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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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손학규는 국민의당의 19대 대통령선거 경선후보다. 사회운동에 참여했다가 정치인으로 변신해 국회의원으로 4선을 지냈다.
1947년 11월 22일 경기도 시흥군에서 태어나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뒤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를 위해 활동하다 체포됐으나 유신독재가 붕괴하면서 풀려났다.
그 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인하대와 서강대에서 교수를 지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제14대 경기 광명 재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다음 총선에서 신한국당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됐으며 경기도지사에 도전해 당선됐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으며 민주평화계의 대통합을 이루어 내고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대선 후보경선에서 정동영 후보에게 패해 2등으로 낙선했다.
통합민주당의 초대 당대표가 되었지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당 또한 8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선거참패에 책임을 지고 대표에서 물러나 강원도 춘천에서 칩거했다.
2년 만에 정계에 복귀해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반성과 무상복지를 내용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며 민주당 대표로 선출됐다. 재보궐선거에 경기도 성남시 분당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대통령 선거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민주통합당의 대선후보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고 2위로 낙선했다
2년 뒤 수원병 재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김용남 후보에 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군 만덕산 자락에 있는 토담집으로 들어갔다.
2016년 10월 “이제는 만덕산이 내려가라 한다”며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국민주권개혁회의와 국민의당의 통합을 선언하고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 경영활동의 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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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출마 선언
2017년 3월19일 국민의당 경선주자로 제 19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출마 선언식을 열고 “특권과 패권이 곧 모든 적폐의 근원”이라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종식하고 국민주권의 시대를 열고 재벌위주의 경제 시스템을 해체하고 중소기업 강국을 열어가겠다”고 말했다.
손학규는 이 자리에서 ‘개헌’의지를 강조했다.
“2018년 지방선거 때까지 헌법을 바꾸고,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해 다음 총선과 더불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 2020년에는 제7공화국이 출범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다른 당과의 연대 필요성도 강조했다.
손학규는 “대선 후에 연대.연합을 하겠다는 건 거짓말”이라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리가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생각할 때 연립정부를 구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렇게 하겠다고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자강론을 내세우며 연대 연합에 선을 긋고 있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를 겨냥한 것이라고 해석됐다.
손학규는 바른정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개혁을 선언한다면 바른정당 등과의 연대 연합론이 호남에서도 수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제3지대와 빅텐트론 추진
손학규는 조기대선을 앞두고 2017년 2월 제3지대와 빅텐트 논의에 불씨를 지폈다.
민주당 비문계 이탈세력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 개혁적 보수세력 등에 한국당 내 개헌 및 개혁 동조세력까지 규합해 ‘반패권 연정’을 이룸으로써 대선에서 승리하고 개혁과 개헌을 완수하겠다는 것이다.
비박(비박근혜)·비문(비문재인) 세력을 규합해 국회의석 180~200석의 비패권 연립정부를 추진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2017년 2월20일에는 바른정당과 연대를 시사했다.
YTN라디오 인터뷰에서 “어차피 대선이 끝나고 나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여소야대가 불가피한 만큼 공동정부 내지는 연립정부가 불가피하다”며 “같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정당과 연대는 꼭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고 ‘바른정당과도 연립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빅텐트론이 정치권에서 이렇다 할 힘을 얻지 못하고 손학규가 국민의당 입당한 뒤에도 이슈가 되지 못하자 바른정당과 연대를 통해 ‘제3지대’와 빅텐트 논의에 불씨를 살려보겠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 개헌론
손학규는 2016년 10월 정계에 복귀하면서 개헌론을 꺼내들었다.
손학규는 정계복귀와 동시에 발간한 저서 ‘나의 목민심서, 강진일기’에서 “개헌은 정치문제가 아니라 국가문제”라며 “이제 권력구조의 개편은 불가피해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대선후보가 책임총리를 공약으로 약속하고 당선 후에는 임기 중 개헌 때까지 이를 실천하면서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론도 제시했다.
2016년 11월 대표적인 개헌론자인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전 비상대책위 대표와 만나 ‘박 대통령 임기 안에 개헌을 이뤄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박근혜 게이트’로 정국이 급변하면서 개헌론도 힘을 잃었다.
손학규는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된 뒤 다시 개헌론을 꺼내들었다.
