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김동호 부산영화제 조직위원장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김동호는 1937년 8월6일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자로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문화공보부 요직을 두루 거친 뒤 문화부 차관까지 올랐다.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원년멤버다. 한 해의 3분의 1을 부산에 머물 정도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열정을 쏟아 부으며 15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다이빙벨’ 상영을 두고 부산시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부가 갈라서면서 부산국제영화제의 개최마저 불투명해지자 김동호는 다시 부산국제영화제에 복귀해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은퇴를 선언한 지 6년 만이다.

영화에 관심이 많아 만 73세가 되던 해 단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여전히 영화감독으로서 꿈을 놓지 않으며 장편영화를 찍겠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김동호가 원년부터 함께해온 부산국제영화제는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인 영화제 중 하나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도약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김동호의 열정과 헌신이 손꼽힌다.

1년의 반은 해외에, 3분의 1은 부산에 머무는 그가 가족을 위해 한 일은 부인을 깨우기 위한 모닝콜뿐이라고 전해진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엄청난 열정을 쏟은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김동호를 두고 “어쭙잖은 관리가 낙하산 타고 떨어진 줄 알았는데 그는 오로지 열정과 헌신으로 까다로운 우리 영화인들을 감동시켰다”, 이창동 감독은 “세계의 어떤 영화제위원장을 놓고 봐도 헌신에서 유례가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중국의 왕가위 감독도 김동호를 “그를 알고 지낸 세월 동안 김동호는 한 살도 더 나이 들지 않은 듯 보인다. 마치 위대한 소나무처럼”이라고 찬사했다.

김동호는 15년 동안 단 한번의 잡음도 없이 부산국제영화제 집행부를 효율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포동을 중심으로 개최된 1~6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기라면 해운대로 무게중심을 옮긴 7~15회 부산국제영화제는 2기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4천 석 규모의 야외극장과 1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4개 상영관을 갖춘 ‘영화의 전당’이 개관한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는 3기에 속한다. 2011년 ‘부산’의 영문 표기가 Pusan→Busan으로 변경되어 영화제 약칭도 ‘PIFF’에서 ‘BIFF’로 바뀌었다.

김동호의 후임으로 이용관 중앙대학교 공연영상창작학부 교수가 선임됐다. 이 교수는 2010년까지 4년 동안 김동호와 공동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호흡이 잘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 전 장관이 행정고시에 합격해 1979년 문공부에 사무관으로 들어갔을 당시 상사가 김동호였다. 김동호가 국회에 갈 때마다 유 전 장관만 대동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정부 하에서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 김동호는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는 생각으로 전국의 예술인을 만났다. 그 뒤 박 대통령에게 ‘문화가 있는 날’ 행사를 건의했다.

문화가 있는 날 행사는 매달 마지막 수요일마다 영화·공연·전시·스포츠 표값을 할인받거나 무료로 즐길 수 있게 해 국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늘리자는 취지의 행사로 2013년 시행된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계 안팎에서 김동호를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대를 졸업한 공무원 출신으로 정견이나 세대가 다른 사람들과도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포용하며, 겸허하고 소탈한 자세로 성실히 직무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김동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진행할 때 정부의 간섭을 막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썼다. 영화제 출품작도 규정상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받아야 했던 1996년 김동호는 “영화 프린트가 늦게 들어온다”는 이유를 대며 심사위원을 부산의 여관방에 모아 ‘느슨하게’ 영화를 심의하도록 유도했다.

심의규정을 위반한 영화를 두고 김동호는 본인이 책임지겠다며 상영을 강행했다. 덕분에 제 3회 부산국제영화제부터 영화제출품작은 심의에서 제외한다는 예외조항까지 생겼다. 심의에 맞춰 편집된 영화만 봐야했던 관객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열광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61년 문화공보부의 문화부 국장을 시작으로 보도국 국장, 공보국 국장, 국제교류국 국장과 기획관리실 실장 등을 두루 지냈다.

19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임명됐다.

1992년 예술의전당 초대사장으로 취임한 지 2개월 만에문화부 차관에 올랐다.

1993년 공연윤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1995년 동신대학교 무대예술과에서 1년여 동안 객원교수를 지냈다. 마이티브이방송의 사장에 취임해 1998년까지 방송국을 운영했다.

1996년 아시아영화진흥기구 부위원장,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아 2010년까지 15년 동안 활약했다.

1996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가 되어 2002년까지 교편을 잡았다.

1997년 제26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제7회 후쿠오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하와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싱가포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다.

