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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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는 1935년 11월19일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효성그룹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의 장남이다.
일본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 미국에서 돌아와 기업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81년 경영권을 승계해 효성중공업 회장으로 취임했다.
2002년 5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태평양경제협의회 총회에서 회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이밖에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한일경제협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다.
2013년 12월 900억원대 횡령·배임과 1500억원대 세금 탈루를 주도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2010년 담낭암 말기 판정을 받아 절제수술을 받았다. 전립선암 증세와 심장 부정맥이 겹쳐 홀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알려졌다.
- 경영활동의 공과
- 비전과 과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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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신중함과 숫자까지 하나하나 챙기는 공학박사 출신다운 꼼꼼함.” 조석래 회장에 대한 재계의 평가다. 보수적인 명문가의 장남답게 신중하고 안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영인으로서 진퇴를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결단력도 지녔다. 이런 면모는 경영권을 물려받아 효성중공업 회장에 취임한 뒤 24개에 이르던 계열사들을 8개로 줄인 데서 확인된다.
1998년에도 주력계열사들을 합병하고 사업부문을 통합하는 등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수를 뒀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효성물산은 무리한 수출로 인해 1조 원대의 적자를 내는 등 파산위기를 맞았다.
효성그룹은 계열사 간 합병과 자산매각 등 자구노력을 통해 회사를 살려냈다. 효성물산은 부실기업이 공적자금을 받지 않고 자구노력으로 회생한 대표적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효성그룹은 효성물산이 낸 1조 원대의 부실을 10여 년에 걸쳐 나눠서 처리하는 방식으로 정리해나갔다. 2013년 5월 국세청이 이런 정황을 포착하고 특별세무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 회장 자신은 물론 장남 조현준 사장까지 검찰조사를 받았고 수천억원대의 회삿돈 횡령 및 배임, 세금포탈 등의 혐의가 드러났다.
변호인단을 통해 회사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항변하고 있으나 재판에서 이런 변명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지 현재로선 미지수다.
병든 노구를 이끌고 1주일에 한 차례씩 재판정에 출두하고 있다. 이와 함께 노후가 편치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자식들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입버릇처럼 “향후 경영권은 능력있는 자식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발언은 효성그룹의 경영권을 장자 승계방식을 따라 물려주지 않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조 회장 자신도 두 동생들인 조양래, 조욱래 회장과 함께 경영권을 사이좋게 나눠 물려받았다.
하지만 조 회장의 세 아들은 법정 소송은 물론 지분 매입경쟁 등으로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차남인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은 경영에 참여했으나 아버지 조석래 회장은 물론 다른 형제들과도 갈등을 빚은 끝에 2013년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조현문은 보유하고 있던 지분까지 모두 팔고 효성가와 사실상 연을 끊어버렸다. 그는 또 형인 조현준 사장과 동생인 조현상 부사장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 형제간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다.
장남 조현준과 3남 조현상도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두 아들이 각각 약 10%가 넘는 효성 지분을 보유하고 지분매입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조석래 회장 본인이 가진 약 10%의 지분에 따라 경영권 향배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나 아직 이와 관련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 사건사고
- 경력/학력/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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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1966년 미국에서 돌아와 기업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건설을 주도했으며 1973년 동양폴리에스터를 설립했다.
1975년 한영중공업을 인수해 효성중공업을 설립, 국산 산업기계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석유화학과 정보통신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981년 효성중공업 회장으로 취임하며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1983년 6월 24개에 이르던 계열사를 합병, 매각, 청산 등을 통해 8개로 정리했다. 섬유는 동양나이론(현 효성 섬유PG), 중공업은 효성중공업, 무역 부문은 효성물산을 중심으로 통합한 것이다.
1996년 6월 21세기위원회와 제2창업준비위원회를 발족한 데 이어 이듬해 전사 차원에서 혁신경영을 선포했다.
1997년 12월 효성그룹의 전 조직을 퍼포먼스그룹(PG) 체제로 바꾸고 책임 경영체제를 도입했다.
1998년 11월 효성T&C,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 효성물산 등 4개 주력계열사를 합병하고 비핵심 계열사 및 사업부문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효성은 국내 최초로 자체개발한 스판덱스 사업을 중국, 브라질, 터키, 베트남 등으로 확대해 2010년부터 세계 1위의 시장점유율을 달성했다.
자동차 보강재로 사용되는 타이어코드 사업도 전 세계 점유율 45%를 차지해 독보적인 시장 지배력을 확보했다.
2011년 국내 기업 최초로 '꿈의 신소재'라고 불리는 고강도 소재인 탄소섬유를 개발했다. 2013년 세계 최초로 친환경 고분자 신소재인 '폴리케톤'을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 학력
경기고 1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히비야 고등학교를 나와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와세다대학교 공학 명예박사, 2013년 미국 일리노이공과대학 공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아버지는 효성그룹 창업주인 고 조홍제 명예회장이다.
조 창업주는 경남 함안 대지주 집안출신이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삼성물산을 창업할 때 사업자금을 빌려주면서 동업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약 10년 뒤인 1962년 9월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효성물산을 차려 독자적으로 사업에 나섰다.
효성물산은 1962년 조선제분을 인수하고 1966년 나일론 원사 제조기업 동양나이론(주)을 설립해 1970년 한일나이론과 합병했다.
1977년 상호를 효성중공업으로 변경했으며 한국타이어와 대전피혁을 인수하는 등 그룹 외형을 키웠다.
조 창업주는 15살 때 진주 명문가 출신의 하정옥과 결혼해 장남 조석래를 포함 3남 2녀를 두었다.
