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배터리로 '도시 광산'을 일구는 성일하이텍이 군산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성일하이텍 군산 공장. <성일하이텍> |
[비즈니스포스트] 군산 공단으로 가는 도로는 뻥 뚫려있었다. 저녁에는 퇴근길로 인산인해를 이루겠지 짐작했지만 택시기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몇 해 전만해도 공단 하늘은 태양광 공장이 내뿜는 수증기가 가득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창밖으로 본 하늘에서는 경제적 활력의 상징이었던 수증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불이 꺼져가는 도시. 70년을 군산에서 살았다는 기사는 고향 군산을 그렇게 불렀다.
대기업들이 떠난 도시에는 젊은이들이 사라졌다. 그의 아들도 서울로 떠나 사글세방에 산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해도 대접받는데 여기서는 정직원이 돼도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희망은 없을까. 역대 최대 기관 수요예측 경쟁률 2269.7:1을 기록한 미래희망의 기업으로 가는 상황이 맞는지 스스로 다시 물을 지경이 됐다.
성일하이텍은 어떤지 기사에게 물었다. “막내 동생이 거기서 일해”라고 기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룸미러에 비친 기사 얼굴에는 금새 화색이 돌았다. 성일하이텍이 군산에서 어떤 기대를 받고 있는지 짐작됐다.
◆ 폐배터리를 가득 품은 '도시의 광산'
전북 군산시 군산산단로에 위치한 성일하이텍 제2공장에서는 제조업의 체취가 가득했다.
화학제품, 쇳가루, 고무냄새가 섞인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비가 내린 뒤였지만 공장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가 건물 바깥에서도 느껴졌다.
폐배터리에서 원소를 '캐는' 원리는 간단하지만 많은 노하우가 필요하다. 폐배터리를 모아 분쇄하고 이를 습식제련 공장에서 고농축 용액으로 만든다. 이어 고농축 용액의 수분을 없애면 결이 고운 5대 원소 가루가 만들어진다.
성일하이텍의 표현대로 뭔가를 캐낸다고 하니 광산이 생각났다. 깊은 산에서 땅속을 파내려가는 광산이 아니라 도심을 휘저었던 폐배터리에서 원소를 캐내어 다시 도심의 전기차로 보내는 '도시의 광산'이 바로 여기였다.
실제로 본 폐배터리 크기는 다양했다. 양손에 충분히 쥘 만한 배터리부터 전기차에 쓰이는 대형 책상 상판을 여러 개 겹쳐 놓은 크기의 폐배터리도 있었다.
공장 밖 자루 안에 얌전히 담긴 폐배터리들은 공장직원들의 손에 이끌려 공장으로 들어갔다.
공장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 사무실과 연결된 유리 창문에서 작업 과정을 지켜봤다.
직원들은 배터리를 선별하려고 바삐 손을 움직였다. ‘토셀’처럼 알루미늄케이스로 둘러싸인 배터리는 케이스를 잘라 벗겨내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껍질과 본체로 분리된 폐배터리는 설비 속으로 얌전히 옮겨졌다. 수작업으로 선별과정을 거친 셀들은 파쇄기와 선별기에 들어간다.
방전과 해체과정을 거치면 열처리 과정을 거쳐 코발트, 니켈, 망간 등이 섞여있는 배터리 파우더 가루가 된다. 여기까지가 물리적 전처리 공정이다.
다음은 습식공정이다. 침출과 여과 과정을 거쳐 용매를 추출하는 것이다. 성일하이텍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폐배터리 습식제련 장치를 가지고 있다.
습식제련 방식은 건식제련 방식과 달리 리튬, 코발트, 니켈, 망간, 구리 등 버리는 원소없이 그대로 뽑아낼 수 있다.
습식공정에서 침출, 추출, 정제 과정을 거친 폐배터리는 분말로 변해 나온다. 이런 배터리 파우더는 주 제품인 황산코발트, 황산니켈, 탄산리튬, 황산망간, 전해니켈, 전해구리 등으로 최종 제품이 돼 다시 배터리를 제조하는 원료로 납품된다.
공장 밖을 나오자 바로 옆에는 새 건물처럼 보이는 파란 공장이 있었다. 전기차 팩 모듈·해체 전용을 담당하는 ‘R3’다. 1년에 약 1만4천 톤의 전기차를 해체한 뒤 배터리 파우더까지 만들어 내는 일괄공정라인이다.
R3를 짓는 이유는 앞으로 수요가 증가할 전기차 폐배터리를 처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많은 폐배터리를 처리하기 위한 대응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R3는 이제 공사가 거의 끝나 인허가와 추가설비 설치만 남아있다.
▲ 성일하이텍 직원들은 근속연수가 길고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사진은 보호장구를 착용한 채 작업중인 성일하이텍 직원. <성일하이텍> |
◆ 개개인에게 배어있는 자부심, 폐배터리는 “성일이 한다”
앞서 전화를 걸었을 때 회계팀에서 일한다는 한 여직원은 지역사투리가 강한 억양으로 말했다. “누가 폐배터리 사업을 하것냐고요. 우리가 하겠다는 거지. 시장상황이 안 좋아도 자신이 있으니 기업공개 하는 겁니다.”
인터뷰 도중 이강명 성일하이텍 대표는 회사의 자랑거리로 ‘인화’나 ‘단합’이라는 단어를 썼다. 회사 규모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을 때 가족 같이 끈끈한 분위기가 회사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힘이었다고 했다.
실제로도 초창기에 입사한 직원들은 대부분 아직도 회사를 다니고 있다.
회사에서 첫 번째로 출산휴가를 썼다는 여직원은 “회사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배려를 많이 해줬다”며 “내 뒤로 그런 여직원이 꽤 생겼다”고 말했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은 공장직원에게 직접 파스를 붙여주며 농담을 건넸고 파란색 작업모에 흰색 작업복을 입은 직원은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밝게 웃으며 일하는 모습이 마치 불이 꺼져가는 도시 군산에 새로운 불빛을 밝혀주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빨리 이 도시에 희망이 가득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까.
군산이라는 지역사회와 상생하려는 의지도 느껴졌다.
이 대표는 “꼭 수입을 해야 하는 원자재 빼고는 웬만한 것은 지역사회에서 사들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해외 계약이나 안전관련 인력 등 필요한 인재도 지역에서 계속 채용하고 있다고 했다.
군산은 한때 조선소와 자동차공장의 불빛이 밤을 밝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이렇다할 생산시설이 없다. 협력업체의 줄도산과 실업이 뒤를 이었고 소득이 줄자 지역 상권이 붕괴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산에서는 절망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희망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불이 꺼져가는 도시의 한 구석에서는 새로운 불빛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성일하이텍은 그 중에서도 밝게 빛나는 불빛이었다. 박소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