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가면서 나가면 된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평생 이런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며 사업을 일궜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에 목표를 정하고 뚝심있게 밀어붙인 기업가정신을 사람들은 ‘불도저 정신’이라고 말한다.
현대차그룹이 요즘 부쩍
정주영 명예회장을 찾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도 밥상머리에서 그에게 조언하던 할아버지의 말을 되새기고 있다고 한다.
자동차산업의 대격변기를 맞아 새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에 정 명예회장의 창업가 정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어찌 보면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손자로서의 간절함일지도 모른다.
29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최근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현대그룹을 세운 정 명예회장의 생애와 철학 등을 담은 짤막한 다큐멘터리를 여러 개 올렸다.
4년 전 정 명예회장의 14주기를 맞이해 국문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영어로 재구성해 업로드한 것으로 현대차와 현대건설, 현대제철 등을 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키운 정 명예회장의 행보가 담겨 있다.
첫 번째 동영상은 ‘꿈이 있으면 멈추지 않는다-한국 자동차 신화의 서막’이라는 제목으로 그룹의 모태인 현대차와 관련한 내용들로 구성됐다.
아도서비스와 현대자동차공업사 시절을 지나 미국 수출과 국산 엔진 개발 등 현대차가 걸어온 역사와 정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현대차가 해외 완성차기업의 자동차를 위탁생산하다가 포니라는 자동차를 독자개발해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실패해도 좋으니 마음껏 해봐’라는 지시를 내린 정 명예회장의 결단이 있었다는 점이 부각됐다.
정 명예회장의 행적을 돌이켜보는 것은 현대차그룹뿐만이 아니다.
정 수석부회장은 22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칼라일그룹 초청 단독대담에 참석해 정 명예회장과 함께 했던 일화를 전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대담에서 “고등학교 시절 3년 정도 할아버지(정 명예회장)와 함께 살았는데 매일 아침 5시30분 할아버지께서 기상하는 시간에 맞춰 아침식사를 했다”며 “그때 수차례 말씀해주시기를 ‘시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당시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의미를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정 수석부회장은 덧붙였다.
정 명예회장 시대와는 달라야 하는 리더십을 놓고도 고민이 많음을 내비쳤다.
정 수석부회장은 “정 명예회장의 리더십이 직원들을 일사불란하게 따르도록 하는 강력한 리더십이었다면 지금은 직원들과 함께 논의하고 아이디어를 나누려고 한다”고 말했다.
보수적으로 평가받던 현대차그룹의 기업문화를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처럼 바꾸겠다는 뜻과 함께 더욱 자유롭고 자율적 의사결정 문화를 뿌리내리게 하겠다는 각오도 내놓았다.
정 수석부회장과 현대차그룹이 함께 창업가의 길을 걸었던 정 명예회장의 정신을 기억해보고자 하는 것은 현재 현대차그룹이 마주하고 있는 시대가 ‘제2의 창업기’과 다름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현대차그룹은 2000년대 중반부터 급성장하기 시작해 자동차를 연간 800만 대 이상 판매하는 글로벌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최근 5년을 돌이켜보면 SUV(스포츠유틸리티 차량) 라인업 대응 미흡과 미국과 중국에서의 부진 등으로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게다가 자동차산업의 중심이 전동화와 자율주행으로 옮겨가면서 이에 더욱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 부회장에게 주어진 과제는 더욱 무겁다.
“100년에 한 번 오는 변혁기를 맞이했다”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자동차산업의 변화 속도는 빠르다. 고삐를 죄지 않으면 미래차 시장에서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정 수석부회장과 현대차그룹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정 수석부회장의 말대로 현재의 기업환경은 정 명예회장의 불도저 정신만으로 헤쳐 나가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더욱 젊은 생각을 기업에 불어넣고자 하는 정 수석부회장의 최근 행보들도 이를 증명한다.
그럼에도 정 수석부회장은 정 명예회장의 창업가 정신에서 현대차그룹, 더 구체적으로 정 수석부회장 스스로에게 필요한 어떤 조언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정 명예회장은 그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이외에 안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