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문재인은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다. 19대 대선에서 모든 정당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후보로 꼽힌다.

대선공약으로 공공부문 일자리 81만 개 창출, 권력기관과 재벌개혁 등 적폐청산, 소득세와 상속세 과세강화를 뼈대로 한 증세, 금산분리제도 강화와 출자총액제도 부활 등을 내세웠다.

1953년 1월24일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명진리에서 태어나 부산 영도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 재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됐으며 출소 뒤 군에 입대해 특전사에서 복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 불렀을 정도로 가까웠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부산에서 당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참여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장을 맡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상임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했다.

부산 사상구에서 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18대 대선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나왔으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했다.

2017년 4월3일 19대 대선의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선출됐다.

공손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졌으며 한 번 결정한 원칙을 잘 바꾸지 않는 원리원칙주의자다. 반대세력으로부터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경영활동의 공과


△ 박근혜 게이트와 대선후보 문재인
문재인은 2016년 하반기 박근혜 게이트가 빚어낸 긴박한 정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대선후보로서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2016년 11월 박근혜 게이트 정국에서 처음에는 신중론을 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 등 당내 2~3위권 대선후보들이 명확하게 탄핵을 요구하는 반면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한동안 지켰다. 그러나 2016년 11월15일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과 함께 전국적인 퇴진운동에 나서겠다며 강경노선으로 전환했다.

2016년 12월9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2017년 3월10일 파면이 선고되는 과정에서 가장 수혜를 입은 후보로 평가됐다. 문재인의 대선후보 지지율은 2016년 11월에 20%대 초반이었는데 2017년 2월 초에 30%를 넘어선 뒤 3월 말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선두를 지키고 있다.

문재인이 제1야당의 주요 대선주자인 점과 원칙주의적 성향을 보여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척점으로 평가된 점 등 덕분에 지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정치권은 바라보고 있다.

2017년 4월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뽑기 위해 호남권, 충청권, 영남권, 수도권강원제주 등 네차례 실시된 권역별 순회경선에서 누적득표율 57.0%를 차지해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최성 고양시장을 제치고 결선투표없이 본선으로 직행하면서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 당대표 문재인과 인재영입
문재인은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시절 당내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해 ‘친노’의 한계를 보여줬다고 지적됐다. 그러나 인재영입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원내1당으로 올라서는 데 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년 12월 제18대 대선에서 패배한 뒤 6개월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당시 너무 빨리 정치일선에 복귀하려는 것 아니냐는 일부 지적도 나왔다.

야권 정치인으로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10.4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논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세월호 참사 정국 등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며 박근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문재인은 2015년 2월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박지원 후보를 제치고 대표에 올랐다. 이때 박지원 후보에 고작 3%포인트만 앞섰을 정도로 당내 장악에는 실패했다. 이 때문에 친노-비노 갈등이 불거지며 독선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문재인과 안철수 의원의 대립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분열하자 비주류의 사퇴론에 직면했다. 2015년 12월28일 당이름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바꿨다. 2016년 1월27일 대표에서 물러났다.

2015년 12월부터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아 외부인사를 영입했다. 그 결과 민주당은 2016년 4월 총선에서 123석을 얻어 새누리당을 제치고 원내1당에 올랐다.

당시 문재인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김병관 웹젠 이사회 의장, 이수혁 전 국정원 1차장,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김병기 전 국정원 인사처장,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서형수 전 한겨레 사장, 박주민 전 민변 사무차장 등을 더불민주당에 영입했다. 이들 가운데 표창원 김병관 박주민 조응천 김병기 이철희 서형수 의원 등이 2016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 열풍을 이끌며 20대 국회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조응천 의원은 청와대에서 퇴직한 뒤 아내의 식당에서 일하던 시절 문재인이 그를 영입하러 찾아왔을 때 몇번이나 거절했는데도 ‘눈만 껌뻑 껌뻑거리며 도와달라던’ 문재인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해 결국 정치에 입문했다고 말한 일화가 있다.

