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컨테이너’로 물류 상식을 바꾼 혁신가 말콤 맥린

▲ 말콤 맥린(Malcolm McLean: 훗날 Malcom으로 바꿈)은 컨테이너 크기를 표준화하고 현대적 컨테이너화 개념을 개발, 대중화함으로써 해운 산업에 혁명을 일으킨 미국 기업인이다.  <미국 비즈니스 역사 센터>

[비즈니스포스트] 2001년 5월 30일 오전 11시 뉴욕의 한 교회. ‘컨테이너 운송의 선구자’ 또는 ‘컨테이너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말콤 맥린(Malcom McLean, 1913~2001)의 장례 예배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30분 뒤 해양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맥린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정해진 시간에 수천 척의 선박이 ‘전통적인 해상 인사’인 경적을 세 번 길게 울렸던 것이다. 미국 물류 전문매체 ‘프레이트 웨이브(Freight Waves)’의 기사 제목(CONTAINERSHIPS TO BLOW WHISTLES AS TRIBUTE TO McLEAN)만 보더라도 그날의 장례식은 장엄하면서도 감동적인 배웅이었다.

“배는 바다에 있을 때만 돈을 번다.”(A ship earns money only when she's at sea)

말콤 맥린과 함께 ‘트레일러 브릿지’(Trailer Bridge)’라는 운송업체를 공동 창업한 존 맥카운(John McCown)에 따르면 맥린은 이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글로벌 블로그 플랫폼 medium.com 2023. 4. 27)

전통적인 옛 부두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큰 배는 부두에 접안하지 못하고 먼바다에 정박한 채 작은 배로 화물을 내리고 싣는 과정을 거치면서 며칠씩 부두에 머물러야 했다. 

맥린은 이런 해상 운송의 맹점인 ‘병목 현상’, 즉 항구에서 배가 오랜 시간 기다리는 비효율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그의 최고 경쟁력은 ‘표준화된 컨테이너’를 통한 비용 절감에 있었다. “배는 바다에 있을 때만 돈을 번다”는 맥린의 어록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사실 말콤 맥린이 만들어낸 표준화된 컨테이너 시스템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물류 운송 체제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전통적인 부두가 거대한 컨테이너 터미널로 탈바꿈하면서 해상 물류 풍경은 그야말로 천지개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는 ‘20세기의 가장 빛나는 발명은 운송 컨테이너였다’(The Most Brilliant Invention Of The 20th Century Was The Shipping Container, 2022. 1. 19)는 말로 맥린의 위업을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맥린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 필자와 함께 그 거인을 만나러 가보자.  

1956년 4월 26일은 세계 물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날로 기록된다. 트럭 운전기사 출신의 맥린이 컨테이너를 활용해 최초의 컨테이너선을 출항시켰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마크 레빈슨은 ‘컨테이너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나’라는 부제가 붙은 책 ‘더 박스(The BOX: 청림출판)’에서 그날을 이렇게 적고 있다. 

<뉴저지주 뉴어크 항에 정박한 낡은 유조선 아이디얼 엑스(Ideal X)호에 대형 크레인이 알루미늄 소재로 된 박스 58개를 실었다. 7분에 한 개씩 컨테이너가 적재됐고 여덟 시간도 걸리지 않아 모든 선적 작업이 끝났다. 배는 5일 뒤 휴스턴 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대기하던 58대의 트럭은 금속 상자를 하나씩 나눠 싣고 목적지로 향했다. 혁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컨테이너’로 물류 상식을 바꾼 혁신가 말콤 맥린

▲ 말콤 맥린은 2차 세계대전에 쓰였던 유조선 아이디얼 엑스(Ideal X)호를 구매하여 갑판에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도록 개조했다. 아이디얼 엑스호는 소유주가 바뀌면서 1964년 일본에서 해체됐다.