2017년 3월7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전 비상대책위 대표와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나 한 시간여 동안 배석자 없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개헌을 놓고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3월10일에는 2020년 제7공화국 출범론을 공개했다. 대통령이 되어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줄이고 그 기간 동안 개헌을 완수하겠다는 것이다.
2017년 3월19일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도 차기정부는 개혁공동정부이자 개헌공동정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녁이 있는 삶
2012년 대선에 내건 슬로건 ‘저녁이 있는 삶’은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선거구호라는 평을 받는다.
저녁이 있는 삶은 인간적인 삶을 위해 경제구조를 새롭게 만들자는 것을 요체로 한다. 일자리를 풍부하게 창출해 근로자들이 원치않는 잔업을 없애고 정시에 퇴근해도 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보편적 복지와 일자리 문제라는 민주통합당과 손학규의 핵심 아젠다가 절묘하게 함축돼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OECD국가 가운데 가장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2030대의 젊은 세대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쟁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패했지만 문재인 후보도 “대선후보가 되면 ‘저녁이 있는 삶’ 슬로건을 빌릴 것”이라며 손학규의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 한나라당 탈당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표어가 ‘경제 대통령’ 이명박, ‘민생 총리’ 손학규, ‘책임 당대표’ 박근혜였을 정도로 당내에서 높은 지명도를 누렸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보다 진보적 색채가 강해 당내에 지지세력을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경쟁자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영남권에 확고한 지역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영남권과 수도권에서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었다.
손학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행보를 보여 한나라당에 남아 개혁을 도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 등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은 민주화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손학규에게 함께 분열로 자멸해가던 여권을 재편하자고 요청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손학규가 참여하는 여권 재편을 지지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손학규를 놓고 “당에 남더라도 시베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손학규는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과 함께 여권 재편에 나서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고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다.
손학규가 한나라당에 남았더라면 자연스럽게 여권의 대선후보가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그러나 한나라당에서 버티는 선택을 했더라도 당내에 세력이 없고 지지기반이 뚜렷하지 않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 경기도지사
2002년부터 2006년까지 경기도지사로 있으면서 판교 테크노밸리, 파주 LCD단지, 평택 현곡단지 등 여러 산업단지를 조성했다.
판교 테크노밸리에서만 7만5천 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등 도지사 시절에만 경기도에 74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17만 명이었던 파주시 인구는 LCD 단지 유치 이후 40여만 명으로 늘었다.
21차례에 걸쳐 투자유치단을 이끌고 미국, 유럽 등을 다니며 외국자본 유치에도 나섰다. 159차례에 걸쳐 216명의 해외업체 CEO들을 만났는데 이 가운데 113개 해외업체로부터 140억 달러가량의 외자를 유치했다. 특히 LCD 관련 업체 30여 군데로부터 투자유치에 성공했다. 당시 손학규가 외자유치를 위해 다닌 총 거리가 지구 10바퀴를 돌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손학규가 경기도지사로 재임했을 때 경기도의 연평균 성장률은 7.4%에 정도에 이르렀다.
△최연소 복지부장관
1996년 만 49세에 역대 최연소로 복지부장관에 임명돼 1997년 3년간 끌어온 ‘한약분쟁’을 해결했다.
당시 약사들의 한약 조제·판매를 놓고 약사와 한의사들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한의사들은 물론 한의대생들까지 약사들의 한약제조를 반대하며 데모에 나섰고 한의대생 집단 유급사태까지 벌어졌다. 약사들은 한약사제도가 기존 약사들의 한약조제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헌법소원을 제출하고 폐업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손학규는 약사들에게 약대를 6년제로 개편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며 설득을 시작했다. 또한 한약학과는 한의대가 아닌 약대에 설치하되 한의대가 있는 종합대학에 설치하는 방안을 내놨다.
한의사들이 군의관, 공보의에 입대할 수 있게 했고 행정부 내 독립적인 전담부서(한방정책관실)를 설치하도록 했다. 또한 한의학연구원 설치하고 부산대에 한의학 전문대학원이 세우는 방안을 내놨다.
손학규는 약사들과 한의사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며 한약분쟁을 무난히 매듭짓고 한의사, 약사 두 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정계복귀를 선언한 2016년 10월20일 오전 전남 강진군 토담집을 떠나기 직전 신발끈을 동여매고 있다. <뉴시스>
- 비전과 과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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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과 과제
손학규는 19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우선 2017년 3월 말에서 4월 초에 걸쳐 열리는 국민의 당 전국순회경선에서 대선후보로 확정받는 것이 당면한 과제다.
