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정부가 중국 반도체 규제와 관련해 유럽 국가를 압박하는 상황을 두고 유럽연합(EU) 소속 국가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
[비즈니스포스트] 유럽연합(EU)에 소속된 주요 국가에서 미국의 압박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반도체 전쟁’이 유럽까지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기업도 영향권에 놓인 만큼 앞으로 미국과 유럽의 대립이 본격화되면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4일 블룸버그 등 외국언론 보도에 따르면 유럽연합 고위 관계자들은 이른 시일에 미국 정부와 무역 분야의 여러 현안을 두고 논의를 진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미국 상무부 관계자들은 12월 중 네덜란드를 방문해 수출 규제와 관련한 협의를 진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중국에 첨단 반도체장비 수출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이번 대화를 통해 양측이 입장 차이를 좁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바라봤다. 유럽연합 소속의 주요 국가들이 미국의 요구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등 핵심 산업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제외하겠다는 목표를 두고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을 겨냥한 제재에 동참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 기업뿐 아니라 네덜란드 반도체장비 전문기업 ASML 등 해외 기업에도 중국 수출 규제에 관련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 국가에서 미국의 이런 시도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고 유럽연합 차원에서도 미국을 공정무역 원칙 위반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는 방침을 내놓는 등 미국과 유럽의 대립이 본격화되고 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반도체 전쟁에 유럽도 점차 발을 들이고 있는 셈이다.
유럽연합은 이른 시일에 미국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지원법과 유사한 글로벌 반도체기업의 현지 투자 지원 정책을 확정해 발표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미국과 같이 현지에 반도체 자급체제를 구축하려는 목적으로 세계 주요 반도체기업의 공장 투자를 유도해 미국과 반도체공장 유치 경쟁에 나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이를 기회로 삼아 중국이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유럽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도 시도하고 있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의 국익을 해치고 있다”며 “유럽이 미국을 위해 중국시장을 포기하며 손해를 감수하는 일은 타당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글로벌타임스는 전 세계적으로 유럽 이외에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도 미국의 무리한 압박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며 주도하고 있는 반도체 전쟁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글로벌 반도체시장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큰 변수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기업도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유럽 등 지역으로 점차 퍼져나가고 있는 양상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미국과 중국이 모두 한국 반도체산업에 중요한 시장으로 꼽히는 데다 유럽이 미국 정부와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에 따라 미래 투자 계획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중국 우시에 위치한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법인. |
중국은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최대 수출국이자 주요 생산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기술과 주요 고객사, 반도체 장비 공급 능력도 반도체사업에 매우 중요하다.
네덜란드 ASML이 유일하게 공급하는 EUV(극자외선) 반도체장비 역시 파운드리 미세공정과 메모리반도체인 D램 기술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만약 미국이 중국에 이어 유럽까지 적으로 돌리게 된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수출 및 장비와 소재 공급망 확보, 미국의 투자 압박 등에 더욱 부담을 느끼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한편으로 미국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시도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된다면 한국도 자국의 이익을 고려해 미국의 중국 규제 등 요구를 거부하기 쉬워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글로벌타임스는 “네덜란드가 미국의 중국 압박 요청을 거부하는 선례를 남긴 일은 한국과 일본이 미국에 저항하는 데도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바라봤다.
미국이 지금과 같이 일방적으로 압박을 통해 동맹국을 설득하는 전략은 효과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해 한국 반도체기업을 향한 압박 수위도 낮출 수 있다는 의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 중국에서 운영하는 반도체공장에 첨단 장비를 반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미국 정부의 규제를 받고 있다.
유럽연합이 미국의 압박을 계기로 반도체 자급체제 확보에 더 속도를 낸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유럽에 반도체공장을 신설하며 대규모 지원금을 받게 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글로벌타임스는 만약 유럽이 중국 반도체 규제에 참여한다면 중국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반도체 장비 등 분야에서 기술력을 높여 한국 등 주변국을 도울 가능성도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압력을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기술력을 키우는 기회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미국과 중국, 유럽의 대립에 따른 글로벌 반도체시장의 지형 변화는 12월 열리는 미국 정부와 유럽연합 무역당국 고위 관계자들 사이 회의를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것으로 전망된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