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아들러는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올해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며 국내에서도 이름을 널리 알린 심리학자다.
아들러의 이론 가운데 '출생서열(birth order)'이라는 이론이 있다. 그는 출생서열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고 봤다.
첫째는 보수적이며 안정지향적인 반면 둘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랑을 쟁취해야 하는 숙명 때문에 경쟁적이고 야심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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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
아들러의 이 이론은 따지고 보면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카인 콤플렉스’의 변주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장남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해 죽임으로써 인류 최초의 살인자이자 형제살인의 원조가 됐다.
카인 콤플렉스는 형제간의 시기와 경쟁이 원초적 인간본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는 데 설득력을 발휘해 왔다.
유교적 전통 아래 있는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역사적으로 장자승계 원칙은 널리 인정됐고 지켜졌다.
장자는 재산이나 가업 등 권한을 물려받는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 반면 차남은 권한이 적은 대신 이런 의무들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국내 재벌그룹 안에서 장자승계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 롯데그룹 사태에서와 같이 형제간 다툼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장유유서라는 전통적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현대사회의 가치 안에서 필연적 현상"이라고 말했다.
프랭크 설러웨이 미국 MIT교수는 저서 ‘반항아로 태어나다(Born to Rebel)’에서 ‘차남 우위론’을 주장한다. 그는 역사 속 사례를 들어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현대사회, 특히 기업경영에서 차남이 적합하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신격호 총괄회장의 차남이다. 그는 17일 일본롯데홀딩스 임시 주주총회에서 우호세력을 과시하며 형 신동주 전 부회장을 상대로 한 경영권 분쟁에서 사실상 승리했다.
롯데그룹 후계구도에 변수가 여전히 남아있긴 하나 현재 상황으로 보면 신 회장도 국내 재벌기업에서 차남 경영인의 맥을 이을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신동빈 회장은 이날 주총이 끝난 뒤 발표한 입장자료에서 "경영과 가족의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이는 신 회장이 고령인 부친에 반기를 들고 장자의 권리를 강탈했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선대에서 형제간 경영권 다툼을 벌였던 삼성그룹이나 현대그룹 외에도 국내에서 차남 경영인으로 활발한 경영활동을 펼치는 사례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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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
장자승계를 당연시하는 풍토가 사라지면서 능력을 중심으로 경영권을 물려줬거나, 사이좋게 물려받고도 차남이 장남보다 경영능력을 발휘한 경우도 많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형만한 아우 없다’는 옛말을 기업경영에서 깬 차남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서 회장은 부친인 서성환 창업주의 차남이다.
서 창업주는 장남인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에게 금융과 건설계열사를 맡게 하고 서경배 회장에게 화장품 과 생활용품 업체인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을 물려줬다. 서영배 회장은 당시 100억 원이 넘는 서울 한남동 자택도 상속했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현재 장남과 차남의 경영성적표는 완전히 역전됐다. 서경배 회장은 아모레퍼시픽에서 화장품사업을 키워 ‘K뷰티’ 열풍을 타고 주식부호 서열에서 한때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제치기도 했다.
반면 서영배 회장은 건설업체인 태평양개발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다. 서영배 회장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한남동 자택을 2012년 서경배 회장에게 팔았다.
최근 외식과 제빵업계에서 승승장구하는 허영인 SPC그룹 회장도 ‘잘 나가는’ 재계의 대표적 차남 경영인이다. 그는 삼립식품 창업주 허창성 회장에게 자회사 샤니를 물려받아 딴 살림을 차렸다. 당시 샤니는 삼립식품 매출의 10%에 불과할 정도였다.
반면 장남인 허영선씨는 1983년 삼립식품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허씨는 1990년대 초 리조트사업에 나섰다가 실패하며 1997년 삼립식품을 법정관리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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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영인 SPC그룹 회장. |
가업을 다시 일으킨 이는 허영인 회장이다. 그는 2002년 법정관리에 있던 삼립식품을 인수했으며 그 뒤 던킨도너츠, 베스킨라빈스, 잠바쥬스 등 해외 브랜드를 잇따라 론칭해 사세를 급속도로 키웠다. 허 회장은 2000년 4800억 원에 불과하던 회사 매출을 현재 4조 원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
국내 재벌그룹은 대물림이 이뤄질 때마다 전근대적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이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차남 경영인의 약진 역시 혈연중심 승계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경영능력을 두고 경쟁구도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그나마 진일보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런 풍토는 아들 형제들뿐 아니라 남매 혹은 자매들 사이에서도 만들어지고 있다.
대상그룹의 경우 차녀인 임상민 상무가 후계경쟁에서 한 발 앞서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임창욱 명예회장은 딸만 둘을 뒀는데 장녀인 임세령 상무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결혼하면서 차녀인 임상민 상무를 후계자로 점찍었다. 임세령 상무가 이혼한 뒤에도 임상민 상무는 보유지분에서 언니를 18% 가량 앞서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