2017년 3월 25일 광주·전남·제주지역을 시작으로 26일 전북, 28일 부산·울산·경남, 30일 대구·경북·강원, 4월1일 경기, 4월2일 서울·인천에서 차례로 치러지는 순회경선에서 강력한 경선후보인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와 격전을 벌여야 한다.
후보는 4월4일 대전·충남·충북·세종에서 경선을 한 뒤 확정된다. 순회경선 결과 과반득표 후보가 나오지 않으면 4월6일 결선투표를 통해 최종적으로 대선후보를 선출한다.
호남지역이 국민의당의 최대 텃밭인 만큼 25일과 26일 순회경선에서 판세가 갈라질 것으로 보인다.
19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3년 단임제의 실천과 함께 개헌논의를 본격적으로 불러와 2020년에는 새 헌법체제 하에서 제 7공화국을 출범시킨다는 비전을 보이고 있다.
다양한 정당과 관직 경험, 정치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쌓은 다양한 업적으로 균형있는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비전도 지니고 있다.
◆ 평가
다양한 영역에서 풍부한 경험을 한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젊었을 때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했다. 대학 재학 시절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대표와 함께 '서울대 65학번 3인방'으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학자로서 연구업적도 남겼고 교수로서 대학교에도 있었다. 관직으로는 복지부 장관과 경기도 도지사를 거쳤으며 정치인으로서는 4선 의원에 민주당 대표까지 역임했다.
정치생활 24년 동안 루머나 스캔들이 거의 없어 도덕성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손학규와 절친한 교수에 따르면 2006년 대기업 총수 초청으로 골프를 했는데 손학규가 녹이 슨 낡은 골프채를 쓰는 것을 본 대기업 총수가 골프 클럽을 선물하려 했지만 완강히 거절했다고 한다.
직관적 성향에 학구적인 말투를 쓴다. 주변에서는 손학규가 신학자나 정신의학자, 심리학자로도 어울린다는 말도 한다.
상반된 성향의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을 두루 거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인 이미지가 강하다. 민주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만큼 지지층을 보수층으로의 확장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7년 3월 손학규는 스스로를 ‘저평가 우량주’라고 평가했다.
잦은 당적 변경과 정계은퇴 번복 등으로 비판을 받는다. 정치인으로서 신의가 없다는 공격의 표적이 된다. 이 논란은 2007년 한나랑을 탈퇴하면서 10년 동안 계속 거론되며 손학규의 가장 큰 약점이 됐다.
손학규는 ‘변절’이 아니라 정치적 ‘소신’이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여전히 ‘철새 정치인’이란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대선 삼수생이지만 늘 ‘잠재적 대권주자’였다. 엘리트 정치인이지만 정치력이나 친화력이 부족하고 대중성이 없다는 혹평도 있다. 손학규도 “나의 단점은 좀 더 대중성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 대문에 정치마케팅 능력이 떨어지고 성과만큼 유권자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결과 열광적인 지지층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국민의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안철수 전 대표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1947년생으로 대권주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아 이번이 마지막 도전일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3월 빅뱅론을 자주 언급하며 내각제를 통한 7공화국을 주장하면서 개헌론에 불을 붙이고 있는데 개헌론보다는 정권교체론, 문재인 대세론이 강해지면서 발언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
종교는 기독교(장로교)다. 주량은 막걸리 1명이고 비흡연자다.
취미는 등산이며 소유차량은 렉스턴 2002년식이다.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좋아하는 학자로 다산 정약용을 꼽는다.
스스로 ‘찍새’라는 별명을 붙였다. 경기도지사 시절 경기도 투자유치팀을 이끌고 세계를 돌며 외국기업을 찍어서 데려왔다는 의미다.
- 사건사고
- 경력/학력/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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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1977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운동 간사로 활동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제14대 민자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제15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1999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로 있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제31대 경기도 도지사를 지냈다.
2008년 1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를 지냈다.
2008년 2월부터 7월까지 통합민주당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2010년 10월 민주당 대표에 올랐다.
2011년 4월 제18대 국회의원(민주당)에 당선됐다.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맡았다.
2014년 4월 새정치민주연합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2017년 2월 정치적 지원조직인 국민주권개혁회의와 국민의당을 통합해 국민의당에 입당했다.
◆ 학력
1959년 매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62년 경기중학교를 나왔다.
1964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3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나왔다.
