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장이 29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공포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전세사기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또다시 멀어졌다.
정부여당이 마련한 방안도 여당이 마련한 방안도 당장 시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택 시장에서는 전세사기의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다. 전세사기 사태의 원인이 된 ‘깡통전세’의 위험성 역시 커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9일 정부는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임기 국무회의를 열고 전날 국회를 통과한 5개 법안 가운데 세월호피해지원법 개정안을 공포하기로 심의, 의결했다.
전세사기 피해자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이하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등 나머지 법안을 놓고는 윤석열 대통령에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중으로 재의요구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행사는 법제처가 법안을 접수한 날로부터 휴일을 포함해 15일 안에 행사할 수 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이전에도 대체로 며칠 시간을 두고 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29일은 제21대 국회의 임기 만료일이다. 이날 윤 대통령이 재의요구권을 행사하면 현실적으로 제21대 국회에서는 재의결을 할 수 없어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등은 폐기된다.
정부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처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본회의 처리 전날인 27일 정부 자체적으로 마련한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 대안으로 맞불을 놓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수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며 “정부로 이송되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을 제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정부안을 온전히 시행하려면 국회에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이 필요하다. 현재 정치권의 상황을 보면 제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합의가 이뤄져 전세사기에 따른 대책마련이 진전을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선(先) 구제, 후(後) 회수’를 주요 내용으로하는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국민의힘은 반대하겠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29일 기자간담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선(先) 구제, 후(後) 회수’ 내용이 담긴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놓고 “법리상 문제점이 많다”고 말했다.
2022년 말에 대규모 전세사기 문제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뒤 현재까지 국가 차원의 대응책이 마련되는 등 후속 조치에 진전이 없자 전세 시장에서는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전세 사기의 주요 표적이 됐던 빌라를 놓고는 기피 현상이 더욱 강해지고 건물 가치가 떨어지면서 전세보증금이 제대로 반환되지 않는 사례가 늘어나는 등 악순환이 이어지는 모양새다.
경·공매 데이터 전문기업 지지옥션에 따르면 올해 5월 중 진행된 서울 빌라의 경매 건수는 1494건으로 추산된다.
서울 빌라의 경매 건수는 지난해까지 월평균 600~800건 정도였으나 유찰이 이어지는 등 경매 매물이 계속 쌓여가면서 2006년 1월 1600건 이후 최고 수준까지 오른 것이다.
빌라 경매의 매물은 대체로 건물 주인인 임대인이 임차인에 전세보증금을 제대로 반환해 주지 못해서 생긴다.
서울 강서구 등 일부 지역과 경기도에서는 전세가율이 올라 깡통전세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전세가율은 주택의 매매가격 대비 전셋값이다. 통상적으로 60% 정도를 안정적 수준으로 평가한다. 전세가율이 80% 이상이면 전세보증금이 제대로 반환되지 않을 위험이 큰 깡통전세로 본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4월 기준으로 서울지역의 연립·다세대(빌라) 주택의 전세가율은 평균 72%다. 강서구 80.2%, 구로구 79%, 관악구 77.8%, 중구 76.8% 등으로 몇몇 구에서는 전세가율이 위험할 정도로 올랐다.
경기도에서는 평균 전세가율이 안성시 93.9%, 용인시 수지구 92.2%, 안양시 만안구 82.1% 등으로 이미 깡통전세 수준까지 상승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고통도 여전히 계속되는 중이다. 5월 들어서도 대구에서 전세사기 피해자의 사망 사례가 나오는 등 현재까지 모두 8명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목숨을 잃었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와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는 신속한 대책 마련에 꾸준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 단체는 27일 정부의 대안 발표 뒤 논평을 내고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과 정부의 대안은 양립할 수 없는 방안이 아니다”라며 “피해자 각자의 상황에 맞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