맥린의 혁명은 ‘표준화’에 있었다. 컨테이너 크기를 표준화하여 선박이나 트럭에 깔끔하게 쌓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이미 세상에 컨테이너는 존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컨테이너화라는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품고 있는 동안 그것을 현실로 만든 건 말콤 맥린이었다. 

말콤 맥린은 이른바 ‘브리콜라주 기업가 정신(bricolage entrepreneurship)’의 소유자였다. 브리콜라주(Bricolage)는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만든 용어로 손에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하고 재결합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를 맥린에 적용하면 그는 선박과 트럭을 하나로 묶으면서 ‘컨테이너화’라는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냈다. 

햇병아리 트럭 운전기사로 인생을 출발한 말콤 맥린의 위대한 꿈은 대공황을 통해 부화하기 시작한다.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맥린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미국은 대공황의 한가운데 있었다. 선택지는 없었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1934년 스무 살 무렵, 주유소에서 일하며 모은 120달러로 중고 트럭 한 대를 구입했다. 수완이 좋았다. 6년 만에 트럭은 30대로 늘어났고 1950년대 중반 그의 회사 ‘맥린 트러킹(McLean Trucking)’은 트럭 1700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시 해운 운송은 대표적인 ‘병목 업종’이었다. 맥린은 부두 노동자들이 트럭에 화물을 싣거나 배로 옮기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과정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미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했다. 

“내 트레일러를 그냥 들어 올려 배 위에 올려놓을 순 없을까? 내용물은 건드리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맥린은 1955년 트럭회사를 팔고 컨테이너 사업에 도박을 걸었다. 새로 인수한 회사 이름을 씨랜드(Sea-Land)로 지었다. 그러곤 유조선을 사서 배를 개조했다. 그의 컨테이너에 대한 아이디어는 마침내 첫 번째 컨테이너선 아이디얼 엑스(Ideal X)호의 출항(1956년 4월 26일)으로 구현됐다. 

아이디얼 엑스호의 성공적인 출항 이듬해인 1957년 10월 4일 맥린은 처음부터 컨테이너로 설계된 선박 ‘게이트웨이 시티(Gateway City)’를 투입했다. 이 배는 아이디얼 엑스호 보다 3배 이상인 226개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었다. ‘게이트웨이 시티’의 항해는 현대 컨테이너선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맥린의 배들이 컨테이너 혁명을 일으킨 10년 뒤인 1966년 한국의 한 기업인도 컨테이너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한진그룹을 창업한 정석(靜石) 조중훈(1920~2002)이었다. 당시 그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현지를 시찰하고 있었다. 조중훈 평전 ‘사업은 예술이다’(이임광 지음, 펴낸 곳 청사록)라는 책은 이렇게 적고 있다. 

<1966년 6월 어느 날, 조중훈은 베트남 퀴논 항에서 미국 화물선의 하역을 지켜보며 넋을 잃었다. 눈앞에서 거대한 갠트리 크레인(Gantry crane)이 화물선에서 기관차만 한 철제 궤짝을 하나씩 부두에 내려놓고 있었다. 컨테이너 한 개의 무게는 40톤에 달했다. (...) 그것을 배에서 부두로 옮기는 데 2분도 걸리지 않았다. (...) 게다가 컨테이너 속에 든 군수품은 따로 부리는 과정 없이 통째 트럭에 실려 부대를 향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중훈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넋이 나갔다. 100개가 넘는 컨테이너가 다 내려질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고 한다. 당시 조중훈이 본 하역 작업은 다름 아닌 말콤 맥린의 회사 씨랜드(Sea-Land)가 하고 있었다.

새롭게 변해 가는 물류 현장을 직접 목도한 조중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곧바로 일본 조선소에 컨테이너선을 주문 1972년 한국 최초의 컨테이너선 ‘인왕호’를 확보하게 되었다. 