1988년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교장까지 지낸 아버지 손병화씨와 어머니 양현자씨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약대를 나온 이윤영씨와 결혼해 슬하에 장녀 손원정씨와 차녀 손원평씨가 있다. 손원정씨와 손원평씨는 각각 연극연출가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 상훈
2000년 제2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을 수상했다.
2001년 제3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을 수상했다.
2001년 평등부부상을 받았다.
2005년 한국을 빛낸 CEO 글로벌 경영 부문에 선정됐다.
◆ 기타
'Authoritarianism and opposition in South Korea'(1989), '한국사회 인식논쟁'(1990), '한국정치와 개혁'(1993), '경기2002 새로운 희망의 중심지'(1998), '진보적 자유주의의길'(2000), '손학규와 찍새 딱새들'(2006), '길 위에서 민심을 만나다'(2007), '대한민국 손학규를 발견하다'(2007), '저녁이 있는 삶'(2012) 등 총 9권의 저서를 냈다.
윤군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재산은 약 2억 원으로 2016년 84만6600원을 납세했고 100만 원을 기부했다. 2014년에는 1억7802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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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고치지 않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말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제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개혁 대통령이자 개헌 대통령이 되고, 6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돼 7공화국을 여는 첫 대통령이 되겠다.” (2017/03/19, 19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국민의당은 당세가 약하기 때문에 경선 통한 흥행과 붐업이 필요하다. 여섯군데냐 여덟군데냐, 강원과 제주까지 포함하느냐는 논란 등 경선 장소를 놓고 봐도 4월2일까지는 너무 짧다. 당력으로 봐서는 치르기 어렵다. 그래서 경선기간을 좀 더 두고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7/03/13, 국민의당 경선 일정과 투표소 설치 여부를 놓고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와 대립각을 세우며)
“대국민 사과, 헌재판결에 승복하는 모습을 통해 화합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역할이 아니었을까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국정치사에 다시는 일어나선 안될 불행한 일이다.” (2017/03/12, 박근혜 전 대통령이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내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깝다는 입장을 내놓으며)
“어려서부터 국가가 보육문제를 책임지는 세상, 많은 엄마들이 마음 놓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 겠다. 교육문제부터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엄마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 (2017/03/11, 국민의당 경기도당 주최로 열린 국민의당 대선주자들에게 듣는 토크쇼 ‘엄마 사랑해 엄마가 미안해’에 참석해)
“2018년 지방선거 때까지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해 권력구조의 개혁을 완수하겠다. 국민주권과 기본권을 강화하고, 분권을 주요 내용으로 하되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 주요 개혁을 완수한 후 2020년에 제7공화국이 출범하도록 하겠다."
“이번 대선이 제왕적 권력인 박근혜 패권에서 또 다른 패권으로 이동하는 ‘패권교체’에 그친다면 이는 ‘이게 나라냐’를 외친 촛불민심을 배신하는 것이다. 차기 정부는 일체의 패권, 그리고 기득권과 단절한 개혁세력이 중심이 되는 개혁정부를 이뤄야 한다.”
“3월에 정치권에 빅뱅 있을 것이다.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2017/03/10,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결정 뒤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검 수사기간 연장이 불승인 됐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다. 첫째로 ‘검사장 직선제’를 실시해야 한다. 검찰의 인사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면 사법정의 실현을 위한 개혁의 물꼬가 된다. 둘째, 특검법을 개정해야 한다. 한정된 수사기간과 수사대상의 비협조로 특검 수사가 절반에 그쳤다. 수사대상과 범위, 사안의 경중을 고려해 충분한 수사기간을 보장해야 한다. 셋째, 특검이 기소한 피의자들에 대한 공소유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2017/03/06, 박영수 특검이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나 같은 저평가 우량주에 투자하면 ‘대박’이다.” (2017/03/02, JTBC 뉴스현장에 출연해 손석희 JTBC 사장이 손학규는 기자들과 대중에게 인기가 그다지 없다고 말하자)
