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일본 최고 부자다. 포브스가 발표한 ‘2014 세계 억만장자’에서 세계 42번째로 꼽혔다. 그의 재산은 우리 돈으로 20조 원이 넘는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재산 11조 원의 2배 가량 된다.
손정의 회장은 이건희 회장과 시작이 달랐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로부터 삼성그룹을 물려받았으나 손정의 회장은 무일푼으로 출발했다. 손 회장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탄광노동자로 일본에 건너갔고 대부분의 재일교포가 그렇듯 어렵게 살았다. 손 회장의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 후 생선행상으로 출발해 나중에 음식점과 파친코 가게를 운영했다.
빈민가 출신 재일교포 3세인 손 회장이 일본 최고부자가 된 여정은 극적이다. 그는 24살 소프트웨어 유통회사 소프트뱅크를 창업해 4년 만에 시장의 60%를 차지했다. 어느 잡지도 소프트뱅크 광고를 실어주지 않자 직접 잡지를 창간해 3년 만에 최다부수를 발행했다.
그는 2001년 초고속인터넷사업에 뛰어들었다. 매년 1조 원이 넘는 적자로 고전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사업을 계속해 4년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그 이듬해 소프트뱅크 시가총액은 20조 원을 돌파했고 손 회장은 일본 최고부자 자리에 올랐다.
손 회장이 재산을 일군 첫 번째 방식이 사업 도전이라면 두 번째 방법은 주식투자다. 손 회장은 ‘될 것 같은’ 기업을 알아보는 데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다. IT기술을 전혀 모르는 전직 영어교사가 시작한 전자상거래사업에 손 회장은 204억 원을 투자했다. 이 돈은 14년 후 3천 배로 불어났다.
◆ 분신자살도 불사하는 지독한 집념
손 회장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버클리대학교를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백수로 지내며 1년6개월 동안 시장조사한 끝에 앞으로 일본에 개인용 컴퓨터가 대중화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 1981년 소프트웨어 유통회사 ‘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
손 회장은 창업 뒤 일본 내 가맹점을 늘리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미국을 방문해 빌게이츠를 여러 번 만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독점 판매권을 따냈다. 소프트뱅크는 빠르게 성장했고 창업 4년 만에 소프트웨어 시장의 60%를 점유했다. 소프트뱅크는 1994년 기업을 공개했고 단숨에 2천억 엔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왔다. 끝없이 오를 것 같던 소프트뱅크의 주가는 2000년 3월 100분의 1 토막이 났다. 세계적으로 인터넷 거품이 꺼지던 시기였다. 70조 원이 넘던 손 회장의 재산도 1조 원 수준으로 급감했다. 소프트뱅크 주식 보유자들은 손 회장을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손 회장은 위기를 돌파할 방법으로 일본에 초고속인터넷을 도입했다. 이는 당시 일본 최대 IT기업인 NTT와 경쟁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회사 내부의 반대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손 회장은 곧바로 연구에 들어가 2001년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발표했다. 한 달 이용료는 기존 인터넷의 1/8 수준인 990엔으로 책정했다.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
손 회장이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봤다. 그래도 손 회장은 이렇게 외쳤다.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한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소프트뱅크는 곧 파산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이 사업은 성공한다.”
하지만 회선이 문제였다. 회선을 일본 전 지역에 새로 설치하기에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NTT의 인프라를 임대할 수밖에 없었다. 법에 따라 신규회사를 도와야 할 NTT는 경쟁자를 돕기 싫어했다. 손 회장은 정부 당국에 달려가 분신자살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총무성 당신들이 NTT에 똑바로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내 몸에 석유를 끼얹고 내 손으로 불을 지르겠소”라고 소리쳤다. 정부 당국자는 기겁해 NTT에 회선을 임대해주라고 지시했다. 손 회장은 가까스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
손 회장은 하루 18시간을 일에 매진했다. 손 회장은 “내가 누군가에게 3시에 보자고 말하면 그건 꼭 오후 3시가 아닐 수도 있었다”며 “새벽 3시에도 회의를 소집했고 필요하면 언제든 밤을 새웠다”고 술회했다. 사무실에 온통 직원들의 땀 냄새와 며칠 동안 목욕을 못한 손 회장의 시큼한 냄새가 가득했다.
