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훈과 정수현, 건설사 1위 경쟁 불붙어  
▲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좌)과 정수현 현대건설 사장


건설사 시공능력평가 순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삼성물산이 9년 만에 1위를 차지했고 절대강자였던 현대건설은 5년 만에 1위를 빼앗겼다.

순위를 바꾼 원동력은 해외실적이다. 지난해 삼성물산은 134억 달러, 현대건설은 109억 달러로 나란히 해외 수주액 1, 2위를 차지했다. 이 순위는 올해 시공능력평가 순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앞으로도 시공능력평가 1, 2위를 가르는 변수는 해외실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올해 상반기 현대건설은 해외에서만 전체수주액의 80% 이상을 올렸고 삼성물산도 올해 전체수주액의 80% 이상을 해외에서 거둔다는 계획을 밝혔다.

현대건설은 해외건설시장의 전통적 강자다. 반면 삼성물산은 해외시장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말 글로벌 전문가 최치훈 사장을 불러들이며 해외시장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최치훈 사장은 건설분야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다. 대신 한국인 최초로 GE 사장을 지낸 글로벌 전문가다. 그는 지난해 12월 국내시장 중심이었던 건설부문을 해외로 확대하라는 과제를 안고 삼성물산의 최고경영자로 취임했다.

반면 정수현 현대건설 사장은 건축학을 전공한 후 40년 가까이 현대건설에 몸담은 전통 '건설맨'이다. 3년 전부터 현대건설을 이끌고 있다. 정 사장은 지난해 해외수주액 1위 자리를 놓친 데 이어 올해 시공능력평가 1위 자리까지 빼앗긴 일로 이래저래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을 구긴 현대건설은 올해 상반기까지 해외수주액 1위를 차지하며 절치부심하고 있다. 빼앗긴 왕좌를 되찾겠다는 의지가 명확하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 해외실적이 가른 시공능력평가 순위

올해 시공능력평가 순위에서 삼성물산이 13조1208억 원으로 1위를 차지했다. 5년 동안 1위였던 현대건설은 12조5666억 원으로 2위로 밀려났다. 삼성물산이 이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건 2005년 이후 9년 만이다.

시공능력평가는 정부가 최근 3년 동안 건설사의 시공능력을 공사실적과 경영상태, 기술능력, 신인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지표다. 건설사가 건당 수주할 수 있는 공사를 금액으로 표시한다. 매년 7월 말 발표되며 공공공사 입찰자격 제한 등에 활용된다.

시공능력평가는 1997년 처음 발표됐고 지금까지 국내 건설사의 시공능력을 나타내는 가장 객관적 지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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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물산의 로이힐 프로젝트
토목건축, 산업설비, 조경 등 분야별 순위를 따로 발표하지만 일반적으로 순위를 대표하는 것은 토목건축분야의 순위다. 대형 건설사간 순위 다툼이 가장 치열한 부문이자 브랜드 인지도와 직결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건설사들은 이 순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매년 자존심 대결이 벌어진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이 올해 자리를 맞바꾼 이유는 해외공사 실적 때문이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호주 로이힐 광산개발 프로젝트, 삼성전자의 중국 서안반도체공장 등 굵직한 공사를 두루 따내며 해외건설의 절대강자인 현대건설을 제치고 처음으로 해외공사 수주액 1위를 달성했다.

특히 로이힐 프로젝트가 순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로이힐 프로젝트는 호주 로이힐 광산에서 채굴된 철광석을 수출하기 위한 플랜트, 철도, 항만 인프라를 조성하는 공사다. 사업 규모만 6조4113억 원에 이르는 대규모 공사다.

그밖에 삼성물산은 1조3천억 원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발전소,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에 들어설 주거타워, 인도네시아 초고층빌딩을 잇따라 수주했고 홍콩 지하철과 카타르 고속도로 사업권도 따냈다.