2016년 1월1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멘토’로 불렸던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삼고초려 끝에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김종인 위원장을 영입하면서 중도층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도 민주당의 총선 승리에 유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재인과 김종인 전 위원장은 그 뒤 관계가 악화됐다. 김 전 위원장이 총선에서 공천 전권을 행사하고 문재인이 고립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총선 이후에도 총선승리의 공로 평가, 당대표 합의추대, 야권연대 등에서 시각차를 나타냈다. 결국 김 전 위원장이 2017년 3월8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 18대 대선 패배
문재인은 18대 대선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맞붙었다. 지지율 조사에서 오차범위 안의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당선에 실패했다.

2012년 4월11일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8월25일부터 9월16일까지 열린 국민참여경선에서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후보 등과 겨루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의 제18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선출됐다.

안철수 후보와 심상정 후보가 문재인을 지지하는 선언을 한 뒤 사퇴하는 등 범야권의 지지를 얻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지지율에서 다소 밀렸지만 당시 여론이 좌우로 사실상 양분되면서 대선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문재인의 지지율이 올랐다.

그러나 2012년 12월19일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약 100만 표 차이로 졌다. 당시 문재인은 1469만 표(48.0%)를 얻었는데 이는 탈락후보 사상 최다 득표이자 역대 대선후보들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득표다.

18대 대선에서 패배한 요인으로 독자적 리더십을 세우는 데 실패해 국민들에게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
문재인은 198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법조계 동업자로서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 문재인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했을 때 ‘법률가는 억울한 서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앤장 등 대형로펌의 영입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다면 노모를 모실 수 있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그해 부산으로 내려가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김광일 노무현 변호사 등과 함께 1981년 일어난 부림사건에 변호인을 맡은 것으로 언론에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부산에 1982년 내려왔고 부림사건은 그 전의 일이다.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일하면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1987년 대우조선 사건으로 노 변호사가 구속되자 문재인은 부산지역 변호사를 동원해 변호인단을 만들어 그를 변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권에 인도한 장본인이다. 1988년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치참여 요청을 받은 그는 "정치인 자질은 노무현씨가 훨씬 더 탁월하다"며 노무현 변호사를 추천했고 노무현 변호사는 이를 거듭 피하다 결국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가 몇 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는데도 “나는 참모용이고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고사했다. 노무현 후보의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했으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변호사 업무에 복귀할 뜻을 여러차례 밝혔다.

그러나 2003년 1월 노무현 당선자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고 하자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 제의를 수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흔들릴 때마다 문재인이 "정치를 끝까지 계속해 달라"고 애걸 반 압박 반으로 주문했던 만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이때 치아가 10개나 빠져 임플란트를 하면서 발음이 안 좋아졌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위기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2007년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에서 '왕수석', '왕의 남자'로 불리며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으로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국정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2인자로 주목받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23일 서거한 뒤 장례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다. 그 뒤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 사법시험 합격과 사법연수원 시절
사법시험에 한차례 재수한 끝에 1980년 차석으로 합격해 사법연수원 12기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문재인은 10대 시절 역사학자를 꿈꿨지만 어려운 집안형편을 감안해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에 전액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1978년 2월에 제대한 직후 아버지 문용형씨가 59세로 별세하자 가장으로서 책임감과 아버지에게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79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시위 참가로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다가 2차 합격소식을 들었다. 1980년 사법시험 3차 면접시험을 볼 때 안전기획부 요원으로부터 지금도 옛날에 시위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는지 질문받자 “지금도 변함없다”고 대답했다. 최종적으로 합격했지만 훗날 원하던 판사 임용에서 탈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고승덕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김용덕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 사법연수원 12기를 차석으로 수료했다. 원래 성적은 수석이었으나 시위전력 때문에 차석으로 순위가 바뀌었다고 한다.
[Who Is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017년 4월3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후보자 수도권강원제주 선출대회에서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 만세를 부르고 있다. <뉴시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작게는 안희정 충남지사 지지자와 이재명 성남시장 지지자 등 당내 지지세력을 넓혀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있다. 더 나아가 30% 수준의 전국지지도를 더욱 높이고 중도 보수층까지 흡수해 표의 확장성을 노려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대선후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선거캠프를 꾸리고 외부인사를 계속 영입하고 있는데 이들이 구설수에 연속으로 오르고 있어 인사검증과 내부단속에 더 힘쓸 것을 요구받고 있다.

