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10일 중국 랴오닝성 선양의 한 시장에서 시민들이 채소를 사고 있다. < AFP > |
[비즈니스포스트]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그해 겨울, 베이징에 처음 갔다. 기숙사 방이 어느 정도 틀이 잡히자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르자는 심정으로, 다른 중국 남자들처럼 나도 아내 대신 시장을 보러 나섰다.
한 할아버지가 망태 같은 데에 달걀을 놓고 팔고 있었다. 한 줄 살 생각이었는데, 달걀을 줄이나 판으로 쌓아놓은 게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사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그냥 얼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한 근에 얼마라고 했다. 달걀을 근으로 떠서 파는구나! 그렇게 달걀 한 근을 샀다. 중국에서 한 근은 500 그램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달걀만 근으로 떠서 무게에 따라 값을 매기는 게 아니었다. 민물고기도 그랬고, 오이도, 고추도, 수박도, 참외도 그랬다. 수박 크기가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그러느냐고, 그냥 같은 값을 받으면 되지 유난이다 싶기도 했다.
내게는 하나에 얼마라고 하면 모를까, 1근에 얼마라고 하면 한 통에 얼마인지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인이 원래 이렇게 꼼꼼하고 철저한가? 아니다.
중국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산문이 있다. 「대충대충 선생전(差不多先生傳)」이라는 산문이다. 중국 근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후스(胡適)가 1919년에 썼다. 대충대충 선생의 삶의 철학은 ‘대강대강’, ‘대충대충’, ‘그거나 이거나 마찬가지’이다. “만사 대충대충 하면 되는 거지, 뭘 그리 꼼꼼하게 따져.”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산다.
한번은 그의 어머니가 흑설탕을 사 오라고 시켰는데 흰설탕을 사 왔다. 어머니가 꾸중하자, 그가 이렇게 말한다. “흑설탕이나 흰설탕이나 그게 그거지 아녜요”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그가 병이 났다. 원래는 유명한 왕(汪) 선생을 모셔오려고 했는데, 찾지 못해서 발음도 비슷하고 한자가 비슷한 다른 왕(王) 선생을 모셔왔다. 발음이나 한자는 비슷해도 의사 실력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실력이 떨어진 왕 선생에게 진찰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왕 선생이나 이 왕 선생이나 마찬가지이지 뭐. 비슷하잖아.” 결국 그는 병으로 죽게 된다. 죽을 무렵, 그가 이렇게 말한다. “사는 거나 죽는 거나 그게 그거지 뭐.”
이 산문은 후스가 모든 일을 대충대충 하고 꼼꼼하지도 철저하지도 않은 중국 민족성을 비판하려고 썼다.
한국인 중에도 후스가 비판한 중국인의 성향을 경험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특히 중국에 공장을 짓고 중국 종업원을 고용해 본 한국 기업인 중에는 중국 노동자들이 일을 꼼꼼하게 챙기지 않고 대충대충 하는 것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박 하나, 달걀 하나도 저울로 떠서 꼼꼼히 셈을 하는 중국인과 ‘흰설탕이든 흑설탕이든 그게 그거지’라고 생각하면서 대충대충 하는 중국인, 둘 중 어느 쪽이 중국인의 참모습일까? 둘 다 중국인의 참모습이다.
두 가지 태도의 차이는 이익과 돈에 관련된 것이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다.
돈과 이익에 관련된 일이라면 중국인은 더없이 셈이 철저하고 꼼꼼하다. 이익과 돈 앞에서 대충이란 없다.
반면에 돈이나 이익에 상관없는 일에는, 더구나 나와 친분 관계가, 특히 중국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와 네트워크, 즉 ‘꽌시’가 없는 경우에는 대충대충 하는 성향이 있다.