1998년 인도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제4회 강원동계아시아경기대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9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문화예술분과위원회 위원장을 2006년까지 지냈다.

2000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연구교수로 4년 동안 일했다.

2002년 인도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제28회 시애틀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이 됐다.

2004년 소치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제5회 라스팔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에 위촉됐고 2011년까지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회 부위원장으로 2년 동안 활동했다.

2006년 동서대학교 디지털영상매스컴학부 객원교수로 교단에 섰고 사라예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도쿄 필름엑스영화제 심사위원장, 예레반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다.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 홍보대사을 역임했으며 2010년까지 국제영화제작자연맹 이사를 지냈다.

2007년 제1회 아시아태평양 스크린어워드 심사위원을 수행했다.

2008년 베오그라드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외교통상부 문화외교 자문위원을 맡았다.

2009년 제11회 서울 국제청소년 영화제 지도자문위원, 오키나와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2010년 아시아영화진흥기구 고문을 지냈다.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 심사위원,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명예 집행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이 밖에 제20회 후쿠오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타르코프스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오키나와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브라티슬라바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타히티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타이페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아시아태평양 스크린어워드 홍보대사를 맡았다.

2011년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한국영화동반성장협의회 회장,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심사위원장, 제3대 강원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2012년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원장이 됐다.

2013년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에 올라 2015년까지 일했다.

2015년 제1대 동대문 미래창조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조직위원장으로 다시 선임됐고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 제10회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드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 학력

1953년 경기중학교를 졸업했다.

195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2004년 동서대학교에서 영화예술학으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 상훈

1963년 근정포장을 받았다.

1977년 홍조근정훈장을, 1993년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1999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2000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기사장을 받았다.

2000년 제1회 부산문화대상을 수상했다.

2001년 대한민국 국회과학기술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5년 제7회 시네마닐라 영화제 평생공로상, 제4회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06년 프랑스 도빌시훈장, 프랑스 파리시훈장을 받았다.

2007년 유네스코 펠리니상, 제30회 황금촬영상 특별상, 제3회 앙드레김 베스트스타어워드 특별상,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받았다.

2008년 아시아그라프 공로상, 닐슨임팩트어워드를 수상했다.

2009년 한불문화상을 받고 유네스코서울협회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2010년 일맥문화대상과 자랑스러운 영화인상, 제23회 도쿄 국제영화제 우정상, 제13회 디렉터스컷 시상식 공로상을 받았다.

2011년 제2회 올해의 영화상 영화인상, 제5회 아시안 필름어워드 공로상, 제12회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공로상을 받았다.

2013년 제15회 우디네 극동영화제 평생공로상, 제28회 코리아 베스트드레서 스완어워드 문화부문을 수상했다.

2014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레지옹도뇌르를 받았다. 레지옹도뇌르는 문화, 종교, 학술,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공적을 쌓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프랑스 최고 영예의 훈장이다.

◆ 상훈

1963년 근정포장을 받았다.

1977년 홍조근정훈장을, 1993년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1999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2000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기사장을 받았다.

2000년 제1회 부산문화대상을 수상했다.

2001년 대한민국 국회과학기술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5년 제7회 시네마닐라 영화제 평생공로상, 제4회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06년 프랑스 도빌시훈장, 프랑스 파리시훈장을 받았다.

2007년 유네스코 펠리니상, 제30회 황금촬영상 특별상, 제3회 앙드레김 베스트스타어워드 특별상,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받았다.

2008년 아시아그라프 공로상, 닐슨임팩트어워드를 수상했다.

2009년 한불문화상을 받고 유네스코서울협회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2010년 일맥문화대상과 자랑스러운 영화인상, 제23회 도쿄 국제영화제 우정상, 제13회 디렉터스컷 시상식 공로상을 받았다.

2011년 제2회 올해의 영화상 영화인상, 제5회 아시안 필름어워드 공로상, 제12회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공로상을 받았다.

2013년 제15회 우디네 극동영화제 평생공로상, 제28회 코리아 베스트드레서 스완어워드 문화부문을 수상했다.

2014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레지옹도뇌르를 받았다. 레지옹도뇌르는 문화, 종교, 학술,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공적을 쌓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프랑스 최고 영예의 훈장이다.

어록


“부산국제영화제가 ‘다이빙벨’을 상영해서 부산시가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을 물러나게 한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에 정치적 외압이 들어왔지만 항상 대화로 해결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사태는 부산시가 ‘오버’했다. 내가 집행위원장이라도 다이빙벨을 당연히 틀라고 했을 거다. 다이빙벨은 한쪽 의견에 치우친 편향적 다큐다. 하지만 어느 편에 서 있든 간에 다큐로서의 가치는 있다고 본다. 영화를 선정하고 상영하는 건 프로그래머와 집행위원장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조직위원장으로서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하겠다. 지원은 받되, 간섭은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 가야 한다.”