문재인을 향한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의 검증공세도 거세지고 있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등이 개헌을 매개로 ‘반문재인 연대’를 결성할 조짐을 보이는 데도 대처해야 한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차기 정부로 넘겨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 일부 민감한 사안에 지나치게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지적 등에 대처해야 한다. 아들의 취업특혜의혹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 평가

합리적이고 중심이 잘 잡혀있어 안정된 성품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정치인이다.

대선주자로서 외연을 넓히기 위해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 중도에 가까운 행보를 걷고 있다.

2015년 천안함 5주기를 맞아 천안함 사태를 폭침으로 규정하고 연평해전 13주기 때 “제2연평해전의 영웅들을 추모하며 잊지 않겠다”고 SNS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2016년 10월에는 4대기업 경제연구소장들과 간담회를 해 당내에서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원리원칙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단 한 차례의 식사나 환담자리도 마련하지 않았고 청와대 내 부산경남 인맥을 대표했지만 경남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가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곱 살 어린 그를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한 기간이 길어, ‘친노의 수장’, ‘노무현의 비서실장’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로 사법시험 합격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을 꼽았다. 가장 아끼는 물건으로 법무법인 부산을 개업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업선물로 보내준 괘종시계를 들기도 했다. 이 시계에는 ‘증 노무현’이 새겨져 있다.

친노의 수장이자 노무현의 그림자로서 이미지가 너무 강한 것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정치경력이 길지 않기 때문에 친노 이미지 외에 정치적 자산이 많지 않아 당내 구세력의 흔들기에도 약한 편이다.

학구적이고 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달에 책 10권가량을 읽으며 2017년 들어 대선유세로 바쁜 때인데도 한달에 2~3권을 반드시 읽는다. 2017년 4월 기준으로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 저성장 시대, 기적의 생존전략’(김현철)을 최근에 읽은 책으로 들었다.

어떤 자료든 구석구석 읽어보고 토씨까지 그의 스타일로 고치는 습관이 있다. 변호사 시절 변론서를 작성하던 버릇이 남았다.

온화한 성품으로도 잘 알려졌다. 청와대에서 일하던 시절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로 사용할 정도로 공손하고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스로를 음식에 비유할 경우 ‘고구마’라고 밝혔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공격적인 발언으로 ‘사이다’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상대적으로 느리고 답답한 이미지를 얻자 “사이다는 밥이 아니지만 고구마는 든든하다”며 이미지 반전의 계기로 삼았다.

권력이나 이익을 탐해 지조와 양심을 파는 행위를 가장 꼴불견으로 본다고 말했다. 가장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 힘있고 가지고 잘나가는 사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행위를 들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성실로 본다. 인간의 삶을 한 마디로 정리할 경우 ‘모든 삶은 역사다’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스스로의 장점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을 들었다. 단점으로는 과도한 진지함과 결벽주의를 언급했다.

좌우명은 ‘어려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다. 원칙을 지킨다면 당장은 손해여도 결국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신념을 보유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한자성어로 ‘재조산하(再造山河)’를 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실의에 빠져있던 서애 류성룡에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적어 준 글귀로 ‘나라를 다시 만들다’는 뜻이다. 가장 좋아하는 영어단어는 Dream이라고 한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민본주의와 실용주의를 이끌어낸 점을 높이 샀다. 존경하는 현대 정치인으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을 꼽았다. 진보적이고 통합적인 리더십을 본받고 싶다고 말했다.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는 ‘광해, 왕이 된 남자’다. 영화를 관람했을 때 눈물을 흘려 화제가 됐는데 훗날 인터뷰에서 “영화 곳곳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 많아 감정수습이 안 됐다”고 밝혔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자연다큐멘터리도 즐겨 본다. 좋아하는 연예인은 가수 이은미씨와 배우 송강호씨다. 좋아하는 노래는 '꿈꾸는 백마강'이다.

대학생 시절 별명은 알랭 들롱(프랑스 영화배우)이었다.

풍산개 ‘마루’와 ‘깜’, 고양이 ‘찡찡이’와 ‘뭉치’를 키우고 있다.

키는 172센티미터, 몸무게 67킬로그램에 신발 사이즈는 260밀리미터다. 혈액형은 B형이다.

회와 해산물을 좋아한다. 부엌일은 잘 하지 않고 가끔 라면을 직접 끓여먹는 정도다.

