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를 만난 뒤에 사냥개를 불러도 늦지 않고 양을 잃은 뒤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에게 침공당해 어쩔 줄 모르는 초나라 양왕에게 신하인 장신이 올린 간언이다. 
 
K-게임은 왜 '오징어게임' 못 만들어낼까, 문화콘텐츠로 대접이 먼저다

▲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뜻은 반대로 달려졌지만 사자성어 ‘망양보뢰’의 유래이기도 하다.

정부와 국회가 뒤늦게 게임산업이라는 ‘우리’를 고치려 하고 있다. ‘K-콘텐츠’가 드라마, 영화, 대중음악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K-게임은 계속 부진하기 때문이다. 

이상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일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내 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의 ‘리니지W’와 미국의 게임회사 밸브의 ‘하프라이프:알릭스’를 비교해서 보여주며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질타했다. 

이 의원은 “두 회사의 설립 연도는 비슷하지만 어떤 회사(밸브)가 VR게임의 기술력을 발전시킬 때 어떤 회사(엔씨소프트)는 이용자들의 결제를 유도하는 수익모델(BM)의 수준만 높여놨다”며 “국내 게임회사들이 국내에서는 높은 매출을 올렸을지 몰라도 그동안 세계 게임시장에서의 고립은 심화됐다”고 비판했다.

황 장관은 이 의원의 지적에 “앞으로 영화와 실감형 기술이 게임과 통합되는 방향으로 시장이 움직일 것으로 예상한다”며 “메타버스 등을 내년 예산에 반영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다”고 대답했다.

국내 게임 이용자들은 대부분 이 장면을 두고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 동안 국내 게임업체들이 수익모델 연구에만 급급해 혁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망양보뢰의 고사에서 보여주듯 지금이라도 국내 게임산업의 혁신을 위해 정부와 국회가 발벗고 나서겠다는 뜻을 보여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날 국회에서 벌여진 장면은 정부와 국회가 ‘K-게임’ 부진의 근본적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의원과 황 장관의 질의와 답변은 ‘하프라이프:알릭스’와 ‘리니지W’의 차이를 ‘기술력’의 차이로 보는 듯하다. 한국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의 컴퓨터그래픽 기술력 차이로 단순 비교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두 게임은 처음부터 지향하는 바가 완전히 달라 어느 한 쪽이 기술력에서 뒤쳐진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프라이프:알릭스는 가상현실(VR) 게임인 만큼 세계를 더욱 사실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그래픽과 물리엔진에 공을 들였다. 반면 리니지W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화면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여야하는 대규모다중접속역할수행온라인게임(MMORPG)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다중이용자 처리 관련 기술에 공을 들였다.

물론 게임도 IT 기술력이 흥행에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기술력만 좋다고 시장에서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은 ‘문화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국내 게임회사들은 왜 ‘하프라이프:알릭스’와 같은 게임을 만들 수 없을까? 

게임산업의 역사를 함께한 많은 이들은 아직도 게임을 ‘하류 놀이문화’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적 풍토 때문이라 진단한다.  
 
K-게임은 왜 '오징어게임' 못 만들어낼까, 문화콘텐츠로 대접이 먼저다

▲ 가상현실(VR)게임 '하프라이프:알릭스'의 플레이 화면. <하프라이프 공식 홈페이지>


BTS가 세계 음악시장을 석권하고, 오징어게임이 세계 콘텐츠시장을 휩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아이돌 음악과 드라마를 향한 사회의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H.O.T 시절 단순히 ‘빠순이’들의 문화였던 아이돌 문화가 사회의 주류문화로 승격되면서 수많은 재능있는 아이돌 연습생들이 업계에 공급됐다.

드라마가 단순히 ‘바보 상자’ 속 이야기가 아니게 되면서 스튜디오드래곤, 에이스토리 등 드라마 전문 제작사가 생겨나고 드라마 PD, 드라마 작가로 인력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독 K-게임은 여전히 문화 콘텐츠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선택적 게임시간 결정제’가 대표적이다. 2011년 제정된 ‘게임 셧다운제’가 10년 만에 폐지됐지만 여전히 학부모의 요청이 있을 때 학생의 게임 접근을 막는 선택적 게임시간 결정제는 남아있다. 

OTT(온라인 동영상서비스),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 웹툰, 웹소설 등 소위 ‘공부를 방해하는’ 문화 콘텐츠 가운데 학생의 접근을 아예 차단할 수 있는 콘텐츠는 게임이 유일하다.

요컨대 오징어게임은 밤에 봐도 되지만 K-게임은 밤에 하면 안 된다.

물론 국내 게임회사들의 책임도 크다. 이상헌 의원이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국내 게임회사들은 게임 콘텐츠의 질을 높이기보다 수익모델(BM) 연구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똑같이 '하급 놀이문화'로 천대받았지만 업계 종사자들이 끊임없는 노력으로 한류의 당당한 일원이 된 웹툰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게임들은 영화, 드라마 등과 같이 문화 콘텐츠의 힘을 근본 바탕으로 한다.

프랑스의 게임제작사 유비소프트의 ‘어쌔신 크리드’의 성공에는 현실과 SF를 넘나드는 세계관과 고고학자들도 감탄할 정도의 뛰어난 고증이 큰 역할을 했다. ‘젤다의 전설’은 정답이 없이 사용자가 저마다 기발한 방법을 통해 풀 수 있게 만들어진 퍼즐,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는 ‘오픈월드’ 세계 등이 이용자를 사로잡았다.

한때 대규모대중접속 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분야에서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들었던 국내 게임사들은 현재 세계 무대에서 전혀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게임 전문 시장조사업체 뉴주에 따르면 2020년 4분기 매출 기준 세계 10위 안에 포함된 우리나라 게임 회사는 단 한 곳도 없다. 15위까지 보더라도 넥슨이 12위로 겨우 체면치레를 했을 뿐이다. 
 
K-게임은 왜 '오징어게임' 못 만들어낼까, 문화콘텐츠로 대접이 먼저다

▲ 펄어비스의 '도깨비' 공식 트레일러 영상 갈무리 이미지.


K-게임의 미래는 없을까?

올해 9월 독일 쾰른에서 열린 ‘게임스컴 2021’에서 펄어비스의 ‘도깨비’가 어마어마한 호평을 받았다. 

메타버스를 구현한 기술력 덕분이 아니었다. 게임 안에 ‘동대문을 열어라’와 같은 우리 아이들의 놀이문화, 한옥 등 전통문화, 세계를 강타하는 케이팝(K-POP)의 감성 등이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양을 잃어버린 뒤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 하지만 양이 낮은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도망갔는 데도 우리 문만 보수하고 있다면 또다시 양을 잃어버릴 뿐이다. [비즈니스포스트 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