◆ 절대강자 현대건설과 새로운 강자 삼성물산

해외실적으로 순위가 갈린 것은 현대건설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현대건설은 해외건설부문의 전통적 강자다. 1965년 국내 건설사 최초로 해외에 진출해 중동, 동남아, 미주, 아프리카 등 세계 60여 개 국가에서 800여 건에 달하는 공사를 수행해 오고 있다.

2010년에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연간 110억 달러가 넘는 해외공사를 수주하며 단일기업 해외공사 수주 100억 달러 시대를 열었다.

지난해에는 국내 건설사 중 처음으로 해외건설 누적수주 1천억 달러를 돌파했다.

특히 다른 국내 건설사들이 해외 플랜트 공사 중심의 편향된 수주경향을 보일 때 대형 원전, 석유화학시설, 대규모 항만공사, 건축공사 등 다양한 수주에 성공했다.

반면 삼성물산은 상대적으로 해외진출 역사가 짧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성장했다. 2009년 삼성물산의 해외건설 수주액은 15억 달러 정도였지만 지난해 134억 달러를 넘었다.

국내 수주 물량이 줄어들고 규제가 심해지자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도 삼성물산은 해외건설에 치중하려 한다. 지난해 말 글로벌 전문가 최치훈 사장을 선임한 것은 삼성물산이 미래먹거리로 점찍은 분야가 해외건설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다.

당시 삼성물산은 “최치훈 사장이 삼성물산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체질을 개선할 것”이라고 선임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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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

◆ 건설 무경험자 최치훈의 도전

최 사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글로벌사업 전문가다.

그는 외교관인 부친을 따라 어린 시절부터 외국에서 자랐고 대학교와 대학원을 모두 미국에서 다녔다. 그 뒤 GE에서 18년간 근무하며 한국인 최초로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최 사장은 건설 전문가는 아니다. 건설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전무하다.

그는 지난해 건설사업을 처음 맡은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지난 30년 동안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해왔다”고 대답했다. 그가 맡았던 분야는 GE의 에너지사업, 삼성전자, 삼성카드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최 사장은 그동안 맡았던 대부분의 분야에서 눈에 띌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삼성전자 디지털프린팅사업부를 위기에서 건져냈고, 삼성SDI 취임 후에 최고 실적을 이끌었다. 업계 3~4위였던 삼성카드에서 '숫자 시리즈' 카드로 시장 점유율 2위로 끌어올렸다.

문제가 있는 분야에 투입되면 반드시 해결한다고 해서 '해결사'라는 별명도 붙었다.

최 사장은 전혀 다른 사업분야에서 경영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로 GE에서 배운 리더십을 꼽았다. “아랫사람을 믿으면 성과가 온다”는 것이다.

그는 GE에서 배운 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Listen(듣고), Delegate(책임을 위임하며), empower(권한을 주라).”

최 사장 주변에는 건설분야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전문가들이 많다.

최 사장이 지난해 12월 삼성물산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2011년부터 시빌사업부장을 맡아오던 김형 전무와 글로벌마케팅 사업부장을 지낸 정현우 전무가 각각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호주 로이힐 프로젝트 총괄장을 지낸 이석 전무 역시 부사장으로 승진하는 등 해외사업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경영진들이 최치훈 사장을 보좌하고 있다.

◆ 최치훈의 과제는?

최 사장의 어깨에 놓인 짐은 무겁다. 해외수주 비중이 높아지며 덩치가 커졌지만 그에 따른 여러 문제들이 생긴 탓이다.

특히 삼성물산은 단기간 내 급격하게 외적으로 성장해 원가관리가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해외에서 사상 최고 수주액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냈지만 원가투입이 커지면서 수익성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

또 해외 현장관리와 공사수행에도 적잖은 부담을 떠안게 됐다. 최 사장은 이러한 문제점을 의식해 올해 초 ‘안전과 윤리’ 경영을 강조했다. 기존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내실 다지기에 주력하겠다는 방침이다.