취미는 등산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세차례 다녀온 것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꼽았다. 2016년 6월 12년 만에 네팔로 떠나 지진피해 현장을 방문한 뒤 이전에 마치지 못했던 히말라야 트레킹을 완주하고 귀국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 목표로 자동차 여행을 들었다.

아무런 일정이 없는 날에는 책을 읽거나 등산하며 사색한다고 밝혔다. 주량은 소주 1병이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2004년에 청와대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로 히말라야 트래킹을 떠났을 때 끊었다.

산책으로 스트레스를 풀며 밭일이나 풀뽑기 등의 노동도 즐긴다.

천주교 세례명은 디모테오다. 초등학교 시절 사탕과 과일을 준 수녀들에게 감화돼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문재인의 가족은 가난했고 학교 위 ‘신선성당’에서 자주 배급을 받았다. 그러나 불교와 개신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석’이란 단어와 인연이 깊다. 1968년 당시 ‘한강 이남 최고의 명문고’라 불리던 경남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했고, 재수에 나선 1971년 종로학원 진입시험에서도 1등을 했다. 사법연수원에서 차석 졸업했지만, 이는 과거 학생운동 전력 때문이었다. 청와대에서도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맡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친 문용형씨는 당시 대표적 저항잡지인 ‘사상계’를 읽고 이웃 대학생에게 한일회담 반대이유를 설명하는 등 사회의식이 깊었다. 그는 “아버지가 나의 사회의식, 비판의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Who Is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왼쪽)의 사법연수원 시절 모습.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함께.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9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1980년 제 22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1982년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1984년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학과 강사로 일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이 됐다. 부산지방변호사 인권위원장을 역임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부산지부 대표를 거쳐 경남지부 대표를 맡았다.

1995년 법무법인부산 대표변호사가 됐다.

2003년~2004년 2월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일했다. 2004년 5월~2005년 1월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맡았다.

2007년 3월~2008년 2월 대통령비서실 실장을 역임했다.

2007년 8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상임이사가 됐다. 2010년 8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2011년 혁신과통합 상임대표가 됐다.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거쳐 2012년 5월~2016년 5월에 제19대 국회의원(부산 사상구, 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으로 일했다. 2012년 12월까지 민주통합당 대표대행을 맡았다.

2012년 12월 제18대 대통령선거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 패했다.

2012년 7월~2014년 5월 제19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2014년 6월~2016년 5월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2015년 2월~2015년 12월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를 맡았다.

2015년 12월 새정치민주연합 인재영입위원장으로 일했다.

2015년 12월~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맡았다.

2015년 12월~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을 역임했다.

2016년 1월27일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에서 물러나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을 맡았다.

2017년 4월3일 더불어민주당의 제19대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 학력

1965년 부산 남항초등학교, 1968년 경남중학교, 1971년 부산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2년 재수를 거쳐 경희대학교 법학과(당시 법률학과)에 문과 수석으로 입학했다. 경희대학교는 당시 그에게 4년 전액장학금을 약속했다.

1975년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경희대에서 제적당했다.

1980년 경희대학교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부친 문용형씨는 함경남도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이다.

원래 흥남시청에서 농업계장, 농업과장으로 근무했으나 한국전쟁 시기 아내 강한옥과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로 남하해 문재인을 낳았다. 문재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았다.

문재인은 2남3녀 중 장남이다. 누나 문재월씨와 여동생 문재성씨는 주부이고 남동생 문재익씨는 원양어선 선장이다. 막내 여동생 문재실씨는 모친 강한옥씨를 모시고 부산 영도에서 살고 있다.

1981년 대학교 2년 후배인 김정숙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문준용) 1녀(문다혜)를 두었다. 자녀교육관으로 자식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들 문준용씨는 2011년 광주비엔날레에 '마쿠로쿠로스케 테이블'이라는 작품을 출품한 미디어아티스트다. 문준용씨의 장인은 목사로 일했다. 딸 문다혜씨는 회사원이다.

부인 김정숙씨와 인연은 학생운동에서 시작했다. 시위 도중 문재인이 최루가스를 맡고 실신했을 때 대학 2년 후배인 김정숙씨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 것이 계기가 됐다.

