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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기] 옥스팜 트레일워커, 무박 100km 걷기로 깨달은 작은 희로애락

이상호 기자 sangho@businesspost.co.kr 2023-05-30 14: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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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비즈니스포스트는 2023년 창간 10주년을 맞아 본격적으로 사회 공헌 활동을 시작했다. 올해 1월에는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과 ‘공익 확산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 협약’을 맺고 기후위기 지역지원 캠페인 '사라지는 이들의 삶을 지켜주세요'를 진행했다. 2월에는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 시리아 긴급구호 캠페인을 벌였다. 

5월에는 옥스팜의 대표적 기부행사 ‘트레일워커’에 언론사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해 함께 걸었다. '트레일워커'는 물을 구하러 수십km를 걸어야 하는 해외 아동들의 고통을 분담하자는 취지로 1981년 홍콩에서 시작된 기부 프로젝트다. 네 명이 한 팀으로 100km를 39시간 내 완주하는 동안 참가자들의 지인과 동료들이 기부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미래의 '트레일워커'들을 위해 비즈니스포스트는 2회에 거쳐 참가자들의 목소리와 직접 참가한 체험담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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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오전 6시 출발점을 옥스팜 트레일워커 참가자들이 출발점을 나서고 있다. 참가자들을 향해 지경영 옥스팜코리아 대표 등 관계자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인제=비즈니스포스트] “저희 5월에 트레일워커 행사하는데, 이 기자님도 참가 하실거죠?”

올해 1월6일 비즈니스포스트는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과 ‘공익 확산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 협약’을 맺었다. 당시 협약식 자리에 참석한 기자에게 옥스팜 커뮤니케이션 팀장이 반갑게 말을 건넸다.

트레일워커? 처음 듣는 말이다. 하지만 마스크 너머로도 느껴지는 생글생글한 미소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 보통 일은 아니겠구나.

하지만 대한민국의 사회인이라면 다들 안다. 이런 자리에서 ‘아니오’라고는 못한다.

“하하하. 당연히 해야죠. 꼭 참가하겠습니다. 체험기도 쓸게요.”

그렇게 기자는 비즈니스포스트 팀을 꾸려 강원도 인제군 일대에서 20~21일 진행된 ‘2023 옥스팜 트레일워커’에 참가하게 됐다. 팀명은 '인제 집에 가자'. 4명의 팀원 모두 트레일 코스에 도전해 본 경험이 없는 말 그대로 ‘트레일 생초보’들이었다.

팀원 한 명은 개인 사정으로 트레일워킹 도전이 어렵게 돼 팀의 참가를 위해 행사 규정에서 요구하는 절차를 모두 따른 뒤 대회 시작 직후 빠져 사실상 코스 도전은 3명으로 진행됐다.

20일 오전 5시30분. 대회장으로 향했다. 다양한 자세로 사진을 찍는 팀, 간단한 퍼포먼스를 하는 팀, 준비운동으로 몸을 푸는 팀. 대회장에는 참가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긴 여정의 시작을 즐기고 있었다.

이윽고 오전 6시가 되고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 500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은 한 덩어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CP1에 이르는 첫 구간은 시작점에서 박달고치 정상에 이르는 길이었다. 난이도는 가장 높은 별 4개, 거리는 7.5km인 구간이다. 해발고도로는 200m 지점에서 800m 가까운 지점까지 올라가는 급경사가 포함됐다.

박달고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정말 쉽지 않았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경사도 급해지는 데다 코스 초반이다 보니 참가자들이 밀집해 있어 내 속도를 내기도 어려웠다.

우리 팀은 출발 1시간이 조금 지나 박달고치를 오르는 중간에 휴식하기로 했다. 사전에 코스 계획을 짜면서 다들 트레일 코스 경험이 없는 만큼 무리하지 말고 충분히 휴식하자고 정한 데 따른 결정이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무사히'와 '시간 내 완주'였다.