“바른정당이 앞으로 우리나라를 어떻게 개혁할 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면 연정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017/02/22,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 헌법조항 개정 정책토론회’에 참석한 뒤 기자들에게)
“2011년에 민주당 대표로 있을 때 통합을 이뤘다. 통합을 했지만 정체를 드러낸 친문 패권세력 때문에 문재인 후보에게 패했다. ‘내가 그 때 문재인 후보를 이겼다면 확장성 높은 손학규가 대선을 승리했을 것이고 이런 외교적인 파국은 면했을 텐데, 한반도 평화를 구축했을 텐데’라는 한탄을 했다.” (2017/03/04, 인천 강화에서 열린 ‘국민의당 경기도당 10만 전사만들기 고양시 출정식’에서)
“오늘 국민주권개혁회의는 국민의당과 통합을 선언한다. 개혁세력을 하나로 모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새로운 나라,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책임있는 수구세력은 정권 욕심을 아예 버려야 한다. 자기 패거리가 아니면 철저히 배제하는 민주당의 패권주의 집단이 정권을 잡는 것도 정권교체가 아니다.” (2017/02/07, 국민의당과 통합을 선언하고,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등과 경선에 참여할 뜻을 밝히며)
“국민 여러분, 저는 정치와 경제의 새판짜기에 저의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국회의원, 장관, 도지사, 당 대표를 하면서 얻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겠습니다. 당적도 버리겠습니다. 제가 무엇이 되겠다는, 꼭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 모든 것을 내려놓아 텅 빈 제 등에 짐을 얹어 주십시오. 제7공화국을 열기 위해, 꺼져버린 경제성장의 엔진을 갈아 다시 시동을 걸기 위해, 대한민국의 미래만 보고, 소걸음으로 뚜벅뚜벅 나아가겠습니다.” (2016/10/20,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2년 동안 이곳 만덕산 기슭에서 잘 지냈고, 이제는 만덕산이 내려가라 한다. 내려 가야죠.” (2016/10/20, 정계 복귀를 위해 강진군 토담집을 나서며)
“나라 구하는데 죽을 각오로 나서겠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정신, 다산이 경세유표를 쓴 개혁의 정신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 (2016/09/16, 광주에서 열린 ‘손학규와 함께 저녁이 있는 빛고을 문화한마당’에 참석해)
“언제 한 번 좋은 자리 만들어 나누자,” (2016/08/21, 고 박형규 목사 빈소에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요즘은 예전에 하신 말씀처럼 ‘저녁이 있는 삶’이 정말로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고 말하자)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다는 것을 느낀다. 여러분께서 저에게 필요한 용기를 주셨다. 그 용기, 국민에게 꿈과 희망으로 되돌려드리겠다.”(2016/07/29, 전남 해남군 해남문화원에서)
“지금 국민은 새 판 시작하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2016/05/18,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 참배하며)
“새 판을 짜서 국민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이런 정치현실 속에서 과연 총선에 어느 당이 승리를 하고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대해 국민이 어떻게 제대로 관심을 갖겠느냐.” (2016/01/31, 러시아 모스크바 극동문제연구소 방문한 뒤 귀국하며)
“언론이나 주위에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보고 정치를 다시 하라고 하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마음이 간혹 곰팡이처럼 피어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당이 어렵다고 내가 다시 정치를 한다면 국민에게 더 큰 정치불신을 초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15/06/02, 대선주자 여론조사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자)
“1993년 정치에 입문한 이래 분에 넘치는 국민의 사랑과 기대를 받았다.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시베리아 땅으로 나선 이래 민주당과 함께 한 정치역정은 보람있었다. 정치인은 들고 날 때가 분명해야 한다. 모두 함께 일하고 일한만큼 모두가 소외받지 않고 나누는 세상,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려 했던 제 꿈을 이제 접고 오늘 이 시간부터 시민의 한사람으로 돌아가 성실하게 살아가겠다.” (2014/07/31, 수원병에 출마해 낙선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경기도지사로 땀 흘렸던 수원은 제 마음속의 영원한 자랑이다. 수원의 자존심으로 팔달에서 민생을 제대로 돌보는 정치를 열어나가겠다.” (2014/07/10, 경기도의회에서 수원병(팔달)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국민의 생활, 국민의 삶, 민생이다. 그러나 국민의 피와 희생으로 이뤄진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것은 국민은 결코 인내하지 않을 것이다.” (2013/09/29, 박근혜정부 평가를 묻는 질문에)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기운을 갖고 분당 같은 곳에서 민주당의 기반을 만드는 일을 지원하고 돕고 밀어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총선에 출마해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국회의원직을 몇 달 수행하지 못한다. 이는 선거구민에 대한 기본적인 도의나 예의가 아니다.” (2012/01/28, 총선에 불출마하고 대선에 직행하겠다는 뜻을 보이며)
