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상에서 엿보는 시대상, 군사독재부터 기후위기까지

▲ 차례상을 차리는 예법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정치 권력에 의해, 때로는 사회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하면서 사회상이 반영된 결과가 지금 우리의 차례상이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선시대 차례상과 오늘날 우리가 보는 차례상이 똑같을까? 언제부터 차례상은 즐거워야 할 명절에 부담과 불화의 상징이 된 것일까?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차례상 차림 규칙은 시대의 모습에 따라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구한말 때 차례상엔 부사 사과와 신고 배가 없었다. '홍동백서'는 군부독재 이후에야 일반화됐다. 2050년엔 기후변화로 사과와 배 대신 애플망고가 차례상에 오를 수도 있다. 

설을 맞이해 비즈니스포스트는 차례상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봤다.

◆ 군사정권의 필요와 대중의 욕구가 만나 만들어진 '홍동백서'의 전통

21일 설 연휴에도 각종 대중매체에서는 올해는 차례상 비용이 얼마 올랐다거나 명절 증후군, 가정불화 등 가슴이 무거워지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차례상을 부담이자 고생으로 만드는 주요 원인은 영원히 변하지 않아야 할 정해진 예법에 따라 음식을 차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대다수 가정에서는 여전히 차례상에 정해진 음식을 올려야 한다는 이유로 비싼 과일 여러 가지를 구하고 육전, 명태전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드는 등 고생스러운 명절맞이를 반복하고 있다.

성균관이나 한국국학진흥원 등에서는 매년 차례상은 간단하게 차리면 된다고 강조하고 있으나 차례상을 향한 대중의 인식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차례상 음식과 관련된 규칙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홍동백서(紅東白西).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조율이시(棗栗梨枾). 서쪽부터 대추, 밤, 배, 곶감을 둔다.

어동육서(魚東肉西)는 생선은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적접거중(炙楪居中)은 구이는 중앙에 올리라는 뜻이다.

두동미서(頭東尾西). 생선의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에 놔야 한다.

좌포우혜(左脯右醯)와 건좌습우(乾左濕右)는 각각 포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 마른 음식은 왼쪽, 젖은 음식은 오른쪽에 두라는 뜻이다. 
 
차례상에서 엿보는 시대상, 군사독재부터 기후위기까지

▲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16일 내놓은 설 차례 간소화 진설도. 떡국과 술잔에 나물, 구이, 김치를 놓고 과일 4가지 정도면 충분하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

이렇게 복잡한 규칙이 언제부터 존재한 것인지를 놓고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있다.

그러나 성균관이 매년 명절마다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분명 주요 예법 관련 문헌에는 이런 규칙이 거론된 바 없다.

대표적 제례문화 규범서인 주자가례를 봐도 제사음식은 간장 종지까지 포함해 19가지를 놓되 과일(果), 생선(魚) 등 대략적으로만 서술했다. 놓아야 하는 과일이 사과인지 배인지도 구체적 종류는 적시하지 않고 있다.

또한 주자가례에는 가가례(家家禮) 즉 집집마다 가례가 있다고 적혀 있다.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속담처럼 '가가례'는 과거 널리 통용되던 개념이었다.

그러면 '홍동백서'와 같은 규칙은 언제부터 일반화된 것일까?

대체로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인 1969년에 만들어진 가정의례준칙이 지금과 같은 차례상 규칙을 대중에게 널리 규범화한 계기로 여겨진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표현을 빌자면 당시 정치권력은 ‘현재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전통’으로 독재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독재정권의 시도는 1960년대 이후 고속성장으로 살림이 나아져 가정 내 각종 의례를 번듯하게 치르고픈 대중의 욕구와 맞아떨어졌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진 차례상’이다.
 
차례상에서 엿보는 시대상, 군사독재부터 기후위기까지

▲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9년 가정의례준칙 제정안에 서명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 구한말 이후 차례상에 오른 부사 사과와 신고 배, 요즘은 바나나도 올리는 집도 10%

차례상에 변화를 준 것은 정치권력에 따른 인위적 규범뿐만은 아니다.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과일, 생선 등의 종류가 바뀌면서 과거와는 모습이 달라지기도 했다.

특히 오늘날 대중이 흔하게 떠올릴 차례상 단골 과일인 사과, 배는 과거 조선시대 이전에 차례상에 올랐을 사과, 배와는 분명 다르다.

일본어로 '후지'라 불리는 부사(富士) 사과, 일본어로 '니타카'라 불리는 신고(新高) 배 등 대중적 과일 품종이 대체로 구한말 이후 들어온 일본 품종이기 때문이다.

사과의 경우, 한국의 재래 품종은 능금이다. 하지만 능금은 현재 멸종위기 품종이다. 국내 부사 사과의 유통 비중은 70% 수준으로 파악된다.

배 역시 국내에 유통되는 배의 절대다수는 신고 배이다. 근래 들어 일본 품종을 대체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으나 여전히 국산 신품종의 비중은 10%에 미치지 못한다.

차례상에 올릴 과일 종류를 놓고 여전히 일부에서는 바나나, 파인애플 등 수입 과일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따지고 보면 일본 품종인 사과, 배를 차례상에 올리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일일 수 있다.

실제로 수입 과일이 차례상에 오르는 일도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다.

농촌진흥청이 2018년 설에 내놓은 ‘설 명절 농식품 구매행태’ 조사결과를 보면 바나나(10.5%)는 사과(19.8%), 배(17.5%), 딸기(14.0%), 곶감(13.2%)에 이어 다섯 번째로 흔하게 쓰이는 제수용 과일이 됐다. 귤(9.5%), 단감(6.1%) 등이 바나나의 뒤를 이었다.
 
차례상에서 엿보는 시대상, 군사독재부터 기후위기까지

▲ 농촌진흥청 원예특작과학원이 2022년 4월 내놓은 과일 재배지 변동예측 가운데 2050년까지 감귤의 재배지 변화. 푸른색이 감귤의 재배적지이고 녹색이 재배가능지다. <원예특작과학원>

◆ 기후변화로 배 재배지 사라지는 한국, 2050년 차례상엔 애플망고 오를지도 

앞으로 차례상에 가장 큰 변화를 줄 요인으로는 기후변화도 꼽힌다.

국립원례특작과학원이 2022년 내놓은 연구결과에 따르면 기후변화에 따라 2050년에는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사과를 재배할 수 있으며 배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은 거의 남지 않게 된다.

대신 현재 국토의 9%에서만 재배할 수 있는 단감은 중부내륙 지방 전역에서 재배가 가능해지고 감귤은 강원도 해안 지역에서도 재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제주도에서는 애플망고, 올리브와 같은 아열대 작물 재배도 가능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도 지방마다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후변화에 따라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농수산물이 변할 때 차례상에 오를 음식의 종류도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차례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의 모습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차례상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날 나를 있게 해준 조상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조선 성리학의 거두인 율곡 이이도 약 450년 전인 1577년에 지은 ‘격몽요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제사는 사랑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을 뿐이다. 가난하면 가산의 있고 없음에 맞추어 할 것이요, 병이 있으면 근력을 헤아려 치르되, 재물과 힘이 미칠 수 있는 자는 스스로 마땅히 예법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