올해는 신규수주 부진에도 시달리고 있다. 매출을 견인하던 해외사업에서 신규일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올해 상반기까지 총 5조 원을 수주했는데 그 중 해외수주액은 2조5천억 원에 불과하다.

삼성물산은 올해 초 22조 원의 신규수주를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4조 원, 해외에서 18조 원을 목표로 했다. 상반기가 끝난 현재 국내수주는 목표 4조 원 중 절반 이상을 따냈지만, 해외수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전체 매출의 40%에 이르는 삼성그룹 계열사 의존도도 해결해야할 문제로 꼽힌다. 삼성물산의 지난해 매출 7조9615억 원 중 삼성그룹 계열사 매출이 3조2595억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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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수현 현대건설 사장

◆ 자존심 구긴 정수현

현대건설을 이끌고 있는 정수현 사장은 내년이면 현대건설에 몸담은 지 40년이 된다.

2011년 6월 사장 자리에 올라 만 3년이 넘었다. 그는 1952년생으로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와 1975년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지난해 해외수주액 1위 자리를 삼성물산에게 빼앗기자 정수현 사장의 경영능력과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럭비공 인사’로 유명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문책성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정 사장은 자리는 지켰지만 올해 다시 한 번 자존심을 구겼다. 5년 만에 시공능력평가 1위 자리를 빼앗겼다.

현대건설은 2011년 현대자동차그룹에 편입된 이후 ‘수익성 중심 수주’를 경영원칙으로 삼고 있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공사는 수주에서 배제한다는 것이다.

정 사장도 취임한 이후 저가수주의 유혹을 떨치고 수익성 중심의 공사수주 전략을 펼치고 있다. 철저한 리스크 관리와 원가절감 노력으로 수익성이 크게 개선됐다.

현대건설은 지난해 건설업계가 저가수주로 어닝쇼크에 휩싸였을 때도 분기별 2천억 원의 수준의 영업이익을 내며 건실한 실적을 보였다.

그러나 시공능력평가 순위가 건설사의 브랜드 가치나 수주능력을 가르는 ‘서열’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건설업계 맏형이자 건설종가로 불리는 현대건설의 체면이 서지 않고 있다.

전통적으로 실적을 중요시하는 현대건설 내부에서 내실경영도 중요하지만 외형 성장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정수현은 왕좌 자리를 되찾을까?

이런 상황에서 정수현 사장은 하나둘 왕좌를 되찾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현대건설은 올해 상반기 해외수주액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삼성물산에 밀려 2위를 차지했지만 다시 1위를 되찾았다. 67억1200만 달러의 해외수주액을 기록하며 지난해 같은 기간 46억9100만 달러보다 43% 증가했다.

인적 쇄신도 이어졌다. 현대건설의 박경호 토목환경사업본부장(부사장)은 지난달 말 회사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시공능력평가 결과 발표와 비슷한 시기다.

박 부사장은 지난해 정기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해 현대건설의 핵심 사업부문인 토목환경사업을 이끌어왔으나 승진 1년6개월 만에 회사를 떠났다. 이번 인사 배경에 대해 9년 만에 시공능력 1위를 삼성물산에 내준 데 따른 후속조치라는 업계의 분석이 나왔다.

정 사장의 올해 경영방침은 ‘글로벌 건설 리더로 도약’이다. 최근 2년 연속 해외수주 100억 달러 달성, 누적수주 1천억 달러를 돌파한 분위기를 몰아 해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리더로 입지를 다지겠다는 것이다.

정 사장은 이를 위해 신규 공략지역에 지사나 법인 설립을 검토하는 등 해외 영업조직도 재정비할 계획을 잡아놓고 있다.

현대건설은 올해 매출 15조9265억 원, 신규 수주 22조2650억 원을 목표로 세웠다. 해외매출 비중도 지난해 64%에서 올해 70%로 높였다.

특히 영업이익은 두 자릿수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건설업계 최초로 ‘영업이익 1조 클럽’에 진입한다는 목표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