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없는 현대중공업의 앞날  
▲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경선 후보가 지난 16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사단법인 4월회 창립 23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있다. <뉴시스>

“현대중공업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다.”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의 말이다.

지난 9일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TV토론회 자리였다. 김황식 전 총리가 정 의원의 현대중공업 주식을 붙잡고 늘어졌다. 김 전 총리는 정 의원이 서울시장이 되면 현대중공업 주식을 처분해야 하니 서울시장 출마의 뜻을 접으라는 논리를 펼쳤다.

김 전 총리는 “현대중공업은 조선산업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고 방산업체이기도 하다”고 현대중공업을 한껏 추켜세웠다. 그러면서 정 의원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주식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외국자본으로 넘어갈 경우 국익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다”며 “회사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되받았다. 그는 서울시장 출마의 뜻을 품은 뒤 현대중공업 주식이 논란이 될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그는 지난 2월 “현대중공업은 전문경영인 체제이기 때문에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회사는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1일 발표된 자산총액 순위에서 58조3950억 원으로 7위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그룹이다. 계열사는 모두 26개다. 지난해 매출 60조3490억 원에 당기순이익 3700억 원을 냈다. 부채비율도 112.6%로 양호한 편이다.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 지분 10.15%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다. 정 의원이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아산사회복지재단과 아산나눔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지분 3.18%도 사실상 정 의원의 지배 아래 있다.

  정몽준 없는 현대중공업의 앞날  
▲ 한 행사장에서 서로를 외면하고 있는 정몽준과 김황식 후보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현대중공업 주식을 놓고 정 의원과 김 전 총리의 공방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정 의원은 “10년 전부터 회사와 관련한 모든 직함을 다 접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도 “기업이 정치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공방을 보면서 의문이 생긴다. 현대중공업은 정말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을까? 현대중공업에 정몽준 의원이 없어도 현대중공업은 정말 걱정할 일이 없을까? 앞으로도 현대중공업은 소유와 경영이 계속 분리될까? 이 모든 의문은 답은 결국 정 의원이 현대중공업 주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만약 현대중공업이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도 걱정없이 운영된다면 재계에 보여주는 모델이 될 수 있다. 총수가 부재하면 금방이라도 큰 일 날 듯 하며 오너 경영을 강조하는 재계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 정몽준이 떠난 현대중공업의 현재

정 의원은 1988년 현대중공업 회장에서 물러나 고문이 됐다. 2002년 고문 자리마저 내놓았다. 현대중공업은 정 의원이 고문에서 물러난 그해 2월28일 현대미포조선·현대기업금융·현대기술투자 등을 이끌고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했다. 같은해 5월 위탁경영중이던 삼호중공업을 인수하면서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중공업그룹이 됐다.

정 의원이 고문에서 물러난 뒤 현대중공업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됐다. 하지만 정 의원이 완전히 경영에 완전히 손을 뗀 것같지는 않다.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겼지만 정 의원은 대주주로서 여전히 회사의 중요한 결정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 회장 자리가 오랫동안 비워 있고 부회장과 사장이 현대중공업을 이끈 것은 정 의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 의원 이후 회장에 오른 전문경영인은 김형벽(1999년~2002년), 민계식(2010년~2011년), 이재성(2013년~) 등 모두 3명에 불과하다. 모두 현대그룹 계열사에서 잔뼈가 굵은 경영인들이다.

정 의원이 고문 자리까지 내놓은 뒤 현대중공업 경영은 민계식 회장과 최길선 사장, 그리고 이재성 회장 등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현대중공업은 2007년 경제지 포천이 선정한 전 세계 500대 기업에 진입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2012년 54조9737억 원의 매출액을 올리며 세계 1위 조선기업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현대중공업은 사업다각화를 추진하기도 했다.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오일뱅크를 2009년과 2011년 각각 인수했다 조선과 중공업뿐 아니라 신재생에너지 등 새 영역에도 발을 내디뎠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산업자원부가 선정한 세계 일류상품에 총 16개 품목을 올리는 등 기술적 우위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정몽준이 경영하던 현대중공업


정 의원과 현대중공업의 인연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 의원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자마자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전략기획실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는 1982년 사장을 거쳐 1987년 37세의 나이로 회장에 올랐다.


