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월마트 설립 샘 월튼이 '초연결 시대' 살았다면?

▲ 월마트 설립자 샘 월튼은 1962년 아칸소주 로저스에 월마트 1호점을 개점했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는 1985년 10월 샘 월튼을 미국 최고 부자로 선정했다. <월마트>

[비즈니스포스트] '고객은 언제나 옳다.(The customer is always right)'

소매 유통시장의 고전적인 이 슬로건은 여전히 유효할까? 일단 답은 물음표로 남겨두자.

이 슬로건이 소매 유통업계에 처음 등장한 건 한 세기 전인 1900년대 초. 선구적인 백화점 경영자 △해리 고든 셀프리지(Harry gordon selfridge) △존 워나메이커(John Wanamaker) △마샬 필드(Marshall Field) 등이 매장 고객 서비스를 홍보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라고 전해진다.  

이 슬로건의 최초 사용자는 분명치 않지만 분명한 건 1900년대 이후 많은 기업들이 '고객 서비스'를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샘 월튼(Samuel Moore Walton:1918~1992) 역시 이 슬로건을 철칙, 신조로 삼았다. 

샘 월튼은 미국 최대 소매업체인 월마트의 설립자로 월마트는 미국 최대의 고용주(170만 명 직원 고용)로 통한다. 

'경영 구루(guru) 중의 구루'라 불리는 최고의 경영 사상가 톰 피터스(Tom Peters)는 그런 샘 월튼에 대해 "헨리 포드에 버금가는 세기의 기업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 1년간 샘 월튼의 영문 자서전(Sam Walton: Made in America Sam)을 읽어 왔다. 미국에 거주하는 성공한 사업가 지인이 "큰 부담 없이 읽어지는 책"이라며 보내왔는데 정작 필자는 원서를 읽는 내내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듯 진이 빠졌다. 곶감 빼먹듯 읽다가 최근에야 겨우 완독했다. 

필자는 '30년 전 세상을 떠난 샘 월튼이 지금과 같은 초연결 시대에 살았다면?'이라는 화두를 던져 본다. 샘 월튼은 일찍이 고객과의 '연결(connect)'에서 경영의 답을 찾은 기업인이었다. 

최근엔 기업 환경 변화와 고객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코드로 '연결·초연결'을 꼽는 분위기가 강하다. 실례로 삼성전자는 1월 세계 최대 전자·IT 전시회 'CES 2023'에서 초연결 시대의 비전을 공개하기도 했다. 

'돋을새김' 같은 미래학자의 한 마디. 데이비드 스티븐슨은 '초연결(원제: The Future is Smart)'이라는 책에서 기업의 방향성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기업들은 '더 강력하게' 고객과 연결되어야 한다. 미래를 점유하기 위해서는 연결을 넘어 초연결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월마트 설립 샘 월튼이 '초연결 시대' 살았다면?

▲ 월마트 매장. 로베르토 고이주에타(Roberto Goizueta) 코카콜라 전 회장은 "샘 월튼은 고객 없이는 어떤 비즈니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월마트>

사실 '연결'을 경영에 가장 잘 활용한 기업인은 리처드 브랜슨 영국 버진그룹 회장이다. 그는 경영을 'ABCD'로 규정했다. ABCD는 'Always Be Connecting the Dots'의 약자.

브랜슨에 따르면 ABCD는 '점'들을 의미있는 방식으로 연결해 창의성과 혁신을 이끌어 내는 성공 프로세스를 말한다. '브랜슨의 연결'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1980년대 초 브랜슨은 롤링 스톤즈, 섹스 피스톨즈 같은 유명 음악인들과 계약하면서 버진 레코드(Virgin Records)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런 그가 항공산업에 진출해 항공사 버진애틀랜틱(Virgin Atlantic)을 설립한 게 1984년이다.

