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이후 한국은행의 유동성 확대 조치 등 경제의 불확실성이 지속돼 부동산 시장도 침체될 수 있다는 시각이 나온다. 사진은 서울 시내 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12월3일 밤에 있었던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국회와 시민에 의한 비상계엄 해제,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 가결까지 이어진 시간들은 숨 가쁘기 이를 데 없었다. 헌정질서가 전복될 뻔한 아슬아슬한 위기를 대한민국은 주권자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이제 헌재의 탄핵심판결정과 그에 따라 대통령 선거 등이 치러질 수 있다. 헌정과 정치의 시간표는 돌아가겠지만 가뜩이나 휘청거리던 경제는 비상계엄사태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당장 금융당국의 유동성 무제한 공급과 원화가치 하락은 한국경제의 숨통을 조일 전망이다. 한국경제가 어려운데 경제의 일부인 부동산이 예외일 수 없다.
유동성 홍수라는 극약처방을 내린 한국은행
지난 11일 한국은행(한은)이 비상계엄 선포 직후인 지난 4일부터 총 14조 원 규모로 환매조건부채권(RP)을 매입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기획재정부·한국은행·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은 연이은 긴급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에서 해외 기관과의 소통 확대를 비롯해 금융 시장 안정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또한 한국은행은 변동성이 높아진 금융·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내년 2월 28일까지 한시적으로 비정례 RP를 매입할 방침이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이 확산된 2020년 3월 이후 약 4년 만이다.
앞서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지난 4일 오전 계엄 선포·해제 관련 임시 회의를 열고 시장 안정화 조치를 의결한 바 있다. 한은은 우선 이날부터 향후 14일간 약 151조 원 규모의 유동성을 RP 매입으로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유동성 공급은 시장 수요에 맞춰 충분히 늘려갈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무제한'이라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한은은 보통 금융기관 등으로부터 정례적으로 RP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유동성을 시장에 공급하는데, 계엄 선포·해제 등으로 금융시장이 불안한 만큼 비정례 RP 매입으로 시장을 빠르게 안정시키겠다는 뜻이다. 한은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다음날인 지난 4일 10조8100억 원에 달하는 RP를 매입했다.
아울러 한은은 RP 매매 대상 증권에 산업금융채권, 중소기업금융채권, 수출입금융채권, 9개 공공기관이 발행하는 특수채권, 농업금융채권, 수산금융채권, 은행법에 따른 금융채 등도 추가했다. RP 매입 과정에서 금융기관은 한은에 담보로서 증권을 맡겨야 하는데, 다양한 종류의 증권을 한은이 받아줄수록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유동성을 확보하기가 수월해진다.
RP 매매 대상 기관 범위 역시 국내 은행과 외국은행 지점 전체, 투자매매업자와 투자중개업자 전체, 한국증권금융으로 넓혔다. 한은은 비정례 RP 매입 외에도 단기 유동성 공급이라는 같은 맥락에서 국고채 단순매입, 통안증권 환매 등도 충분한 규모로 추진하기로 했다. 필요한 경우 외화 유동성도 외화 RP 매입을 통해 공급하고 환율이 큰 폭으로 변하면 다양한 안정 조치를 적극적으로 시행할 방침이다.
유동성 홍수는 원화가치 하락과 물가 상승을 초래해
한국은행의 무제한 RP 매입은 단기적으로는 금융시장 안정과 자산시장 안정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경제에 혹독한 대가를 요구할 확률 또한 높다.
양적완화의 일종이라 할 환매조건부 채권 무제한 매입은 시장금리를 사실상 낮추는 역할을 수행한다. 갑자기 유동성이 시장에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오니 돈의 값인 금리가 낮아지는 건 당연하다.
금리가 낮아지면 이자 부담에 허덕이는 경제 주체나 자산시장에는 조금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1400원 위에서 놀고 있는 원/달러 환율을 자극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이 미국에 비해 거시경제지표들이 너무 나쁜데다 금리 격차까지 벌어지니 원화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만약 원/달러 환율이 1450원을 돌파하는 일이 벌어지면 환율 상방이 열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고를 마냥 털어넣을 수도 없는 일이다.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시장에 풀린 천문학적 유동성은 인플레이션을 격발할 수 밖에 없다. 통계와는 달리 체감 물가는 여전히 살인적인데 다시 물가가 움직이면 정말 비명이 터질 것이다. 부차적이지만 금리 인하 효과를 야기하는 유동성 공급이 임계점을 돌파한 가계부채를 자극할 우려도 없지 않다.
요약하자면 한국은행 등의 금융당국은 금융시장과 자산시장 안정을 위해 환매조건부 채권을 무제한 매입하는 천문학적 유동성을 시장에 공급하고 있지만 이는 원화가치 하락, 인플레이션 자극, 가계부채 증가 등의 부작용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유동성 홍수라는 극약처방이 이렇게 무섭다.
원화가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악몽?
한 나라의 경제체력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담긴 환율은 비상계엄 사태 이후 1430원선 안팎에서 요동치고 있다.
심지어 일본계 글로벌 투자은행(IB)인 노무라증권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정치 불확실성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며 원·달러 환율이 내년 5월 1500원까지 상승할 것이란 충격적인 전망을 내놨다.
환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가운데 외환보유고는 4000억 달러가 위협받고 있다. 11월 말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153억9000만 달러로 세계 9위 수준이다. 자칫하면 외환보유고 4000억달러가 붕괴될 수 있는데 이는 외국투자자금의 탈출 러시로 이어질 수 있는 악재다.
주지하다시피 원달러 '환율 폭등'은 환차손, 수입물가 상승 등의 형식으로 시민들을 타격한다.
사면초가의 한국경제에 엎친 데 덮친 격
그렇지 않아도 한국경제는 윤석열 정부 들어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민간소비, 기업투자, 정부재정, 순수출 등의 전 부문이 붕괴일로인 상황에서 보호무역과 관세전쟁을 선포한 트럼프 2기의 출범은 한국경제에 비상한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소규모 개방경제 체제인 한국에서 반도체 등의 수출주력상품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연이은 탄핵사태는 휘청거리는 한국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위에서 살펴본 유동성 홍수와 원화가치 하락은 비상계엄 여파로 인한 상처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한국경제가 반등할 수 있는 길은 조속히 새 정부를 구성해 대외신인도를 회복하고 정부재정을 풀어 민간소비를 진작시키는 동시에 협상력을 발휘해 트럼프 2기 정부의 관세전쟁에 대응하고, 중국과의 관계 복원을 통해 순수출을 크게 늘리는 길 뿐이다. 수출과 소비가 증가하면 기업투자는 저절로 늘어난다. 아울러 4차 산업혁명에서 승리하기 위한 투자와 지원을 범정부 차원에서 벌여야 한다.
거시경제에 영향을 받는 부동산 시장 역시 당분간 침체 상황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전고점 대비해서 가격조정과 기간조정이 충분치 않았던데다 부동산 시장을 큰틀에서 규율하는 거시경제지표들이 극악이기 때문이다. 호흡을 길게 할 타이밍이다. 이태경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이태경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은 땅을 둘러싼 욕망과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토지정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투기공화국의 풍경’을 썼고 ‘토지정의, 대한민국을 살린다’ ‘헨리 조지와 지대개혁’을 함께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