“문화융성위원장을 맡으면서 정부와 부산국제영화제의 갈등을 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부산시가 감사 결과를 근거로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의 사표를 받겠다고 할 때도 반대했다. 하지만 부산시 입장이 워낙 강경했다. 부산시가 ‘김동호 조직위원장’ 카드를 처음에 탐탁지 않아 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이용관 전 위원장은 영화제가 열리지 않더라도 정관개정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난 영화제를 개최하는 게 우선이라고 본다. 정관에 독립성·자율성을 넣는다 해도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다. 표현의 자유를 헌법에 보장해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정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이 중요하지 정관이 중요한 게 아니다.” (2016/05/26,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어떻게든 부산영화제를 열어야 한다는 생각해 조직위원장 제안을 수락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제의를 받고 걱정이 많았지만 영화제 개최를 다섯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까지 파행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기 힘들었다. 그동안 부산시장이 당연직으로 맡아오던 조직위원장을 처음 민간에게 넘기는 것이니, 그야말로 영화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실현하는 첫 단계가 될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정관을 개정해서 영화제의 독립성과 자율성, 표현의 자유를 지키겠다. 조직위원장인 내가 정관개정을 주도하는 만큼 절대 영화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2016/05/13, 칸국제영화제에서 한 매체와 인터뷰하며)

“문화의 날 행사가 있는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는 기업도 정시 혹은 조기 퇴근을 허락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도록 배려했으면 한다. 제대로 정착되면 앞으론 매주 수요일마다 문화가 있는 날이 되지 않을까. 직원이 공연을 보고 티켓을 회사에 내면 관람료의 절반을 돌려주는 식으로 우리 기업도 동참하면 기업 이미지가 제고되고 직원 사기도 높아진다. 또 정상가에 관람하는 관객이 늘어 문화예술단체에 간접적으로 후원 효과가 생긴다.” (2015/03/04,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3대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건 한국 영화 100년의 한을 풀어 준 획기적인 쾌거다. 한국 영화계가 김기덕 감독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 베네치아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탄 뒤 일본의 여러 작품이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요 상을 받은 덕에 50~60년대 일본 영화의 황금기가 도래했다. 한국영화가 침체기를 거쳐 다시 활성화되며 한 단계 더 도약시키는 전기가 되리라고 본다.” (2012/09/09,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뒤 한 매체와 전화인터뷰에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영화제를 다녀왔고 다니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게 1996년 칸국제영화제에 갔을 때다. 레드카펫을 밟고, 상영 후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고, GV에서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감독들이 무척 부럽더라. 훗날 감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연출로 17년 만에 꿈을 이루는 거다.”

“스태프와 배우가 A급이다. 한국 영화 전체가 공동으로 연기하고, 공동으로 연출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2012/06/13, 단편영화의 감독으로 데뷔하며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인생길에서 계획대로 되는 건 거의 없다. 그때그때 맞이하는 계기가 행로를 바꾼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이 급선무라 채용공고가 뜨는 순서대로 시험을 쳤다. 첫 번째로 난 채용공고가 문화공보부였다. 내심 한국은행에 가고 싶었는데.”

“영화는 늘 그렇게, 우연히 만나는 선물이었다. 어떻게 떠나겠는가.” (2010/10/20,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적이 없다’는 평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 극단적이지 않은 것, 화합을 전제로 하는 중용에 치중한다. 장점이면서 단점일 수도 있는 부분이다.”

“영화의 저변은 역시 단편영화, 다큐멘터리, 저예산독립영화다. 소규모 예산이 들지만 아주 중요한 영화를 제작하는 데 정부가 지원하고 전용상용관을 확대해줘야 한다. 3D영화로 할리우드와 경쟁하는 건 사실상 어려운 일 아닌가? 콘텐츠와 시나리오 개발에 더 많은 노력을 집중해야 좋은 영화가 만들어진다.” (2010/10/05,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부산영화제를 창설하고 발전시키는 데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를 마지막으로 집행위원장을 사퇴한다.” (2010/09/08,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앞두고 사퇴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동호가 그동안 찍은 세계영화인 사진을 모은 사진전 ‘열정-김동호와 Friends’도 열렸다.)