정 의원이 현대중공업을 경영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입사 후 2년 동안 학사장교(ROTC)로 복무했으며 1978년부터 2년6개월 동안 미국 유학을 떠나 자리를 비웠다. 1980년 7월 상무가 된 후에야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한 셈이다.

  정몽준 없는 현대중공업의 앞날  
▲ 정몽준 의원(오른쪽)는 1980년대 초반 아버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가운데)과 함께 마가릿 대처 영국 수상(왼쪽)을 만났다.

정 의원이 현대중공업 사장이었던 1985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박사 과정에 입학하면서 2년 동안 자리를 비웠다. 당시 기업 관계자들은 현대중공업의 실질적 경영자는 아버지인 정주영 회장이라고 말했다.

정 의원은 1987년 11월 귀국한 뒤 곧바로 회장에 올랐다. 그러나 다음해 4월 13대 국회의원 총선 때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회장을 그만 두고 고문으로 물러났다.

정 의원이 경영일선에서 일한 기간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지만 최고경영인으로서 정 의원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권오갑 현대오일뱅크 사장은 정 의원이 최고경영자로서 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현대중공업의 회복에 온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정 후보는 시추선에 진출하는 등 조선 선종을 다양화하고 로봇·철탑·건설장비까지 업무영역을 넓혀 성장기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최고경영자 시절 정주영 회장과 비슷하게 엄격하기도 했다. 1984년 울산 현대중공업 작업장을 돌다가 근무시간에 낮잠을 자던 직원들에게 “그런 식으로 일하려면 모두 집에 가라”고 호통을 친 일화도 있다.


정 의원는 2000년 현대그룹 경영권을 놓고 형제들과 벌어진 ‘왕자의 난’ 때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정몽헌 회장에게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지분을 넘기려던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물러나게 한 주역이기도 했다.

정 의원의 관심은 일찍이 기업보다 정치에 더 쏠려 있었다. 현대중공업의 한 전직 임원은 “정 의원은 회사 경영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뒷날 밝히기도 했다. 정 의원은 사장이던 1984년에도 12대 총선에 민정당으로 출마하려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회사 부채가 얼마나 많은데 정치를 하려고 그러냐”며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 현대중공업의 딜레마

현대중공업은 1983년부터 세계 1위 조선기업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우리투자증권은 “현대중공업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97.8%포인트가 떨어진 80억 원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현대중공업도 이런 예측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현대중공업의 저가 선박 대량수주가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매출 54조1881억 원으로 조선업계 1위를 지켰다. 하지만 영업이익은 8020억 원에 불과했다. 삼성중공업보다도 1122억 원이나 적다. 당기순이익도 1463억 원으로 경쟁사인 대우조선해양보다 956억 원이나 적다.


현대중공업의 수익성 하락은 지난 3년 전부터 지속되고 있다.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총매출은 53조~54조 원을 유지하고 있지만 영업이익은 2011년 4조5745억 원에서 2012년 2조55억 원으로 급격히 떨어진 이후 지난해 8020억 원으로 추락했다. 2011년과 비교하면 6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는 현대중공업이 고부가가치 사업인 해양플랜트보다 이익률이 낮은 선박 수주에 집중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분석이다. 특히 현대중공업이 2011년부터 저가 선박을 대량수주해 점유율을 늘린 게 수익성 악화에 영향을 줬다고 본다.


현대중공업의 조선 부문 매출액은 2011년 31.4%를 기록한 이후 지난해 28.3%로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조선 부문의 영업이익 비중은 2011년 전체의 51.4%에서 지난해 1.1%까지 떨어진 상태다. 해양플랜트의 매출액 비중이 2011년 6.4%에서 지난해 7.7%로 1.3%포인트 올라가면서 영업이익 비중이 8.1%에서 25.6%로 급상승한 것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경쟁사에 비해 현대중공업은 조선 부문의 비중이 해양 부문보다 훨등하게 높아 수익성 악화로 이어진다”며 “저가 선박 수주는 전체 실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데 이 부분이 해결되고 조선 경기가 회복돼야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이 살아날 것”이라고 진단했다.