김정숙씨는 군대에 간 문재인을 처음 면회할 때 일반적인 통닭 대신 안개꽃을 한아름 들고 왔다는 일화가 있다. 프로포즈도 김정숙씨가 했다.

문재인의 처가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장인과 장모가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한복집을 했으며, 문재인 결혼 당시에 강화도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 상훈

특전사 복무 기간 사령관 정병주와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여단장)으로부터 폭파과정, 화생방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받았다.

사법연수원 재학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을 수상했다.

◆ 기타

1975년 8월 강제징집돼 육군에 입대했다. 경남 창원 39향토보병사단 훈련소를 거쳐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서 복무했다. 수중폭파조에 배속되어 공중낙하, 수중침투, 천리행군 등을 거뜬히 치러낸 특A급 사병이었다.

1976년 상병시절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때 미루나무 제거 작전 ‘폴 버니언’에 참가했다. 1978년 병장 만기 제대했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 여단장은 전두환 준장, 대대장은 장세동 중령이었다.
[Who Is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 경희대 재학시절의 문재인과 아내 김정숙씨. MT를 가는 기차안에서 김정숙씨가 문재인 머리를 빗겨주고 있다.

어록


“오늘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역사를 시작한다. 분열의 시대와 단호히 결별하고 정의로운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겠다.

이번 대선은 보수 대 진보의 대결이 아니다. 정의냐 불의냐의 선택이다. 상식이냐 몰상식이냐의 선택이다. 공정이냐 불공정이냐 선택이다. 위대한 국민의 나라로 가야 한다.

내가 정치를 결심한 목표도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 주류를 바꾸고 싶었다. 이제 권력의 주류는 시민이어야 한다. 깨끗해서 자랑스러운 대통령, 공정해서 믿음직한 대통령, 따뜻해서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다.” (2017/04/03,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수락 연설에서)

“정권이 교체된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서 ‘이제 편히 쉬십시오. 못다 이룬 꿈 제가 다 하겠습니다. 다시는 정권 뺏기지 않고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여기 자랑스러운 후배들이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고 말씀드리겠다.” (2017/03/31,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후보자 영남권역 선출대회에서)

“계산하면 안 되는 건데 정치에서 계산하면 절대로 맞는 것이 없다 생각한다. 특히 여의도 정치의 셈법은 정말로 맞는 것이 없다.” (2017/03/20, 광주에서 기자들과 만나 특전사 복무 논란을 해명하면서)

“진정한 통합은 적폐를 덮고 가는 봉합이 아니다. 적폐를 확실히 청산하면서 민주주의 틀 안에서 소수의견도 존중하고 포용하는 원칙 있는 통합이 중요하다.” (2017/03/12,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불필요한 인증절차를 과감하게 없애겠다. 현 정부가 추진한다고 했지만 미진했던 '공인인증서 완전 폐지'를 실현하고 모든 인증서와 또 다양한 인증방식이 시장에서 차별 없이 경쟁할 수 있도록 하겠다.” (2017/03/02, 서울 구로구 지밸리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민간이 만드는 좋은 일자리 ICT 현장 리더들과의 대화'에 참석해)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안심시키는 것이 안보라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야 말로 안보에 유능한 세력이다. 그때 우리 국민들은 이제 남북 간에 두 번 다시 전쟁은 없을 것이다, 통일은 언제일지 몰라도 이제 평화는 확실히 구축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불과 1년 만에 천안함과 연평도, 최근의 목함지뢰 사건까지 남북 군사적 충돌 때문에, 북의 공격 때문에 우리 NLL과 비무장지대, 군사 분계선이 뻥 뚫렸다. 많은 국민과 장병이 아까운 목숨 잃고 다치는 사이에 북핵은 갈수록 고도화됐고 이제는 무기화단계에 이르렀다.” (2017/02/22,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진행된 ‘더불어국방안보포럼’에 참석해)

“‘문재인이 대세’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실제로 민심을 확인해 보니 내가 대세인 것이 맞다. 문재인 대세론은 정권교체의 대세 속에서 나를 정권교체의 적임자로 국민들이 인정해준 것이다. ‘반문재인 연대’나 ‘제3지대’ 등의 움직임은 결국 정권교체를 반대하는 연대, ‘정권연장 연대’에 지나지 않는다.” (2017/01/31, 서울 여의도 인근의 카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 개 정당으로 정권교체가 불가능하고 여러 정당과의 연대가 필요하면 연정(연립정부)도 가능하다. 연정이 정당 책임 정치와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드시 우리 당의 대선주자로 한정할 필요가 없으며 정권교체 대의에 함께 힘을 모으는 정당과 사람이라면 좋다고 생각한다.