조양래 한국타이어그룹 회장이 동생이다. 조양래는 홍긍식 전 변호사협회장의 딸인 홍문자 여사와 결혼해 2남2녀를 두었다.
조양래의 장남은 조현식 한국타이어 지주부문 사장이며 막내 아들 조현범 한국타이어부문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3녀 이수연과 결혼했다.
막내동생은 조욱래 DSDL(구 동성개발) 회장으로 김종대 전 농림부 장관의 딸인 김은주와 결혼했다.
조석래는 32세에 송인상 전 재무장관의 셋째 딸 송광자와 결혼해 슬하에 현준, 현문, 현상 3형제를 두었다.
큰 아들 조현준은 ㈜효성 사장으로 이희상 운산그룹 회장의 막내딸 이미경과 결혼했다.
둘째 아들 조현문은 ㈜효성 부사장을 지내다 국제변호사로 법무법인 현의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 조현문은 이부식 전 해운항만청장의 장녀 이여진과 결혼했다.
막내아들 조현상 ㈜효성 부사장은 행남자기 김용주 회장의 사촌이자 국내최대 특장차 제조업체인 ㈜광림의 김여송 대표의 딸인 비올리스트 김유영과 결혼했다.
◆ 상훈
2009년 매경이코노미 선정 올해의 CEO에 선정됐다.
1994년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1989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1976년 공장새마을운동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1974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2년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1년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 상훈
2009년 매경이코노미 선정 올해의 CEO에 선정됐다.
1994년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1989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1976년 공장새마을운동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1974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2년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1년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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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당시 기업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개인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2014/06/16, 서울중앙지법 첫 공판에서 변호인단을 통해)
“한·일 양국이 굳건한 경제협력관계를 이루기 위해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야 한다.”(2013/04/24,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경제인회의에서)
“화학사업도 국내를 벗어나 글로벌 회사들과 맞설 수 있는 수준으로 경쟁력
을 키워야 합니다. 당장 대책을 세우세요.”(2013/07/(주)효성 3분기 경영전략회의에서)
“아들들이 사업을 잘하면 주가가 그렇게 떨어지겠나.”(2013/04/25, 한일경제인회의 기자회견 직후 후계구도 관련 질문에 대해)
“강한 기업이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는 기업이 생존하는 겁니다.”(2013/01, 효성 신년사에서)
"옛날 일을 자꾸 들추어내면 사실 답이 없다. 우리 경제가 짧은 시간에 성장하다보니 그동안 부작용이 있었다. 시골에 옛날에 땅 좀 샀다고 나중에 총리가 못 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다 들추면 국민 중에 제대로 된 사람 없다."(2007/07/25, 제주 신라호텔 전경련 주최CEO 하계 포럼 '미래 한국비전과 차기 지도자에게 드리는 제언' 강연에서)
◆ 평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신중함과 숫자까지 하나하나 챙기는 공학박사 출신다운 꼼꼼함.” 조석래 회장에 대한 재계의 평가다. 보수적인 명문가의 장남답게 신중하고 안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영인으로서 진퇴를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결단력도 지녔다. 이런 면모는 경영권을 물려받아 효성중공업 회장에 취임한 뒤 24개에 이르던 계열사들을 8개로 줄인 데서 확인된다.
1998년에도 주력계열사들을 합병하고 사업부문을 통합하는 등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수를 뒀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효성물산은 무리한 수출로 인해 1조 원대의 적자를 내는 등 파산위기를 맞았다.
효성그룹은 계열사 간 합병과 자산매각 등 자구노력을 통해 회사를 살려냈다. 효성물산은 부실기업이 공적자금을 받지 않고 자구노력으로 회생한 대표적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효성그룹은 효성물산이 낸 1조 원대의 부실을 10여 년에 걸쳐 나눠서 처리하는 방식으로 정리해나갔다. 2013년 5월 국세청이 이런 정황을 포착하고 특별세무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 회장 자신은 물론 장남 조현준 사장까지 검찰조사를 받았고 수천억원대의 회삿돈 횡령 및 배임, 세금포탈 등의 혐의가 드러났다.
변호인단을 통해 회사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항변하고 있으나 재판에서 이런 변명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지 현재로선 미지수다.
병든 노구를 이끌고 1주일에 한 차례씩 재판정에 출두하고 있다. 이와 함께 노후가 편치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자식들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입버릇처럼 “향후 경영권은 능력있는 자식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발언은 효성그룹의 경영권을 장자 승계방식을 따라 물려주지 않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조 회장 자신도 두 동생들인 조양래, 조욱래 회장과 함께 경영권을 사이좋게 나눠 물려받았다.
하지만 조 회장의 세 아들은 법정 소송은 물론 지분 매입경쟁 등으로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차남인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은 경영에 참여했으나 아버지 조석래 회장은 물론 다른 형제들과도 갈등을 빚은 끝에 2013년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조현문은 보유하고 있던 지분까지 모두 팔고 효성가와 사실상 연을 끊어버렸다. 그는 또 형인 조현준 사장과 동생인 조현상 부사장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 형제간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다.
장남 조현준과 3남 조현상도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두 아들이 각각 약 10%가 넘는 효성 지분을 보유하고 지분매입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조석래 회장 본인이 가진 약 10%의 지분에 따라 경영권 향배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나 아직 이와 관련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 기타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했던 만큼 일본어와 영어실력이 출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어 실력이 뛰어나 3년 임기의 한일경제인회 회장직을 3번에 걸쳐 연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