사실 이때 휴식은 내심 불만스러웠다. 벌써 휴식하는 참가팀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아직은 체력에 부담을 느끼는 시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길가 한 편에 앉아 있으니 다른 참가자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뭔가 뒤처지는 기분이 든다. 딱히 기록을 내겠다고 참가한 것이 아님에도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을 경쟁자로 보는 관점이 당연해져 버린 것일까.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많은 참가자 분들은 쉬고 있는 우리 팀을 보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화이팅”, “힘내요”를 외치며 응원해 주었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체험기] 옥스팜 트레일워커, 무박 100km 걷기로 깨달은 작은 희로애락
▲ CP1 코스 가운데 박달고치로 들어서는 구간. 이전까지는 평지에 포장도로가 이어졌지만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박달고치를 향한 산길이 시작된다. <비즈니스포스트>
박달고치를 지나 CP2로 향하는 구간은 12km 거리에 난이도 별 3개인 코스다. 오르내림이 조금 있지만 크게 해발고도가 변하는 구간은 아니다.

이번 구간에서는 인상적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인제의 명소인 ‘원대리 자작나무숲’이다.

빽빽하게 들어선 하얀 나무와 그 사이로 비치는 햇빛. 그리고 빈틈없이 시선을 채워주는 녹음(綠陰). 밝지만 편안한 색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이 선물처럼 펼쳐졌다.

자연스럽게 소중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모두에게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

풍경 속에 아쉬움을 남겨두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CP2를 지나 CP3, CP4로 이어지는 길은 각각 11.8km 거리에 난이도 별 3개, 9.5km 거리에 난이도 별 1개인 구간이다.

CP1, CP2 보다 쉬운 구간인 데다 트레일 코스를 걷는데 조금은 익숙해졌고 아직 피로가 많이 누적되지 않은 시점인 만큼 전반적으로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은 구간이었다.

다만 CP3 후반부와 CP4 초반부에 펼쳐지는, 이제까지 올라온 해발고도만큼을 다시 내려가는 내리막은 잠시 방심하려는 초보자의 발걸음에 제동을 걸었다.

이제까지 산길과 달리 포장도로로 이어진 내리막길은 잠시나마 ‘조금 속도를 내 볼까’ 생각이 들도록 유혹했다.

하지만 걷다 보니 바로 느낌이 왔다. 여기서 신난다고 생각 없이 걸으면 발바닥은 물집으로 성치 못할 것이라고.

조심해서 걸었음에도 결국 팀원 한 명은 이 구간에서 발바닥에 물집을 얻었다. 이렇게 하나 또 배운다. 험준한 오르막보다 깔끔한 내리막에서 더 조심해야 한다.

다행히 내리막을 지나자 CP4 직전까지는 기린면 일대의 평지 포장도로를 지나는 보너스 같은 구간이 이어졌다.
[체험기] 옥스팜 트레일워커, 무박 100km 걷기로 깨달은 작은 희로애락
▲ CP2 구간의 명소 '원대리 자작나무 숲'. 사진으로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은 말 그대로 선물 같았다. 기회가 된다면 여행 삼아 한 번 방문해 봐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장소다. <비즈니스포스트>
CP4에서는 미리 맡겨 놓은 물품과 마사지, 테이핑 등 옥스팜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모두 제공받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오후 6시 반쯤에 출발했다. 12시간 가까이 걸어 슬슬 피로도 쌓인 데다 CP5로 가는 도중부터는 밤길을 걷는다.

CP5 구간은 14.1km 거리에 난이도는 별 4개였으나 상당히 긴 구간이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뤄진 포장도로라 체감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기자는 이 구간부터 트레일 워킹을 가볍게 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대회 준비물을 챙기면서 신발을 어떤 걸로 신을까 고민하다가 100km를 걸으면 신발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가지고 있는 운동화 가운데 가장 저렴한 운동화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저렴한 운동화답게 밑창이 얇고 완충 효과가 약해 바닥의 작은 자갈까지 발바닥에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다 보니 이 시점부터 발바닥의 피로감이 더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산길을 걷을 때는 괴로울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CP6, CP7로 가는 구간은 모두 난이도가 별 2개로 대부분이 포장도로로 구성됐다는 점이었다. 특히 CP7로 가는 7.8km 구간은 전체가 포장도로였다.

코스 자체는 쉬운 구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CP7은 이번 트레일워커에서 우리 팀의 최대 위기 구간이었다.

자정이 지나면서 누적된 피로에 졸음이 몰려왔다. 체온도 떨어졌다. 각자 물집이나 피부쓸림 같은 신체적 고통과도 싸우다 보니 말투에 조금씩 짜증이 묻어 나왔다.

때마침 그믐날이라 어둠도 더욱 짙었다.