야권의 통합·연대·단일화에 대해 나와 민주당은 계속해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또한 앞으로 경선 과정에서 내가 ‘친문’에 갇힌 세력이 아님을 보여주겠다. 캠프 구성을 보면 그간 친문이라고 할 분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2017/01/23, 광주 국민생활관에서 열린 광주전남언론포럼에서)

“작품은 예술가의 자유이고 존중돼야 하지만 그 작품이 국회에서 정치인의 주최로 전시된 것은 적절치 않았다. 예술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은 다르다. 예술에서는 비판과 풍자가 중요하지만, 정치에서는 품격과 절제가 중요하다.” (2017/01/24,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최한 국회 의원회관 전시회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누드화가 전시돼 물의를 빚자)

“당신들은 촛불과 일상으로 이 나라의 주인임을 증명했고, 반세기의 적폐가 강요한 절망에 오직 희망으로 응답했다. 2017년 대한민국은 당신들을 닮아갈 것이다.” (2016/12/31, 페이스북에 남긴 2017년 신년사에서 국민들에게 보낼 메시지로)

“특전사 출신인 나보고 종북이라는 사람들이 진짜 종북이다. 오늘부로 종북의 의미를 새로 규정한다. 군대 피하는 사람들, 방산비리 사범들, 국민을 편 갈라 분열시키는 가짜보수 세력이 종북이다.” (2016/12/28, 자신의 싱크탱크인 국민성장정책공간이 국회도서관에서 ‘책임안보, 강한 대한민국’을 주제로 주최한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제2차 포럼에 참석해)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표명을 요구하는 일부의 비판까지 감수했다. 이는 오로지 국정혼란을 최소화하려는 충정 때문이었고, 박 대통령에게도 퇴로를 열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러한 저와 우리 당의 충정을 끝내 외면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모든 야당과 시민사회, 지역까지 함께 하는 비상기구를 통해 머리를 맞대고 퇴진운동의 전국민적 확산을 논의하고 추진해 나가겠다.” (2016/11/15, 박근혜 대통령 퇴진운동에 나서겠다며)

“남북문제에 관한 한, 저도 참여정부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 국민을 편가르고 증오하게 만드는 새누리당의 사악한 종북공세에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 이번에는 반드시 끝장을 보겠다. 더 이상 구시대적 색깔론이 이 땅에 발붙일 수 없도록 결연한 의지로 맨 앞에서 싸우겠다.” (2016/10/13, 송민순 회고록 논란을 반박하며)

“우리 경제를 살리는데 재벌 대기업이 여전히 견인차 역할을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재벌 대기업이 자신의 성장이나 이익만을 도모하지 말고 우리 경제를 공정한 경제로 만들고 우리 경제를 혁신해서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드는 노력을 해달라.” (2016/10/13, 4대기업 경제연구소장 간담회)

“이제 자유로워질 것이다. 19대 국회에서 대선출마도 했고 당 대표도 했고 총선도 치렀다. 제 평생의 정치를 압축적으로 경험한 국회였다. 이렇게 마치니 시원섭섭하다.” (2016/05/19,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참석하며)

“호남의 정신을 담지 못하는 야당 후보는 이미 그 자격을 상실한 것과 같다. 호남이 나에 대한 지지를 거두겠다면 미련없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 대선에도 도전하지 않겠다.” (2016/04/08, 총선을 앞두고 광주를 방문해 기자회견에서)

“온갖 흔들기 속에서도 혁신의 원칙을 지켰고, 혁신을 이뤘다. 계파공천과 밀실 공천이 불가능한 공정한 공천 절차를 마련했고,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드렸다. 인재영입을 통한 변화의 큰 물결도 시작됐다. 못한 것은 통합인데, 통합에 물꼬를 틔우기 위해 제가 비켜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고위원들과 상의해, 선대위로의 권한 이양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백의종군 하겠다는 각오다.” (2016/01/19, 신년 기자회견에서 당대표 사퇴 의사를 밝히며)