이렇게 초고속 인터넷사업에 몰두했지만 매년 1천억 엔씩 적자가 났다. 하지만 손 회장은 야후 주식 등 자산을 다 내다팔면서 4년 동안 흔들림 없이 사업을 밀어 붙였다. 이 과정에서 10년 넘게 손 회장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재무책임자가 회사를 떠났다. 미래가 불확실한 초고속인터넷에 올인 하느라 회사 재무상태를 심각하게 만든 데 대한 반감이었다.
소프트뱅크의 초고속인터넷은 2005년 드디어 첫 흑자를 달성했다. 그 이듬해 소프트뱅크의 시가총액은 주가가 최저점을 찍었던 6년 전보다 10배 넘게 상승해 20조 원을 다시 돌파했다. 손 회장은 일본 최고부자 자리에 올라 화려하게 재기했다.
◆ 스타트업기업 투자로 3천배 투자이익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기업 알리바바는 최근 미국증시 상장을 위한 신청서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출했다. 알리바바가 상장할 경우 150억~200억 달러를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뉴욕타임즈와 월스트리트저널은 알리바바가 비자카드(197억 달러)를 제치고 미 증시 사상 가장 많은 자금을 끌어모을 것이라고 점쳤다.
이 상장으로 잭팟이 터질 사람은 알리바바CEO 마윈만이 아니다. 어쩌면 손 회장이 더 큰 '돈벼락'을 맞는다. 그는 알리바바 지분 34.4%를 보유하고 있다. 손 회장은 14년 전 알리바바의 지분을 2천만 달러에 샀다. 그리고 그 지분은 현재 578억 달러로 불어났다. 아직 알리바바의 상장 전인데도 3천 배의 수익이 예상된다.
파이낸셜타임즈와 블룸버그통신은 손 회장이 알리바바 미국증시 상장의 최대승자가 됐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알리바바가 기업을 공개하면 손 회장이 세계에서 가장 영리한 투자자 중 하나로 올라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 회장의 소프트뱅크는 투자를 원하는 기업을 초청해 아이디어를 듣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해왔다. 이 행사를 통해 손 회장은 2000년 알리바바의 마윈을 만났다. 마윈은 “중국 소상공인을 세계 모든 소비자와 연결하겠다”는 목표로 전자상거래기업 알리바바를 창업했다. 마윈과 손 회장이 만난 것은 알리바바 창업 1년 뒤였다.
마윈은 IT기술을 전혀 모르는 평범한 영어교사 출신이었다. 알리바바의 직원은 20여 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손 회장은 마윈의 브리핑을 들은 지 6분만에 투자결정을 내리고 알리바바의 최대주주가 됐다.
▲ 마윈(馬雲) 알리바바 CEO |
손 회장의 예언은 곧 현실이 되었다. 알리바바는 창업 7년 만에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기업으로 우뚝 섰다.
손 회장은 1995년 야후의 최대주주가 됐다. 야후는 손 회장이 투자할 만한 벤처기업을 찾던 중 발견한 신생회사였다. 야후의 검색엔진은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고 있었다. 손 회장은 야후에 관한 소식을 듣자마자 야후가 있는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당시 야후는 창업한 지 반 년밖에 안 된 상태였다. 직원도 15명에 불과했다. 매출 200만 달러에 적자가 100만 달러였다. 알리바바와 마찬가지로 미래가 불확실한 벤처기업이었다.
손 회장은 27살의 야후 CEO 제리 양을 만나 피자와 콜라를 먹으며 얘기를 들은 뒤 성공을 확신했다. 그는 1억5천만 달러를 투자해 야후 지분 35%를 확보했다. 야후재팬의 운영권도 따냈다.
미국은 당시 IT주식 거품으로 주식시장이 과열양상을 보이는 데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손 회장이 거액을 투자하자 미국 언론은 그를 ‘일본에서 온 마지막 거품남’이라고 조롱했다.
그런 조롱은 곧 무색해졌다. 제리 양은 학생에서 사업가로 변신에 성공했고 야후는 나스닥에 상장해 승승장구했다. 일본에 세운 야후재팬도 큰 인기를 끌어 설립 2년도 안 돼 기업을 공개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야후의 인기가 치솟은 덕분에 2000년 손 회장의 재산은 78조 원에 이르렀다. 비록 3일 동안이지만 손 회장이 빌게이츠의 재산을 넘기도 했다.
손 회장은 지금까지 1300여 IT기업에 투자했다. 손 회장은 이 많은 투자를 하면서 한번도 적대적 인수합병을 한 적이 없다. 손 회장은 알리바바 지분 34.4%를 보유하고 있지만 경영에 간섭하지 않고 고문 역할만 해 왔다. 야후의 최대주주가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손 회장은 이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