수익성이 높은 신사업 영역인 해양플랜트의 앞날도 무조건 밝지만은 않다. 해양플랜트는 바다에서 석유나 가스를 캔 뒤 저장해서 운반하는 설비를 말한다. 현대중공업은 선박 형태의 시추선인 드릴십과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PSO) 등 해양플랜트 분야의 베테랑 시공기업이다. 1975년 처음 진출한 이래 180여 건의 공사를 시행했다.


2011년 이후 글로벌 해운경기가 악화되면서 컨테이너선 등의 주문이 줄어들자 현대중공업은 해양플랜트에 힘을 쏟았다. 현재까지 22건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지난해에도 해양 플랜트 수주액 117억 달러를 거두는 등 주력사업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해양플랜트는 공사기간이 길고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 그만큼 부담이 큰 사업이다. 핵심부품의 70~80%가 외국산이기도 하다.

조선기업의 한 임원은 “몇 년 전에는 해양플랜트 수주가 숨통을 틔우는 ‘진통제’였다”며 “지금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안으로는 밑지는 장사를 하는 형국”이라고 했다. 결국 현대중공업은 시공 기간을 단축할 기술력과 부품 국산화를 이뤄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 경영과 소유의 분리 끝까지 가나

정 의원이 정치권에 발을 담근 뒤 완벽하지는 않지만 현대중공업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됐다. 정 의원이 회장에서 고문으로 그리고 고문에서조차 물러나는 과정은 그만큼 경영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다”는 정 의원의 말은 형식적으로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사실에 가깝다. 정 의원이 김 전 총리를 향해 “회사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할 만 하다.


문제는 현대중공업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채로 계속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주목되는 점이 정 의원의 장남인 정기선(32) 현대중공업 수석부장이다.

  정몽준 없는 현대중공업의 앞날  
▲ 정몽준의 장남인 정기선 현대중공업 수석부장

정 부장은 대일외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2009년 현대중공업 재무팀 대리로 입사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후 2011년 6월 스탠퍼드대 MBA를 따고 보스턴컨설팅그룹 한국지사에서 근무하다가 지난해 현대중공업에 복귀했다.


정 부장은 지난해 현대중공업 임원 승진 대상자로 지목됐으나 나이가 어리고 회사 근무 경력이 짧다는 이유로 미뤄졌다. 회사 내부에서 정 부장은 업무 능력이 뛰어나고 사교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나이가 아직 어린 점 때문에 “다른 곳에서 근무하다 대주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30대 초반에 부장이 된 것은 지나친 특혜 같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정 부장의 복귀를 현대중공업이 ‘오너 경영’으로 돌아가는 신호탄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이 내우외환에 빠지면서 정 의원이 위기에 빠르고 책임감있게 대응할 수 있는 오너 경영 체제를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순환출자 구조라는 기존 대그룹과 크게 다르지 않는 점도 향후 정 부장의 움직임에 더욱 시선을 쏠리게 하는 요소이다. 현대중공업은 정 후보의 현대중공업 지분을 바탕으로 계열사 간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는 구조다. ‘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중공업’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는 정 의원이 보유하는 현대중공업 주식으로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언제든지 장악할 수 있게 해준다.

정 부장은 현대중공업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아직은 현대중공업의 경영을 승계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정 의원이 서울시장에 당선돼 주식백지신탁이 결정될 경우 정 부장은 아버지의 지분을 이어받을 수 있다. 법적으로 정 부장의 독립 생계가 인정될 경우 재산 고지를 거부하면 주식을 보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문제는 최고세율이 50%에 이르는 증여세다.

정 의원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주식의 가치는 약 2조 원에 이른다. 이 주식을 정 부장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증여세로 낼 1조 원 정도를 동원해야 한다. 정 의원이 현대중공업 주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현대중공업의 앞날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채로 계속 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오너 경영으로 복귀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