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

김무성은 1951년 9월 20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해제강 전무이사, 삼동산업 대표이사를 지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1987년 통일민주당 제13대 대통령 선거대책본부 재정국장으로 활동했다.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된 이후 민주자유당 의사국장, 의원국장을 지냈다. 1993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 민정수석 비서관을 역임했으며 1994년 제48대 내무부 차관이 되었다.

1996년 5월 신한국당 소속으로 부산 남구을에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18대 국회의원까지 연임했다. 한나라당 출범에 참여했고 새누리당에 이르기까지 원내대표, 사무총장, 최고위원 등 주요 요직을 거쳤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 불출마하고 박근혜 후보 선거 캠프를 이끄는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2013년 부산 영도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5선 의원이 되었다.

2014년 7월 새누리당 대표에 취임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정치권에서 선 굵은 정치인으로 통한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랑과 신뢰는 각별하다. 2008년 총선 당시 김 전 대통령이 김무성의 선거사무실을 방문해 “전국적 인물이 된 김 의원은 앞으로 대통령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김무성의 지지를 호소했다.

대표적인 '친박'으로 분류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이던 시절 당 사무총장을 맡았고, 2007년 대선 경선 때 '친박계 좌장'으로 불렸다.

2010년 정부의 세종시 수정 추진을 놓고 박근혜 대통령과 입장 차를 보이면서 한때 ‘탈박’의 길을 걸었다. 이때 김무성은 원내대표까지 오르면서 비박계 인사들과 두터운 신분을 쌓고 '화합형 리더'의 이미지를 얻었다.

당 일각에서 '보수우파'를 자처하는 김무성의 강한 보수성향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김무성은 앞서 제주해군기지 반대 활동가들을 '종북세력' '김정일의 꼭두각시' 등으로 지칭해 구설수에 올랐다.

경제관 역시 정통보수에 가까워 경제민주화 추세와 거리가 있다는 분석이다.

교학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서도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왜곡된 역사를 제대로 고치는 작업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당 원내대표를 지내던 2010년 12월 4대강 예산 처리를 위해 몸싸움을 진두 지휘한 점도 단점으로 꼽힌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6년 동해제강 전무이사를, 1982년 삼동산업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해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87년 통일민주당 제13대 대통령 선거대책본부 재정국장으로 활동했으며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기획조정실 차장, 국회행정실장을 역임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라 민자당에 합류해 의사국장, 의원국장을 지냈다. 1993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 민정수석 비서관을 맡았고 1994년 제48대 내무부 차관이 되었다.

1996년 5월 신한국당 소속으로 부산 남구을에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나라당 출범에 참여했으며 당내에서 원내 수석부총무와 한나라당 총재 비서실장을 담당했다. 2004년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200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이 되었다. 2005년 한나라당 사무총장에 선출됐고 2007년 11월 한나라당 최고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 친박계에 대한 ‘보복공천’이 이뤄지자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그 해 7월 복당했다. 2010년 5월부터 1년간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 불출마하고 박근혜 후보 선거 캠프를 이끄는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2013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5선 의원이 되었다.

◆ 학력

부산 화랑초등학교, 경남중학교,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1975년 한양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2005년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을 수료했으며 2007년 부경대에서 명예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부친은 전남방직주식회사의 창업주인 김용주로 민주당 원내총무, 초대 주일공사를 지냈다. 모친은 조선일보 방상훈 회장의 고모로 알려져 있다.

친누나 김문희는 현대증권과 현대상선의 주주이며, 서울 성북구 용문중학교와 용문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학교법인 용문학원 재단의 이사장이다. 형 김창성은 전방(옛 전남방직), 한국경영자총협회의 명예회장이다.

매형인 현영원은 현대상선의 전 회장이었으며, 외조카 현정은은 현대그룹의 회장이다.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조카사위다.

부인 최양옥과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고윤(본명 김종민)은 배우로 <아이리스2>, <호텔 킹> 등에 출연했다.

장인인 최치환은 박정희 정권에서 국회의원, 경향신문 사장을 역임했고 삼성그룹 고문 등을 지냈다.

◆ 상훈

1996년 황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공무원(군인 •군무원 제외)으로서 직무에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근정훈장 중, 청조근정훈장에 뒤이은 2등급 훈장이다.

2007년 제24회 코리아 베스트 드레서 스완 어워즈 정치부문에서 수상했다. 이 상은 패션엔터테인먼트회사 모델라인에서 한 해 동안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생활 속의 패션문화를 선보인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수여된다.

2010년 제12회 백봉신사상 신사의원상을 수상했다. 백봉신사상은 독립운동가 라용균 선생을 기리기 위해 '신사적 태도'와 '의정활동' 두 개 분야에서 최고 신사인 현역 국회의원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국회 출입 정치부 기자들의 무기명 투표로 선출된다.

◆ 상훈

1996년 황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공무원(군인 •군무원 제외)으로서 직무에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근정훈장 중, 청조근정훈장에 뒤이은 2등급 훈장이다.

