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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박열' 스틸이미지. |
이준익 감독과 봉준호 감독.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들이다.
작품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테지만 감독 이름값만으로도 관객을 설레게 할 만한 필모그래피를 써온 점을 부인하긴 어렵다.
각각 ‘왕의 남자’와 ‘괴물’로 1천만 영화를 만들어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랐고 국내외에서 숱한 수상기록으로 작품성도 입증해 보였다.
하루 차이를 두고 개봉한 신작 ‘박열’과 ‘옥자’가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흥행성적만 놓고 보면 박열이 개봉 1주일여 만에 7일 기준 15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발 앞서 나간 모양새다. 비교적 저예산인 40억 원이 투입된 만큼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옥자는 개봉관이 제한된 점을 감안하면 꾸준히 관객의 발길을 모은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박열은 일제 강점기 아나키스트 항일운동가였던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과거에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인물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역사극인 셈이다.
역사극은 시대극과 혼용되기도 한다. 특정시대에 일어난 사건 자체를 흥미롭게 비춘다는 점에서 박열은 시대극이란 표현이 좀 더 걸맞을 듯하다.
역사극과 시대극을 굳이 구분하려는 것은 이준익 감독의 영화적 특성과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역사극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거대서사란 측면이 강한 반면 시대극은 역사적 사건이 ‘원경’으로 처리되고 인물의 행위와 성격, 심리가 ‘근경’으로 드러난다. 통시성보다 공시성이 강조되는 만큼 2시간 남짓 상업영화로서 장르적 매력이나 친연성이 훨씬 높을 수 있다.
이 감독이 역사적 사실과 실존인물을 다루면서도 시대극의 대가로 불리는 이유는 스토리텔링 방식이 전복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 전작이었던 ‘사도’나 ‘동주’에서도 이미 증명됐다. 사도세자나 윤동주 시인의 잘 알려진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서도 시간적 순서를 따라 기승전결의 서사로 다루지 않았다.
박열 역시 이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데 시대적 배경자체가 일제강점기인 까닭에 전복적 속성이 더욱 뚜렷해졌다.
대개 항일독립운동가를 소재로 한 이야기인 경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비장한 각오로 헌신하는 주인공이 있고 외모부터 야비하고 잔인함이 묻어나는 간악한 일본인(고위 관리이거나 헌병이거나 등등)이 그 반대 편에 있다. 저항과 탄압이 이야기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그 과정에 투옥과 고문 등의 장면이 담긴다.
영화 박열을 보고 ‘역시 이준익!’이란 생각이 드는 건 선과 악이 극명한 시대에도 인간을 이런 단순한 대립구도에 가둬두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박열은 실제로도 아나키스트였다. 아나키즘의 최대 속성은 일체의 권력에 대한 거부와 저항일 것이다. ‘불령선인’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후미코는 캐릭터만으로도 권력, 영화 속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현실 정치권력이자 신적 권력으로 표상되는 천황제 권력에 저항하고 조롱하고 풍자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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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익 감독. |
흥미로운 건 이들과 반대편에 서 있는 일본인들이다. 관동대지진 참사를 빌미로 천황제 권력의 앞잡이로 조선인 학살을 주도한 미즈노 렌타로(김인우)는 전형적인 인물이지만 박열의 변호를 자처한 후세 변호사나 일본 엘리트 판사로 고뇌하고 인간적 연민의 감정을 감추지 않는 다테마스 같은 인물은 흔히 봐왔던 전형성에서 크게 벗어난 인물들이다.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저항운동,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신념, 동지에서 연인으로 뜨겁고 낭만적인 사랑을 나누는 장면 등을 기대했다면 영화 박열은 어딘지 맹숭맹숭하고 헛웃음이 나올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다룬 최동훈 감독의 ‘암살’에서 전지현씨가 눈부시게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총을 들고 일본인 악의 무리를 휩쓸어버리는 장면, 영화 ‘밀정’에서처럼 비밀리에 암호를 주고받는 쫄깃한 장면 같은 건 단언컨대 없다.
박열의 투옥 이후 펼쳐지는 신문과 법정장면이 주를 이루지만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씨가 "대한민국의 헌법 1조" 운운의 가슴 뜨거운 변호 장면도 없다.
조미료를 많이 넣지 않아 담백한 음식처럼 예산을 많이 들이지 않아 비교적 어깨의 힘을 빼고 조심스럽게 실존인물의 내면에 다가서려는 이준익 감독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영화다.
70% 이상을 일본어 대사로 소화하고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친 이제훈씨의 연기변신과 100% 가까운 일본인 싱크로율을 보인 최희서씨의 새로운 발견도 영화가 건져낸 수확으로 빼놓을 수 없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