◆ 사건/ 사고

박근혜 정부에서 ‘올드보이의 귀환’이 인사의 키워드로 등장했다. ‘신386’이란 신조어까지 나왔다. 1930년대에 태어나 1960년대에 사회활동을 시작하고, 80세를 바라보는 이들이 국정의 중추에 자리하면서 일컬어진 것이다. 이 가운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김동호도 언급됐다.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이빙벨’을 두고 정부와 영화인의 대립이 격화됐다.

세월호 참사를 그린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을 두고 영화제 조직위원장이자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서병수 부산시장이 “상영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중앙정부도 국고 지원 중단 등을 거론하며 상영을 막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부는 “부산국제영화제는 외압 때문에 영화 상영을 취소한 사례가 없다”며 다이빙벨을 예정대로 상영했다.

2015년 2월 부산시는 감사원을 통해 부산국제영화제를 감사한다. 그리고 12월 부산시는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검찰에 고발하기에 이른다.

정부와 부산국제영화제 측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이 둘은 그동안 합께 협력했던 사업마저 쪼개서 진행했다. 바로 칸국제영화제 현장에서다.

2015년 5월18일 영화진흥위원회는 ‘한국영화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열어 500여 명의 손님을 맞은 반면 부산국제영화제는 같은 날 ‘비프(BIFF) 런천 앳 칸’ 행사를 열어 진행했다. 이 행사는 영화진흥위원회와 부산국제영화제가 7년 동안 함께 치러 온 행사였다.

영화진흥위원회와 부산국제영화제 측은 행사를 따로 연 것을 두고 상대편을 탓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부산국제영화제가 행사를 따로 열겠다는 답변을 남겼다고 주장한 반면 부산국제영화제 관계자는 “행사가 개최되기 직전에 공동개최를 물은 것도 이상하고 부산국제영화제 지원금을 삭감한 상황에서 도저히 힘께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양쪽의 신경전은 영화진흥위원회가 2015년 4월 부산영화제 지원예산을 2014년 14억6000만 원에서 8억 원으로 40%나 사전협의 없이 한꺼번에 삭감한 게 원인이다. 이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서병수 부산시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 다이빙벨을 상영을 강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영화 상영 뒤 부산시는 부산영화제에 대한 감사를 실시해 직원 채용과 예산 운용 등 19개 지적사항을 언론에 일방적으로 공표했으며,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사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이 전 위원장은 2014년 11월 부산국제영화제 관련 한 업체를 허위 중개업체로 내세워 협찬 중개수수료 명목으로 2750만 원을 해당업체에 지급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부와 부산국제영화제의 갈등이 봉합되지 않으면서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이 물러났고 2016년 2월 부산시는 이용관 전 위원장의 재선임이 불가함을 공표하며 서병수 시장은 그동안 시장의 당연직이었던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민간에 넘기기로 한다.

이에 올해 4월 영화인단체 9개 조직이 모여 민들어진 ‘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가 부산국제영화제 참가를 전면거부하는 보이콧을 벌인다.

부산시는 배우 안성기씨를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으로 선임하며 사태를 봉합하려 했으나 안성기씨가 스스로 거부했다. 그러자 부산시는 김동호에게 조직위원장직을 제안했고 김동호는 배우 강수연씨에게 집행위원장직을 맡겼다. 김동호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난 지 6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용관 전 위원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동호가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을 수락한 것에 섭섭함을 표하기도 했다.

김동호는 본인의 주도 하에 내년 2월까지 부산국제영화제의 정관을 개정하기로 했다.

◆ 평가

김동호가 원년부터 함께해온 부산국제영화제는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인 영화제 중 하나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도약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김동호의 열정과 헌신이 손꼽힌다.

1년의 반은 해외에, 3분의 1은 부산에 머무는 그가 가족을 위해 한 일은 부인을 깨우기 위한 모닝콜뿐이라고 전해진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엄청난 열정을 쏟은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김동호를 두고 “어쭙잖은 관리가 낙하산 타고 떨어진 줄 알았는데 그는 오로지 열정과 헌신으로 까다로운 우리 영화인들을 감동시켰다”, 이창동 감독은 “세계의 어떤 영화제위원장을 놓고 봐도 헌신에서 유례가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중국의 왕가위 감독도 김동호를 “그를 알고 지낸 세월 동안 김동호는 한 살도 더 나이 들지 않은 듯 보인다. 마치 위대한 소나무처럼”이라고 찬사했다.