“한반도의 새로운 경제 지도를 그려야 한다. 우리 경제활동 영역을 북한과 대륙으로 확장해야 한다. 한반도가 더 이상 대륙의 변방이나 해양의 변방이 아닌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교량국가가 되어야 한다. 지난 5년 우리 발목을 스스로 잡아왔던 5.24 조치를 해제하고 뱃길과 육로를 열어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교류협력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2015/08/15, 광복 70주년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제시하며)

“지난 한달, 국민이 메르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정부와 대통령은 국민 곁에 없었다. 뒷북대응과 비밀주의로 국민의 혼란만 가중시켰고, 정부의 컨트롤타워는 작동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완벽하게 실패했다.” (2015/06/26, 박근혜 대통령의 메르스 무능과 거부권 행사에 대한 우리당의 입장 대국민담화에서)

“민주주의, 서민경제, 계속 파탄낸다면 저는 박근혜 정부와 전면전을 시작할 것이다.” (2015/2/8,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 당대표 수락연설에서)

“세월호만 침몰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격이 침몰하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 침몰했다고 생각한다.” (2014/5/4,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을 방문하여)

“새누리당이란 절대강자가 있는 상황에서 약한 정파들끼리의 연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2014/1/28,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지방선거의 야권연대을 두고)

“안녕하지 못한 정치가 고귀한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 그 분이 죽음으로 말하려던 뜻이 아프게 와 닿는다.” (2014/1/3, 국정원 대선개입 특검을 요구하며 서울역에서 분신한 이남종씨의 빈소에 조문하여)

“실무자들을 괴롭히지 말고, 나를 소환하라. 국민이 원하는 것은 진실규명을 빨리 끝내고 소모적 논란과 정쟁에서 벗어나 정치가 민생으로 돌아오게 하라는 것이다.” (2013/10/10, 노무현 정부 NLL 회의록 논란에 대해 검찰이 당시 실무자들을 소환하자)

“참여정부에 있으면서 5년 내내 노 전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봤고, 그때의 경험이 오히려 장점이 됐다. 그 누구보다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2012/9/14,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초청 토론에서 손학규 후보가 정치경험 부족에 대해 언급하자)

“소수 특권층의 나라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주인인 우리나라, 네 편 내 편 편가르지 않고 함께 가는 우리나라, 우리'라는 말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 반칙과 특권이 지배하는 암울한 시대와 최악의 정부가 나를 정치로 불러냈다. 시민과 동행하는 정치로 반드시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를 이뤄내겠다.” (2012/6/17,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제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내 별명 중 노무현의 그림자가 가장 마음에 든다.”(2012/1/9,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말하며)

“당신(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 같다.” (2011년 출간한 자서전 '운명'에서)

“국민이 이명박 후보를 뽑을 때 도덕성에 문제가 있더라도 경제는 잘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성장률, 고용, 국가채무 규모 등 어느 하나 참여정부보다 나은 게 없다.” (2011/2/11,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보수층이 참여정부의 경제문제를 추궁했다는 지적에)

“국정원의 국내사찰을 금지하자는 것은 국정원의 기능을 법에 따라 제 위치로 찾아주자는 것.” (2003/1/24, 기자들과 만나 국정원 장기개혁에 대해 논의하며)

“앞으로도 정치를 할 생각은 없다. 정치 쪽은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펼치고자 하는 새정치, 여러가지 개혁에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부족한 부분이나마 참여하기로 했다. 노 당선자에게 이제 빚을 갚고 싶다. 정치를 잘 모르며 민정과 사정, 제도개혁, 인사검증 등 중요한 민정수석의 업무를 잘 감당할지 걱정이 된다. 지금은 나서지 않고 묵묵히 배우겠다.” (2003/1/23,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내정된 후, ‘정치에 거리를 두다 이번에 특별히 민정수석을 맡은 계기’를 말하며)

“정치에 뜻이 없다.” (2002년 6.13 지방선거 때 노무현이 부산시장 후보로 나서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법률가는 보통 서민들이 겪는 사건들 속에서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아야 한다.” (1982년 사법연수원 수료 후 대형 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