“2011년은 민주당이 수권정당으로 거듭 새롭게 태어나는 해가 될 것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고 우리가 이제 본격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겠다.” (2011/01/01, 서울 영등포 민주당사에서 열린 단배식에서)
"국민을 섬기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이 이제 아침마다 국민을 꾸짖는다. 그 오만함을 깨우치려 우리 국민은 ‘촛불’로 경고했지만 도무지 귀를 막고 듣지 않고 있다." (2010/05/16, 6·2지방선거에서 이명박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요즘 산골에 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지낸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또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이고 어떻게 나가야 할까를 생각한다. 실제로 이 역사와 이 사회에서 손학규는 필요한 사람인가 다시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2009/02/22, 재보선 출마여부를 묻는 질문에)
“당 대표로서 내 머리 속에는 친노(노무현)나 반노라는 것은 없다. 우리 당에 속해 있는 국회의원들이 특정 카테고리 안에 끼워져 있지만 개인의 정책 방향과 미래를 보는 자세가 중요하지, 이념적이고 색깔에 얽매여서 편을 가르고 배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2008/01/11, 대통합민주신당 대표에 취임하며)
“지난 대선에서 참패한 대통합민주신당은 환골탈태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거듭나야 다가오는 총선에서 국민들이 다시 찾아줄 것이다.” (2008/01/06, 광주를 방문해 지지자들과 함께 무등산에 오르며)
“5·16을 구국혁명이라며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과거세력이 있다. 첨단 산업으로 경쟁해야 하는 이 시기에 아날로그 시대의 운하를 파겠다는 낡은 세력이 있다.” (2007/07/26, 한나라당 박근혜, 이명박 후보를 겨냥하며)
“미래, 평화, 통합의 시대를 경영할 창조적 주도세력을 만드는 데 저 자신을 바치겠다. 이를 위해 나 자신을 버리겠다. 어떤 돌팔매도 감수하겠다. 한 때의 돌팔매를 피하려고 역사의 죄인이 되는 길을 택할 수 없다". 한나라당에 등을 돌리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의 장래와 국민의 희망에 등을 돌릴 수는 없다. 한나라당을 위해 순교하기 보다는 국민을 위한 순교를 선택하겠다.” (2007/03/19, 한나라당 탈당을 공식 선언하며)
100일동안 많은 것 보고 듣고 느꼈다. 국민들은 너무나 착하고, 능력이 탁월하고 부지런하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불안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 산다. 열심히 일하는 국민에게 웃음을 보여 줘야 한다. 일자리, 교육, 노후, 주거불안 4대 문제서 해방시켜야 한다. (2006/10/09, ‘100일 민심 대장정’을 마친 뒤)
“황우석 교수와 연구팀을 탄압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탄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통해 희귀 난치병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짓밟는 몰상식한 행위다."결코 이런 일이 용납돼서는 안되며 국민들이 궐기해서라도 황 교수와 연구팀을 해치는 사람들을 배격하고 격리해야 한다.” (2005/12/09, 황우석 바이오장기연구센터 착공식에서)
“금년 경기도정 최고 목표는 일자리 창출이다. 금년에 26만 개, 2008년까지 모두 10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을 견인하겠다.” (2005/01/26, 연두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수도이전 문제를 갖고 정치적으로 더 재미를 보려는 생각은 그만둬야 한다. 수도이전문제를 어떻게 불신임문제, 정권퇴진문제로 연결을 시키느냐. 이것은 아주 전형적으로 국민을 담보로 잡고 국가의 백년지대계를 정치화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2004/07/12, 수도이전 문제와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며)
“불행한 사태를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동안 추진해오던 도정목표를 흔들림 없이 수행하겠다.” (2004/03/12, 경기도지사일 때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국회가결과 관련 공식성명을 내며)
“시대사적인 요구에 의한 정치적 세대교체를 위해 지역패권주의, 정당내 패권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하나 현 정치구도는 아직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회창 총재는 그 구도에 몰입돼 있다.” (2001/03/14, 한나라당의 이회창 체제를 비판하며)
“국민이 다 아는 것을 말 두어마디로 속일 수 없다. 김대중 총재가 불공정한 심판에 의해 대선에 낙선했는지 아니면 지역대결구도의 덫에 걸려 낙선했는지 솔직히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1995/10/14, 민자당 대변인 시절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세 번 나왔지만 한 번도 공정한 심판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을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