2007년 제24회 코리아 베스트 드레서 스완 어워즈 정치부문에서 수상했다. 이 상은 패션엔터테인먼트회사 모델라인에서 한 해 동안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생활 속의 패션문화를 선보인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수여된다.

2010년 제12회 백봉신사상 신사의원상을 수상했다. 백봉신사상은 독립운동가 라용균 선생을 기리기 위해 '신사적 태도'와 '의정활동' 두 개 분야에서 최고 신사인 현역 국회의원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국회 출입 정치부 기자들의 무기명 투표로 선출된다.

어록

"내가 사랑하고 헌신했던 한나라당이 여기까지 온 데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한다. 오늘 나는 마음은 한나라당에 두고 몸만 당을 떠난다.” “이런 무원칙한 공천을 일삼은 세력이 한나라당을 망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반드시 선거에서 이기고 돌아와 한나라당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당으로 다시 만들겠다."
(2008/3/14 ‘한나라당 공천 청와대 개입’ 논란 속에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연 기자회견)

“종북주의자 30여 명의 반대 데모 때문에 중요 국책사업이 중단되고 있고, 현재 강정마을에서 공사를 제지하는 세력은 사실상 북한 김정일 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 종북세력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것은 결국 북한에 불리한 것은 하지 말자는 종북적 행태다.” (2011/7/27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에 대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저 자신도 과거 민주화 투쟁 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 불렀던 민주화 투쟁 주제가였다."
"5.18 기념 행사용 별도의 노래를 만들기 위한 예산을 책정했다는데 아까운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주제곡으로 선정해 유가족과 광주 시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한다." (2013/5/8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국가보훈처의 ‘임을 위한 행진곡’ 5•18기념식 주제곡 선정 배제 논란에 대해)

“교육부의 엄격한 검정을 거쳐 통과된 역사 교과서를 전교조의 테러에 의해 채택되지 않는 나라는 자유대한민국으로 볼 수 없다.” (2014/1/6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보수성향 시민사회단체 합동 신년회에서)

“자녀 하나 낳은 분들 반성하셔야 한다.” “우리 모두 이상화, 김연아 같은 딸을 낳아야 한다.” (2014/2/12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지난해(2013년) 출산율이 1.18명으로 하락한 점을 언급하며)

“먼저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행적에 대해 사위 입장에서 어떠한 평가를 내리는 것 자체가 효의 관념상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장인이신 최치환 선생께서 경찰공무원으로서 조국의 안위보전과 치안유지라는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고 노력한 분으로 알고 있다.” (2014/4/8 장인 최치환 전 의원의 제주 4•3 사건 진압 경력에 대해 미디어오늘에 보낸 답변서에서)

“당시 소장이던 박 전 대통령이 5•16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보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적화통일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무능하고 부패한 우리 정치권을 뒤집어 엎어 혁명을 했다." "물론 우리 국민이 좀 억압을 당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우리 경제가 북한경제를 따라잡아서 오늘날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2014/2/4 서울에서 열린 전국포럼연합•(사)21세기 분당포럼 주체 토론회 강연에서)

◆ 평가

정치권에서 선 굵은 정치인으로 통한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랑과 신뢰는 각별하다. 2008년 총선 당시 김 전 대통령이 김무성의 선거사무실을 방문해 “전국적 인물이 된 김 의원은 앞으로 대통령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김무성의 지지를 호소했다.

대표적인 '친박'으로 분류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이던 시절 당 사무총장을 맡았고, 2007년 대선 경선 때 '친박계 좌장'으로 불렸다.

2010년 정부의 세종시 수정 추진을 놓고 박근혜 대통령과 입장 차를 보이면서 한때 ‘탈박’의 길을 걸었다. 이때 김무성은 원내대표까지 오르면서 비박계 인사들과 두터운 신분을 쌓고 '화합형 리더'의 이미지를 얻었다.

당 일각에서 '보수우파'를 자처하는 김무성의 강한 보수성향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김무성은 앞서 제주해군기지 반대 활동가들을 '종북세력' '김정일의 꼭두각시' 등으로 지칭해 구설수에 올랐다.

경제관 역시 정통보수에 가까워 경제민주화 추세와 거리가 있다는 분석이다.

교학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서도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왜곡된 역사를 제대로 고치는 작업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당 원내대표를 지내던 2010년 12월 4대강 예산 처리를 위해 몸싸움을 진두 지휘한 점도 단점으로 꼽힌다.

◆ 기타

1985년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문제를 연구한 임종국의 유지를 기리는 민족문제연구소와 다른 곳이다. 후자는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후에 같은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2013년 9월부터 12월까지 좌편향 역사교과서를 바로잡자는 취지의 새누리당 내 국회의원모임 '근현대사 역사교실'을 개설해 직접 강연에 나섰다. 김무성은 강연에서 역사교육체제가 좌편향돼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과거 민주화 투쟁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 불렀던 주제가였다"라며 자신의 민주화 투쟁경력을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