다. 

2018년 5월 텔아비브에 있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도 그였다. 그만큼 트럼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2021년 아델슨이 사망하자 이스라엘 태생의 아내(미리암 아델슨)가 남편을 대신해 트럼프를 재선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아델슨은 죽었지만 그가 다리를 놓아준 손정의와 트럼프의 결속력은 더 강해졌다는 평가다.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Politico)는 1월21일 ‘트럼프 반지에 키스하러 온 일본 기술 거물(The Japanese Tech Titan Who Came to Kiss Trump’s Ring)’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손정의를 부각시켰다. 

손정의는 트럼프를 만나 미국에 1천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폴리티코는 “이는 2016년 12월 트럼프 타워 만남에서 약속했던 금액의 두 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장사꾼’ 트럼프를 사로잡는 건 돈뿐이었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소프트뱅크 손정의 인생을 바꾼 '일기일회'의 순간

▲ 미국 최대 카지노 운영업체인 라스베이거스 샌즈(Las Vegas Sands)가 운영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대표적 리조트 호텔 마리나베이샌즈.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회 컴덱스를 소유하고 있던 쉘던 아델슨(작은 사진)은 손정의 회장에게 컴덱스를 판 매각 대금으로 싱가포르 등으로 사업을 넓히면서 마리나베이샌즈를 운영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아델슨재단>

그런 트럼프는 손정의에게 ‘큰 떡’을 하나 선물했다.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다. 알려졌듯이, 스타게이트는 소프트뱅크와 오픈AI가 주도하는 새로운 클라우드 컴퓨팅 사업으로, AI 모델을 지원하는 대규모 데이터 센터를 미국 전역에 구축하는 게 핵심이다.  

일본은 손정의가 주도하는 스타게이트를 통해 떡고물을 챙기는, 이를테면 낙수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트럼프가 아주 고약한 관세정책으로 세계 경제를 헤집어 놓고 있는 상황. 손정의 같은 ‘비빌 언덕’이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손정의 회장의 투자 방식은 ‘AI 군(群) 전략’에 집약되어 있다. 스타트업 중 최고의 AI 혁신기업에 투자하는 개념이다. 손정의는 2013년 미국 3위 통신기업 스프린트를, 2016년 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을, 2024년 영국 AI 칩 제조업체 그래프코어를 잇달아 인수하면서 글로벌 테크놀로지 제국을 구축했다. 

필자는 칼럼을 쓰면서 오래전부터 정리해 두었던 ‘손정의 노트’를 다시 들춰보았다. 손정의의 비즈니스 전략과 경영철학, 에피소드 그리고 어록 등을 메모해 둔 노트다. 거기서 어록 하나를 옮겨 본다. 

‘먼저 오를 산을 정하라(まず登る山を決めろ)’

손정의가 신입사원들과 젊은이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말이다. 그는 오르고 싶은 산을 먼저 결정하면, 그러니까 목표 설정만으로도 인생의 절반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필자는 여기에 행동과학자의 말을 보태고 싶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 케이티 밀크먼(Katy Milkman) 교수는 “목적이나 사명을 분명하게 파악하여 북극성으로 삼는 것이 위대함의 본질”이라고 했다. 손정의와 밀크먼 교수의 말은 표현만 다를 뿐 의미는 동일하다. 

손정의는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꼬집었다.

“사람들은 올라갈 산을 정하지 않고 산기슭을 빙글빙글 돌기만 하거든.”(미키 타케노부 저, ‘왜 나는 기회에 집중하는가’, 다산북스)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