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청각에서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태어났다. 안동 임청각 원경. <문화재청> |
[비즈니스포스트] 임청각 터의 동쪽 서쪽 북쪽은 가까운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넓게 트여 있어 멀리 떨어진 산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20여 리 밖에 솟아 오른 산들까지 시원하게 잘 보입니다.
이렇게 시야가 넓고 먼 산들이 보이는 명당에서 피어난 정기는 빨리 사라지지 않고 오래 유지됩니다. 그 정기가 불러오는 복덕 또한 오래 갑니다. 시야가 협소한 명당터의 정기는 빨리 쇠하는데, 협소하면 협소할수록 더 빨리 사그라듭니다.
임청각 사람들은 여기에 터를 잡은 뒤 400여 년 동안 특별한 복을 누렸습니다. 400년이나 복덕을 누린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한 자리에서 이처럼 긴 세월 큰 재복으로 풍족하게 살면서 많은 덕을 베풀어 대대로 널리 존경 받기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명당이라 해도 그 터의 기운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성하면 언젠가 쇠하기 마련입니다. 그 터의 빼어난 정기가 쇠하면, 복은 적게 들어오고, 화가 많이 미칩니다. 부호들은 재산을 잃고, 세도가들은 권세를 잃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부귀권세를 잃을 때는 흉한 일들을 당하고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인명이 상하거나 아주 불미스런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덕을 많이 쌓은 이들은 재산과 지위를 잃어도 명예를 지켜 아름다운 이름을 남깁니다. 경주 최부잣집 사람들, 구례 운조루 사람들, 보은 우당 고택 사람들, 강릉 선교장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임청각 사람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너무나 특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1858년 임청각에서 장차 가문을 이끌어야 할 종손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었습니다.
선생은 400년 동안 덕망을 쌓으며 명예를 지키고 복덕을 누려온 임청각의 종손으로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매우 유복한 환경 속에 성장하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문중과 집안 어른들의 총애와 촉망을 받으며 학업에 전념했습니다.
이황 선생의 학통을 이은 유학자 김흥락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학을 공부했고, 품성이 고매하고 의로워 신망 높은 유학자가 되었습니다.
나라에 큰 변고가 없고 시절이 옛날 같았다면, 선생도 선조들처럼 안락하게 살면서 도산서원 전교나 유향소 좌수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선생이 성인이 되자, 국운이 급속도로 기울며 나라가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강대한 열강 여러 나라들이 우리나라에서 각종 이권을 차지하려고 경쟁했습니다. 특히 일본은 노골적으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1895년 10월 고종 황후 민비가 일본 침략자들에 의해 살해 당하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또, 같은 해 12월에는 일본의 비호를 받던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안동지방 유생들은 일제 침략에 맞서는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을미사변 후 일어난 최초의 의병이었는데, 김흥락 선생이 바로 이 안동 의병의 지도자였습니다. 김흥락 선생은 의병장으로 추대받았으나, 상중이라 사양하고 대신 권세연 선생을 천거하여 권세연 선생이 의병장이 되었습니다. 권세연 선생은 이상룡 선생의 외삼촌이었습니다.
스승과 외숙이 의병 지도자였으니 이상룡 선생도 당연히 의병에 참여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선생은 남은 생애를 모두 구국 운동에 바쳤습니다.
1896년엔 가야산에 의병의 근거지를 만들었고, 1907년엔 협동학교를 설립했으며,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창립하여 유인식 선생 김동 삼선생 등과 애국 계몽운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뜻 있는 애국지사들이 곳곳에서 여러 구국 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이에 이런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할 때 역량이 극대화 되리라 생각한 안창호 선생이 발의하여 1907년에 거국적인 구국운동 단체인 신민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방방곡곡에서 구국운동을 이끄는 지도자급 애국지사들이 회원으로 참여했는데 1910년엔 회원 수가 8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상룡 선생도 신민회에 동참했습니다.
1910년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참담한 치욕의 해입니다. 나라를 잃자 신민회는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이 때 세운 독립전쟁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제의 마수가 미치지 않으며 국내 진입이 용이한 중국의 만주 지역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한다.
2 기지를 세울 토지를 구입한다.
3 여기로 애국 인사와 청년들이 이주하여 한민촌을 건설한다.
4 한민촌에 민단 조직을 만들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사관을 양성한다.
5 독립군을 창설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키고 여건이 조성되면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을 축출한다.
신민회는 후보지 선정을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실사단을 만주로 보냈습니다. 후보지는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10년 12월 30일에 이회영 이시영 선생의 6형제 가족 50여 명이 독립운동을 위해 첫번째로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뒤를 이어 1911년 2월에 이상룡 선생 가족이 선생의 처남인 김대락 선생 가족, 동지인 김동삼 선생 가족과 함께 삼원보로 이주했습니다.
선생은 만주로 떠나기 전에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고, 임청각을 제외한 전재산을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10대 부호로 알려졌던 이회영 선생 가족도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해 왔는데 이 분들이 가져온 자금으로 만주땅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고 활발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던 것입니다.
1911년 5월 이상룡 선생·이회영 선생·김동삼 선생 등의 애국지사들은 삼원보에서 동포들의 민단조직인 경학사를 결성하고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세웠습니다.
신흥강습소는 뒤에 신흥무관학교가 됩니다. 이 학교에서 양성한 독립군 인재가 3500여 명인데 이들은 여러 무장 독립운동 단체에서 주축이 되어 활동했습니다.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광복군 의열단 등의 일원이 되어 항일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유명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삼원보보다 안전하고 은밀한 활동이 가능한 통화현 합리하로 이전했고, 이상룡 선생이 1년 동안 교장직을 맡았습니다. 선생이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신흥강습소의 면모가 크게 새로워졌습니다.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합리하의 신흥강습소는 무엇보다 먼저 학교 터가 빼어난 명당이었다고 합니다. 알려진 바로는 합리하 강물이 거의 360도 휘감아 돌며 감싸주는 곳이었답니다. 강물이 외적을 막는 해자 같은 역할을 해 주니 천연 요새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곳처럼 강물이나 냇물이 휘감고 감싸주는 곳은 터의 정기가 흩어지는 것을 물이 잘 막아줍니다. 그래서 좋은 기운이 크게 모이고 많은 복이 들어옵니다.
또, 이런 데서 사는 사람들은 이웃 간에 다투지 않고 서로 위해주고 도와가며 화목하게 지냅니다. 상생 공존하는 공동체 정신이 투철합니다. 공동체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 서서 어려움에 맞섭니다. 신흥강습소 사람들 또한 그랬습니다.
이러한 공동체 정신, 인화 단결의 힘은 합니하에 학교를 세울 때부터 발휘되었습니다. 처음 학교를 세울 때 이곳 학교터는 나무가 무성한 숲이었습니다. 애국지사들과 교사인 교관, 학생들은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건물터를 닦았습니다. 또, 베어낸 나무와 흙으로 건물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자력으로 지은 건물이 18동이나 되었습니다.
독립을 위한 구국의 일념으로 일치 단결하여 함께 일하니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되기도 했습니다. 2012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7월 20일에 낙성식을 거행 했다고 합니다. 낙성식 참가자가 100여 명이었다는데 공사에 직접 참여해 일한 사람은 100명보다 훨씬 적었을 것입니다. 이 적은 인원이 몇 달 만에 엄청난 일을 해낸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회영 선생 형제들과 이상룡 선생 김동삼 선생 김대락 선생 등은 멸사봉공의 정신이 투철한 분들이었습니다.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의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니 젊은 애국지사 애국청년들도 기꺼이 최선을 다해 애썼던 것이며,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거뒀던 것입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