브랜슨은 항공업계의 서비스 개선과 혁신을 위해 버진 레코드를 EMI에 매각하고 그 돈으로 버진애틀랜틱에 투자했다. 브랜슨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버진애틀랜틱이 출범했을 당시 우리가 하고 있던 버진 레코드와 항공산업 사이에는 명확한 연관성이 없었다. 전 세계 항공사가 제공하는 서비스 수준이 너무 형편없어서 우리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엄청난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이미 엔터테인먼트사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 즉 고객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항공산업에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

요약하자면 엔터테인먼트(음반)사업의 경험을 항공산업 서비스에 '연결'한 것이다. 브랜슨 회장은 이런 방식으로 그룹의 자회사를 불려 나갔다.

리처드 브랜슨의 연결이 그룹 내에서 이뤄졌다면 샘 월튼의 연결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대륙을 넘어 가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냈다. 난데없이 웬 한국? 결론부터 말하자면 샘 월튼은 한국 일터의 팀워크(team spirit) 문화를 수입해 월마트의 문화로 정착시켰다.  
 
1975년의 일이다. 샘 월튼은 아내 헬렌 월튼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서울 인근의 한 공장을 찾았다. 테니스공을 만드는 공장으로 월마트 납품 업체였다. 월튼은 공장에서 직원들이 회사 구호를 외치며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미국으로 돌아가 이를 월마트에 도입했다. 월마트 구호(Wal-Mart Cheer)를 만든 것이다. 월마트 직원들은 동기부여 차원에서 회사 이름의 철자를 외치면서(Give me a W! Give me an A! Give me an L!~~~) 하루를 시작했다. 

단순한 구호 이상이었다. 직원들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이른바 '접착제' 역할을 했다. 직원들은 샘 월튼을 격의없이 '미스터 샘(Mr Sam)'이라 불렀고, 월튼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으로 직원들을 배려하고 섬겼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월마트 설립 샘 월튼이 '초연결 시대' 살았다면?

▲ 샘 월튼의 리더십은 직원들을 배려하고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으로 요약된다. <월마트>

그런 샘 월튼에게 가장 중요한 연결 대상은 고객이었다. 우리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월마트 매장에서 벌어진 일도 있다. 링크드인(LinkedIn)에 올라온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한 고객이 잔디 깎는 기계를 구입했다. 그런데 집에 가서 보니 결함이 있었다. 서둘러 구입한 매장으로 달려갔지만 구매 영수증을 갖고 오지 않았다. 매장 매니저는 영수증이 없다며 교환과 반품을 거부했다. 

십중팔구 다른 고객들이라면 매니저와 사생결단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고객은 확실히 현명했다. 언성을 높이지도, 진상을 떨지도 않았다. 그는 조용히 월마트 본사(아칸소주 벤톤빌)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날 매니저는 월마트 회장 샘 월튼의 전화를 받는 악몽(?)을 겪어야 했다. 월튼은 매니저에게 "매장에서 가장 좋은 기계를 골라 고객의 집으로 직접 배달하라"고 지시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샘 월튼은 이런 말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자네가 그 매장에 있는 동안 고객 집의 잔디를 깎아주게.(while you’re there, mow his lawn)"

고객 배려일까? 아니면 고객 집착일까? 여러분은 샘 월튼의 사태 수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매니저의 자존심을 싱크홀로 밀어 넣을 정도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물론 필자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샘 월튼의 성공법칙을 집약한 말을 한번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고객이 원하는 그 이상을 주라.(Give customers what they want- and a little more)'

샘 월튼은 평생 고객 서비스에 대한 만트라(mantra: 주문)를 외우고, 외치고, 전파했다. 마치 복음 전도사처럼. 복기해 보자.

'고객이 원하는 그 이상을 주라'는 말대로 샘 월튼은 실제로 고객에게 그 이상을 줬다. 잔디 깎는 기계를 구입한 고객에게 교환 대신 '잔디 깎아주기 서비스'까지 제공한 것이다. '불만 고객'을 '평생 고객'으로 돌려놓았다. 샘 월튼에게 고객은 때론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다. 