김동호는 15년 동안 단 한번의 잡음도 없이 부산국제영화제 집행부를 효율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포동을 중심으로 개최된 1~6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기라면 해운대로 무게중심을 옮긴 7~15회 부산국제영화제는 2기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4천 석 규모의 야외극장과 1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4개 상영관을 갖춘 ‘영화의 전당’이 개관한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는 3기에 속한다. 2011년 ‘부산’의 영문 표기가 Pusan→Busan으로 변경되어 영화제 약칭도 ‘PIFF’에서 ‘BIFF’로 바뀌었다.

김동호의 후임으로 이용관 중앙대학교 공연영상창작학부 교수가 선임됐다. 이 교수는 2010년까지 4년 동안 김동호와 공동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호흡이 잘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 전 장관이 행정고시에 합격해 1979년 문공부에 사무관으로 들어갔을 당시 상사가 김동호였다. 김동호가 국회에 갈 때마다 유 전 장관만 대동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정부 하에서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 김동호는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는 생각으로 전국의 예술인을 만났다. 그 뒤 박 대통령에게 ‘문화가 있는 날’ 행사를 건의했다.

문화가 있는 날 행사는 매달 마지막 수요일마다 영화·공연·전시·스포츠 표값을 할인받거나 무료로 즐길 수 있게 해 국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늘리자는 취지의 행사로 2013년 시행된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계 안팎에서 김동호를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대를 졸업한 공무원 출신으로 정견이나 세대가 다른 사람들과도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포용하며, 겸허하고 소탈한 자세로 성실히 직무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김동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진행할 때 정부의 간섭을 막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썼다. 영화제 출품작도 규정상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받아야 했던 1996년 김동호는 “영화 프린트가 늦게 들어온다”는 이유를 대며 심사위원을 부산의 여관방에 모아 ‘느슨하게’ 영화를 심의하도록 유도했다.

심의규정을 위반한 영화를 두고 김동호는 본인이 책임지겠다며 상영을 강행했다. 덕분에 제 3회 부산국제영화제부터 영화제출품작은 심의에서 제외한다는 예외조항까지 생겼다. 심의에 맞춰 편집된 영화만 봐야했던 관객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열광했다.

◆ 기타

김동호는 한때 ‘술꾼’으로 명성을 날렸다. 일본의 한 유명 감독은 “평생 먹을 술을 하룻밤 동안 김동호와 마셨다”고 평했을 정도다.

그러나 김동호는 그 좋아하던 술을 일흔이 되던 해 하루아침에 끊었다. 건강을 위해서다.

김동호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아침운동을 빠뜨리지 않았다. 71년부터 새벽에 매일 테니스를 쳤고 하루 30, 40분은 뛰거나 걸었다고 한다.

부산국제영화제를 15년 동안 이끌면서 집은 서울에 있었지만 1년의 절반은 국외에, 국내에 머무는 시간 가운데 3분의 1은 부산에 있었다.

1964년 서예로 국전에 입선했다.

김동호는 영화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아시아에서 훌륭한 영화인을 길러내고자 2005년 아시아영화필름학교(AFA)를 만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10년을 맞던 때였다.

아시아영화필름학교는 참가자의 교육관련 장비와 숙박, 항공, 식사까지 무료로 제공한다. 아시아의 젊은 영화인이 넉넉한 형편일 리 없다는 생각에서다. 재능만 있다면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지원하려는 의도로 설립됐다. HD(고화질) 필름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동호는 부산국제영화제 관련 업무로 해외를 방문할 때면 항상 이코노미석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에게 쓸 예산을 아껴 더 많은 해외 영화인을 초청하기 위해서다. 동행자가 불편해 하면 차라리 뒷 비행기를 이용했다고 한다.

임권택 감독은 김동호가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 나온 것을 보고 본인도 출연하기로 결심했다. 임 감독이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자 배우 강수연씨도 나왔다.

김동호는 2012년 단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상영시간 15~20분 내외의 ‘주리’를 통해서다. 그의 나이 만73세였다. 영화제 심사위원으로서 경험, 해외 유명감독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주리’는 모든 제작진이 무임금으로 참여했다. 극중 심사위원 역은 배우 안성기씨 강수연씨 등이 맡았고 대표역은 일본 예술영화전용관 이미지포럼의 도미야마 가쓰가 맡았다. 이 밖에도 배우 박희본씨와 박정범 감독, 이채은씨가 출연했다.

‘만추’의 김태용 감독이 조감독을 맡았고 김형구 촬영감독과 방준석 음악감독, 강우석 감독이 편집 등을 맡았다. 제10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김동호는 박근혜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비상임직임에도 불구하고 2년여의 재임기간 동안 매일같이 출근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