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연료 기업도 IRA 유지에 긍정적, 트럼프도 미국 기후정책 ‘백지화’ 어렵다

▲ 패트리샤 에스피노사 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사무총장. <위키미디아 커먼스>

[비즈니스포스트] 세계 기후전문가들이 미국의 연말 대선 결과를 두고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미국 기후정책이 후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 정부가 핵심으로 앞세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기후정책 전면 철회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미국 기업들이 이를 원치 않아 현실화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3월31일(현지시각) 패트리샤 에스피노사 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사무총장은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 미국 기후정책들이 크게 약화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트럼프가 재선되면 미국의 기후대응 노력이 크게 후퇴할 것”이라며 “현재 우리는 1.5도 목표를 지키는 경로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데 대응이 더 늦어지게 되면 지금보다 더 끔찍한 미래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5도 목표는 2015년 기후총회에서 참가국들이 세계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아래로 억제하기로 합의한 내용을 말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결의됐기 때문에 파리협정 목표로도 불린다.

에스피노사 전 총장은 “유럽 등을 중심으로 강력한 리더십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기후대응이 크게 늦춰지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며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너무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선 도전을 공식화할 때부터 바이든 정부가 추진했던 기후정책 전면 철회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왔다. IRA 철회가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MIT테크놀러지리뷰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가장 먼저 IRA 무력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IRA는 공화당 등 기후대응에 소극적인 진영에서 겪은 ‘가장 큰 패배(biggest defeat)’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당선이 확정되면 마지막 임기를 보내게 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를 넘어 더 과격한 정책을 시행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기에 환경보호청(EPA) 에너지전환팀장으로 근무했던 마이론 에벨은 가디언을 통해 “트럼프 정부는 바이든 정부가 이뤄놓은 모든 것을 백지화하기 위해 이전 임기보다 더 강력하게 움직일 것”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전문가들의 우려에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IRA 철회 공약을 현실화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IRA 정책에 수혜를 받아 온 미국 기업들이 이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공화당의 주요 지지층인 화석연료 기업들도 다수 포함된다.
 
화석연료 기업도 IRA 유지에 긍정적, 트럼프도 미국 기후정책 ‘백지화’ 어렵다

▲ 26일(현지시각)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글로벌 에너지 콘퍼런스(CERAWeek Energy Confrenece)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대런 우즈 엑손모빌 최고경영자(오른쪽). <연합뉴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글로벌 에너지 콘퍼런스(CERAWeek Energy Conference)에서 화석연료 기업 임원들을 대상으로 IRA와 관련한 의견을 집계했다.

그 결과 화석연료 기업들은 대부분 IRA 정책을 유지하는 데 긍정적 시각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런 우즈 엑손모빌 최고경영자(CEO)는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바이든 정부의 IRA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며 “IRA는 탄소 감축을 위한 특정 기술만이 아닌 모든 기술 분야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고 평가했다.

액화천연가스(LNG)업체 윌리엄스 등 여타 화석연료 기업들도 대체로 IRA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개별 회사가 직접 자본을 투자해 연구하기 어려운 차세대 친환경 기술에 세제 혜택을 받아 비용 부담을 낮출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제이 스와럽 엑손모빌 기후전략기술 선임국장은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IRA는 우리의 기술 발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며 “엑손모빌은 암모니아 플랜트나 수소 설비 등에 세제 혜택을 많이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화석연료 기업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미국석유협회(API)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IRA 철회를 추진한다면 이를 강력하게 반대할 것이라는 입장도 내놓았다.

마이크 소머스 미국석유협회 CEO는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IRA가 결과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약화된다면 완전 철회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정도로 끝날 것”이라며 “우리 업계는 IRA가 전면 철회되지 않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IRA 정책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뒤에도 유지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로비를 벌이겠다는 뜻이다.

사샤 맥클러 초당적 연구소(BPI) 에너지프로그램 대표디렉터는 MIT테크놀러지리뷰를 통해 “공화당 지지율이 높은 주에서도 IRA 혜택은 큰 환영을 받고 있다”며 “정치적 대립에도 IRA의 지지 기반은 생각보다 단단하다”고 평가했다.

결국 미국 기후정책에 핵심인 IRA가 현행대로 대부분 유지된다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도 미국의 기후대응 전략에 큰 리스크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견해가 힘을 받는다.

다만 트럼프 전 대통령은 IRA 철회 이외에도 미국의 파리협정 탈퇴, 화석연료 규제 해제, 전기차 보조금 삭감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어 미국 기후정책이 전반적으로 약화하는 일은 불가피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