자연스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오밤중에 강원도 산속에서 이러고 있나’, ‘굳이 이렇게 안 걸어도 어려운 지역 아이들은 옥스팜 분들이 알아서 잘 도와주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포기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서 조금씩 강해졌다.
[체험기] 옥스팜 트레일워커, 무박 100km 걷기로 깨달은 작은 희로애락
▲ CP4 코스 가운데 내린천을 따라 걷는 구간. 평탄한 지형과 포장도로에 시원한 하천까지 함께 해 즐겁게 걸었던 구간이다. <비즈니스포스트>
하지만 우리를 응원해 줬던 회사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글로 쓰려니 민망하지만 기자도 안다. 소년만화 같은 데서 주인공이 힘 빠질 때 아버지나 스승님 같은 사람이 나타나 ‘힘내거라, XX야’를 외치는 뻔한 전개 같다는 거.

하지만 진짜 힘들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정말로 주변 사람들이 떠오르기는 하더라. 만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고 학습이 된 것인지,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팀원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자연스레 회사 사람들로 대화 주제가 옮겨갔다.

“저희 지금 관두면 월요일에 회사 가서 사람들 얼굴 보기 좀 그렇겠죠?”

“국장님, 부국장님, 김 부장님한테 네발 동물부터 물고기까지 고기도 종류별로 얻어 먹었는데...”

“이 부장님은 응원 카드에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따로 지원해도 주셨고...”

“...가죠”

가까스로 새벽 2시 반쯤 CP7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전 6시 전에는 출발해야 하므로 서둘러 자리를 잡고 누웠다. 잠은 청하기도 전에 찾아왔다.

오전 5시10분. 맞춰둔 알람이 울린다. 다들 피곤한 표정이지만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CP7 이후는 말 그대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부족한 잠으로 조금이나마 회복된 체력은 CP7 출발 직후부터 만난 가파른 오르막에 다 써버렸다. 이제 남은 코스의 거리나 난이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남은 구간 대부분은 비포장 산길이었다. 발바닥의 상태는 더욱 안 좋아져 걷는 내내 맨발로 지압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사후 세계를 다룬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지옥에도 종류가 다양한데 그 가운데 분명 싸구려 신발을 신고 산길을 걷는 지옥도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이번만 완주하고 끝낸다는 생각 하나로 걸었다. 팀원들도 생각은 비슷했나 보다.

“내년에도 이거 또 하실 건가요?”

“트레일워커가 ‘인생 기부 프로젝트’라는데. 인생 살면서 한 번만 해보면 족하다는 의미 아닐까요.”
[체험기] 옥스팜 트레일워커, 무박 100km 걷기로 깨달은 작은 희로애락
▲ CP9를 지나 결승점으로 향하는 '인제 집에 가자' 팀의 뒷모습. 당시에는 '이제 빨리 끝내자'는 간절함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주하고 지나서 다시 보니 그 간절함은 결승점이 이제 눈 앞이라는 희망이었던 것 같다. <비즈니스포스트>
마지막 결승점이 가까워질 때도 별다른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 결승점 바로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까지도 그냥 빨리 끝내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우리 팀은 37시간 6분 56초만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신기했다.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모든 부정적 감정이 그대로 기쁨으로 변했다. 살면서 이 정도로 극적인 감정 변화를 겪어 본 적이 있었을까.

강렬한 주말을 보내고 일상으로 복귀한 뒤에도 트레일워커의 여운은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함께 했던 팀원들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레 내년 이야기가 나온다.

“내년에는 등산스틱 준비해서 가죠.”

“트레일화도 찾아보니까 좋은 거 많더라고요.”

“적당히 운동들 하시다 내년 2월부터는 훈련도 좀 해보죠.”

트레일워커의 기억을 되새기다 보니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떠오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기자에게 트레일워커가 그랬다. 그리고 내년에도 이 비극 같은 희극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돌이켜 보면 트레일워커 도전 중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행사를 위해 몇 달 전부터 애쓰고 대회 중에는 매 CP마다 반갑게 참가자들을 맞으며 힘을 북돋워 준 옥스팜 관계자분들, 넉넉한 인심으로 참가자들을 반겨주고 식사 제공에도 협조해주신 인제군 일대 지역 주민분들, 같은 뜻으로 함께 트레일워커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분들 그리고 함께 걸었던 모든 트레일워커 참가자 분들.

이 체험기를 빌어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이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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