"보스는 단 한 사람, 고객뿐이다. 고객이 다른 곳에 가서 돈을 쓴다면 위로는 회장부터 아래로는 직원들까지 모두 해고될 수도 있다.(There is only one boss - the customer. And he can fire everybody in the company from the chairman on down, simply by spending his money somewhere else)"

고객이 월마트 매장에 오지 않는다면 회장인 샘 월튼 자신을 비롯해 모든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우라'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더 빛을 발하는 법. 샘 월튼이 그랬다. 꽤나 검소했다. 미국에서 가장 돈 많은 부자로 선정(1985년 경제잡지 포브스)됐던 그였지만 반질반질한 롤스로이스 대신 중고 픽업트럭을 타고 다녔다. 

오클라호마 태생인 그가 아칸소주 로저스에 월마트 1호점을 개점한 건 1962년 7월이다. 당시 나이 마흔 넷. 월튼은 매장을 늘려가면서 거대한 산과 맞서야 했다. 'K마트'라는 난공불락의 존재. K마트는 '할인 판매업계의 칭기스칸'으로 불렸다. 

1970년 K마트가 1천 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었다면 월마트는 150개에 불과했다. 샘 월튼은 벼룩(flea) 한 마리가 거대한 코끼리(elephant)에게 달려드는 속담(계란으로 바위치기)으로 무모한 도전의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는 정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고,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I guess we really were a flea attacking an elephant, and the elephant didn't respond right away)"

요술 램프에서 펑하고 거인 '지니(Genie)'가 나타나 도와주지 않는 이상 '칭기스칸'을 말에서 끌어내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방법은 샘 월튼 스스로 첨병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틈 날 때마다 K마트 매장에 몰래(?) 들렀다. 물건 배열과 인기상품 리스트 등을 메모하고 녹음했다. 이를 월마트에 벤치마킹했다. 심지어 K마트 매장 책임자에게 들켜 녹음기를 뺏길 뻔 한 일도 있었다. 

기업 입장에서 경쟁자(라이벌)는 극복 대상이지만 일단 넘어서면 넘볼 수 없는 단단한 진지를 구축할 수가 있다. 월튼은 "K마트가 없었다면 우리가 오늘날만큼 훌륭한 기업이 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며 경쟁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100년 역사의 K마트는 2002년 파산을 선언했다) 

그는 소매업계의 판을 뒤집어야 했고 결국엔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흐름을 거슬러 가라(Swim upstream) △통념을 무시하라(Ignore the conventional wisdom) △모든 규칙을 깨부숴라(Break all the rule) 같은 그의 어록들은 '판 뒤집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샘 월튼에게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역설적이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에 다가왔다. 1992년 3월 17일 아칸소주 벤톤빌(Bentonville) 월마트 본사. 이날 월마트 강당엔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 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샘 월튼에게 '자유의 메달(Medal of Freedom: 일반 시민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 훈장)'을 시상하기 위해서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월마트 설립 샘 월튼이 '초연결 시대' 살았다면?

▲ 1992년 3월17일 샘 월튼에게 '자유의 메달(Medal of Freedom)'을 수여하는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 부시 대통령은 병마와 싸우는 샘 월튼을 배려해 "그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다"며 워싱턴에서 월마트 본사가 있는 아칸소주까지 날아왔다. <월마트>

당시 74세의 월튼은 골수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으로 투병하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그런 월튼을 배려해 월마트의 본고장인 벤톤빌까지 날아왔다. 스스로 걷기엔 몸이 너무 쇠약해 있었던 월튼이다. 

휠체어를 타고 행사장에 나온 그는 대통령이 메달을 수여하자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이 비틀했다. 대통령의 한 마디가 샘 월튼을 잠시 버티게 했다. 

"샘, 당신과 당신의 비전에 경의를 표합니다."

로마 제국의 사상가 세네카가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듯 미국 최고 부자 샘 월튼의 운명도 여느 사내의 마지막과 다르지 않았다. '자유의 메달'을 받고 3주일이 지난 1992년 4월 5일, 조용히 병마와의 싸움을 내려놓았다.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