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정재계 인사들이 11일 프랑스 덩케르크에 위치한 베르코어 공장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베르코어 유튜브 영상 갈무리>
유럽은 한국과 중국 등에 배터리 공급망을 크게 의존하고 있어 이를 벗어나려 시도하지만 이미 파산한 노스볼트의 전철을 다시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21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프랑스 스타트업 베르코어가 첫 공장을 개소하면서 유럽의 배터리 자급 목표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베르코어는 11일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에 연산 16기가와트시(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 준공식을 열었다. 이 공장을 베르코어는 2030년까지 50기가와트시 규모로 증설하려 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베르코어를 비롯한 배터리 제조업 육성에 정책적 지원 의지를 보이면서 적극적으로 힘을 실었는데 마침내 공장이 문을 연 것이다.
베르코어 공장을 두고 ‘배터리 벨트’를 구축하는 프랑스 산업 정책의 주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라고 파이낸셜타임스는 꼽았다. ACC와 AESC 및 프롤로지움 등 다른 배터리 기업도 덩케르크에 제조 설비를 뒀다.
현지매체 유락티브는 “제조업 재건을 앞세운 프랑스의 재산업화 정책에 배터리 육성은 핵심”이라며 “앞으로 3년 동안 프랑스 북부에 여러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유럽연합(EU)은 16일 배터리 자체 공급망을 재구축하기 위해 18억 유로(약 3조12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마련해서 제조사에 무이자 대출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EU는 자동차 제조사가 의무적으로 부품의 70% 이상을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 정책도 고려 중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전했다.
EU가 노스볼트의 파산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한국 공급망 의존을 벗어나 여전히 배터리 자급 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스웨덴의 유망 기업 노스볼트는 지난해 11월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이에 베르코어는 유럽의 전기차 배터리 자급 체제 구축에 불씨를 살릴지 주목을 받는다.
베르코어는 프랑스 완성차 업체인 르노를 고객사로 이미 확보해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 진출에 발판을 마련했다. 르노는 베르코어에 직접 자금도 투자했다.
베르코어가 시장에 안정적으로 자리하면 현지에 공장을 둔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및 SK온 등 한국 배터리 3사에 위협이 될 수 있다.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2024년 5월14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연 연례 투자 유치 행사에 참석해 브누아 르마이냥 베르코어 설립자 겸 최고경영자(CEO)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베르코어 X 사진 갈무리>
다만 베르코어는 노스볼트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모양새라 또 다른 실패한 사례로 남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2020년에 설립한 베르코어 역시 아직 상용화 경험이 부족하다. 노스볼트도 기술과 경험 부족으로 배터리 양산에 실패했다.
일단 베르코어는 지난해 말 기준 830명의 임직원을 두고 공장에도 20억 유로(약 3조4600억 원)의 투자를 받아 당장 노스볼트처럼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베르코어가 르노라는 사실상 단일 고객사에 재원과 고객사 기반을 모두 의존한다는 점은 중대한 약점이 될 수 있다.
르노는 베르코어가 납품할 배터리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A390 정도의 소수 차종에만 탑재할 예정이다. 르노는 LG에너지솔루션과 중국 CATL에게도 배터리를 공급받는다.
앞서 노스볼트는 BMW와 폴크스바겐 등 굵직한 업체 다수로부터 투자를 받고 배터리를 납품했음에도 결국 파산에 내몰렸다. 그런데 베르코어는 이제 겨우 르노 한 곳에서 주문을 받았을 뿐이다.
더구나 베르코어가 프랑스 정부와 유럽투자은행 등 외부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노스볼트를 떠올리게 만드는 요소라 볼 수 있다.
노스볼트는 EU로부터 지원을 과하게 받다가 자생력을 키우지 못했는데 베르코어도 정책자금에만 의존하면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세바스티앙 마르탱 프랑스 산업부 장관은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유럽의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현지 부품 사용이 필수”라며 베르코어에 지원사격에 나섰다.
결국 노스볼트에 이어 베르코어마저 실패한다면 유럽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은 한국과 중국에 더욱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및 SK온 등 한국 배터리 제조사는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 공장을 운영하며 유럽을 ‘텃밭’으로 일궜는데 베르코어의 사례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에 따라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일부 자동차 제조사는 부품 의무화 방안이 전기차 전환을 늦출 수 있다고 우려한다”며 유럽의 배터리 육성 정책이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고 시사했다. 이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