일본보다 4년밖에 뒤지지 않는 발빠른 행보였다. (일본 최초의 컨테이너선 하코네마루호는 1968년 선보였다) 그런 조중훈이 1978년 맥린의 씨랜드와 합작투자로 설립한 컨테이너 전용 선사가 한진해운이었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컨테이너’로 물류 상식을 바꾼 혁신가 말콤 맥린

▲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컨테이너 시스템은 갠트리 크레인(Gantry crane) 덕에 가능하게 됐다. 갠트리 크레인은 거대한 강철 구조물로, 높이가 60미터나 되며 900톤이 넘는 무게를 지탱한다. 높은 레일 위에 설치돼 필요할 때마다 앞뒤로 이동하며, 컨테이너를 내리는 작업과 싣는 작업이 동시에 이뤄진다. <픽사베이>

다시 맥린 이야기. 맥린의 회사 수익성을 크게 도약시킨 건 베트남 전쟁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서 병참 운용에 애를 먹고 있었다. 항구들의 수심이 낮아 큰 배들의 접안이 쉽지 않아서 화물 처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말콤 맥린이었다. 

맥린의 회사는 미군 당국과 컨테이너선 운항 계약을 체결하고 요충지인 캄란만(Cam Ranh Bay)을 대형 컨테이너 항구로 변모시켰다. 한 대의 컨테이너선이 기존 배 10척의 화물량을 소화하면서 군수품 보급은 상당히 원활해졌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맥린의 컨테이너선들은 미국에서 베트남으로 향할 때는 군수품으로 꽉 찼지만 미국으로 돌아갈 때는 텅 빈 상태였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맥린의 회사는 충분한 수익을 올리고도 남았다. 

고민 끝에 맥린의 아이디어가 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만일 빈 배가 아니고 다른 데서 유료 화물을 실을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했다. 이어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일본에 들르면 어떨까?”

당시로서는 블루오션이었던 일본을 공략할 수 있는 기발한 경영 전략이었다. 그 무렵 일본은 세계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중의 하나였다. 때마침 일본 정부도 컨테이너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렇게 씨랜드의 컨테이너선들은 일본 제조업체들이 대량으로 생산한 전자제품 등을 가득 싣고 요코하마항과 태평양 연안을 오갔다. 당초 베트남이라면 빈 배로 가야 했을 상황이지만 일본 항구에선 물품을 싣는 족족 남는 장사였다. 

맥린은 컨테이너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후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1969년 씨랜드를 담배회사 RJ 레이놀즈에게 매각했고 10년 뒤인 1979년엔 US Lines라는 해운업체를 새로 인수했다. (씨랜드는 세계 2위 해운사인 덴마크 머스크에 흡수됐다.)

맥린은 한국의 대우조선소에 12척의 ‘에콘십(Econoships: 이코노미와 배의 합성어)’를 주문했는데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유가가 오히려 떨어지면서 연료 비용을 줄이기 위해 도입한 에콘십은 화근이 되었다. 1986년 파산을 선언하면서 맥린의 시대는 끝이 난 듯했다.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던 맥린은 1992년 78세 나이에 ‘트레일러 브릿지(Trailer Bridge)’라는 운송업체를 시작하면서 재기했다.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우연히 마주친 한 이등 항해사가 맥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그 맥린이 맞나요? 오래전에 죽은 줄 알았어요.”

맥린은 1999년 국제 해양 명예의 전당에 의해 ‘세기의 인물(Man of the Century)로 지정되었고 2년 후인 2001년 5월 87세로 사망했다. 

미국 비즈니스 역사 센터는 그런 맥린을 ‘세상을 바꾼 숨겨진 혁신가(Unsung Innovator Who Changed the World)’라고 정의했다. 니틴 노리아(Nitin Nohria) 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학장은 맥린의 혁신 방식에 대해 이런 찬사를 보냈다. 

“산업을 ‘재구조화(restructure)’하거나 ‘재창조(reinvent)’하는 데 도움을 준 그를 우리는 20세기의 위대한 비즈니스 리더라고 지칭합니다.”(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사이트 인용)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