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도쿄 시내의 한 거리. <비즈니스포스트> |
[도쿄(일본)=비즈니스포스트] 한국 퇴직연금 시장이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 방문한 일본. 일본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많은 분야에서 한국보다 10년 가량 선행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저출생 고령화와 연금 부문 개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 퇴직연금 시장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역으로 한국 퇴직연금 시장의 장점도 깨닫는 기회가 됐다.
무엇보다 한국의 연금제도는 일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간결하고 정리가 잘 돼 있다.
일본 연금제도는 매우 복잡하다. 일본은 공적연금 체계부터 한국과 달리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국민연금(기초연금)이 1층, 후생연금이 2층을 이룬다.
그 위로 사적연금인 퇴직연금과 개인형 퇴직연금인 이데코(iDeCo, 한국의 IRP 개념) 등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여기에 여러 복잡한 연금 형태들이 공존해 일본 사람들도 많이들 헷갈려 한다.
가령 퇴직연금 가운데 ‘후생연금기금’이라는 것이 있는데 일본에서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이 도입되기 전까지 유사한 역할을 하던 연금이다. 공적연금 체계의 ‘후생연금’과 혼동하기 쉽다.
자영업자들이 자발적으로 가입할 수 있는 DB형 사적연금인 ‘국민연금기금’이라는 것도 있어 공적연금의 ‘국민연금’과 구분하기 힘들게 만든다.
▲ 2022년 기준 일본 연금체계의 도식. 일본에서는 1층의 국민연금과 2층의 후생연금을 합쳐 공적연금이라 부른다. 나머지는 사적연금이다. <후생노동성> |
일본 연금체계가 이처럼 복잡해진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일본 최초의 연금은 메이지 시기 태평양 전쟁 등을 치를 때 군인을 위해 도입한 연금이다. 이후 공무원 연금, 회사원 연금, 교사 연금 등이 직역별로 각자 따로 도입됐다. 심지어는 ‘선원(뱃사람)’ 연금도 존재했다.
그동안 일본 연금체계 개혁의 핵심은 이처럼 난립하던 개별 연금을 1층의 ‘국민연금’으로 한 데 통합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만 2층 ‘후생연금’이 남은 이유는 후생연금이 공무원과 일반 회사원을 대상으로 하는 최대의 직역연금이어서 통합 과정에서 형평성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일본 연금 전문가들도 일본의 연금체계가 복잡하다고 입을 모았다. 복잡한 체계는 국민의 연금 관심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며 추가적 통합 과정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전문가 몇몇은 한국의 연금체계가 간결하다고 평가하며 ‘어쩜 그리 깔끔하냐’고 되묻기도 했다.
한국 퇴직연금의 또 다른 장점으로는 성 격차가 적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일본 퇴직연금 기사를 준비하며 만난 키누가사 토시유키 일본 WTW 퇴직 부문 대표. <비즈니스포스트> |
통상적으로는 연금에도 성별로 액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WTW(윌리스타워스왓슨)가 세계경제포럼과 공동으로 남녀 간 자산격차를 정량화해 개발한 ‘자산공평성지표’를 보면 한국은 0.86~0.90 밴드에 자리해 세계 1위 수준을 기록했다.
키누가사 토시유키(衣笠俊之) 일본 WTW 퇴직부문 대표는 “일본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금융교육을 받았던 이들은 주로 남자였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며 “그 결과가 이어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 퇴직금 상품의 수익률 비교공시에는 부러운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일본에선 경쟁을 싫어하는 문화와 금융사의 입김 등으로 아직까지 퇴직연금 수익률 비교공시가 없다.
그럼에도 한국 퇴직연금은 개선할 부분이 많은데 일본 현지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야지마 이타루(矢島格) 조부대학(上武大学)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의 여야 정치인들이 연금에서만큼은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장기적 안목으로 바라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WTW가 세계 39개국을 대상으로 퇴직연금 등을 포함해 조사한 '자산공평성지표'. 한국은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 WTW > |
이타루 교수에 따르면 연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최소 30년은 바라봐야하는 긴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정권이 자민당 체제로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어 일본의 연금체제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타루 교수는 “한국 정치는 매우 역동적이어서 몇 년 만에 정권이 뒤바뀌곤 하는데 그것은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이지만 한편으론 연금의 안정성에 있어서는 역효과일 수 있다”며 “지난 정권의 정책들을 엎어버리는 사례들이 왕왕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 퇴직연금 시장의 긍정적 흐름 중 하나를 꼽으라면 젊은 세대가 투자형자산을 늘리는 것을 들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처럼 일본 젊은 세대가 투자에 관심이 높아진 가장 큰 이유를 닛케이지수의 고공행진에서 찾는다.
반대로 말하면 코스피지수가 지금처럼 3천 선을 넘보지도 못하는 등 부진이 이어진다면 한국 젊은 세대의 투자에 대한 관심은 물론 퇴직연금 자산의 효율성도 높이기 힘들다는 뜻일 수 있다.
▲ 야지마 이타루 조부대학 경영학과 교수는 "정쟁은 민주국가에서 당연한 것이지만 연금제도에서 만큼은 한국 정치인들이 합의를 바탕으로 오래 지속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
그러나 일본 전문가들은 그런 우려는 기우에 그친다고 말했다.
콘도 토모야(近藤智也) 다이와종합연구소 정책조사부장 수석연구원은 “일본 젊은이들이 금융투자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작년 닛케이지수 급등이 있기 이미 한참 전 일이다”며 “젊은 세대가 제일 좋아하는 주식은 일본 국내가 아닌 미국주식”이라 말했다.
닛케이지수가 급등한 지금도 여전히 일본 젊은 세대들은 미국주식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한다. 한국 역시 해외 주식투자가 가능한 만큼 코스피가 힘을 쓰지 못하더라도 젊은 세대의 퇴직연금 비원리금상품 활성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퇴직연금 등 연금에 대한 홍보를 더욱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나왔다.
인터뷰했던 한 전문가는 “일본에선 매년 11월30일을 연금의 날로 정하고 대대적으로 연금에 대해 알린다”며 “한국 정부도 이같이 적극적 홍보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일주일 동안 도쿄에서 직접 둘러본 일본 퇴직연금 시장은 배울 점도 반면교사 삼을 점도 많은 곳이었다. 동시에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보다 나은 퇴직연금 구축을 위한 치열한 고민이 진행 중이었다. 김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