중국인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은 이익 때문에 만나지만, 반대로 이익 문제 때문에 관계가 틀어진다고 생각한다. 서로 이익을 나누어야 관계가 지속되고, 이익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야 소중한 사람이나 절친한 사람과 관계가 틀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하거나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자기 이익을 꼼꼼하게 따진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중국인은 소인이다.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이익에 따라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중국 속담에 “친형제라도 셈은 분명히 한다(親兄弟, 明算帳)”는 말이 있다. 형제 사이에도 돈 문제를 확실히 계산한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렇다. 전통 시대에도 중국은 부모가 재산을 물려줄 때 큰아들, 둘째 아들 상관없이 모든 자식에게 똑같이 균분해 주었다.
이렇게 재산을 균분하여 상속하게 되면 자식들은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계약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큰아들 위주로 재산을 물려주고, 형제 사이, 부모 자식 사이에 무슨 돈을 따지냐고 생각하는 우리와 다르다.
공자는 '논어'에서 ‘소인은 이익에 밝고 군자는 의에 밝다’고 했다. 이 기준에 따르자면 중국인은 소인이다. 그렇다면 중국인은 군자이기를 포기하는가? 물론 소인 자체가 목적이거나 늘 소인으로 사는 중국인도 많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먼저 소인이 되고 나중에 군자가 되는 것, 아니 나중에 군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소인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선소인 후군자(先小人, 後君子)를 추구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소중한 인간관계를 잘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 먼저 돈과 이익을 꼼꼼히 따지는 소인이 되는 것이다. 간혹 이익과 돈을 먼저 말하고 그것을 먼저 생각하는 중국인에게 정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한국인이 많은데, 그것은 중국인의 이런 성향 때문이다.
▲ 박진 외교부 장관이 2월1일 주유엔 한국대표부가 주최한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리셉션에서 주유엔 장쥔(張軍) 중국 대사와 인사하고 있다. <외교부> |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떤가?
개인적인 체험이다.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강연 요청을 받곤 한다. 그런데 그런 요청을 하면서 강연료가 얼마라는 말을 먼저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 문화가 그렇다. 돈을 먼저 거론하는 게 실례라는 생각은 초청하는 쪽도 그렇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게 좋게 끝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초청하는 쪽에서는 이만큼 돈을 주는데 강연 내용이 제값을 못 한다는 불만이 들 때도 있을 것이고, 나로 보자면, 이런 강연 했는데 강연료를 이것밖에 주지 않는다고 불만이 생길 때도 있다. 먼저 강연료를 분명히 했으면 이런 사후 불만은 없을 것이다.
이런 비슷한 일은 한국인 인간관계에서 흔하다.
친구 사이에 정과 의리만 생각하면서 돈 문제를 분명히 처리하지 않았다가 나중에는 결국 친구 관계가 틀어진다. 형제 사이에 돈 문제가 있을 때, 당장 얼굴을 붉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때 분명하게 처리해야 우애가 틀어지지 않는데, 형제 사이 정만 생각하다가 형제 관계가 깨진다. 결국 친구 사이에, 형제 사이에 얼굴을 붉히고 싸움이 난다.
그래서 친한 사람끼리는 돈거래 하는 게 아니라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친한 사이에 돈거래 해도 된다. 다만 꼼꼼하게 따지면서 서로 셈을 먼저 분명히 하지 않는 게 문제다.
과거 중국에 진출하였던 많은 한국 기업인, 특히 중소 기업인의 경우 조선족 동포와 협력하곤 했다. 하지만 좋게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동포끼리 뭐 그런 것까지’ 하는 생각으로 이익을 어떻게 나눌지, 돈 문제를 사전에 꼼꼼하게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크다.
사실 한국인은 계약에 약할 뿐만 아니라 유난히 계약서를 꼼꼼하게 보지 않는다. 계약서를 꼼꼼하게 보면서 하나하나 따지면 좀스러워 보일까 우려한다.
한국인은 정이 많고 의리가 넘친다. 하지만 그 정과 의리가 끝까지 가지 않을 수 있고, 결국에는 돈 문제 때문에 정도 잃고 의리도 잃고, 소중한 친구와 사람도 잃을 수 있다.
처음에는 대범하고 의리 있었지만, 나중에는 돈 문제 때문에 속에서 불이 나서 친구든 형제 사이든 욕을 할 수도 있다. 결국, 처음에는 군자였지만 나중에는 소인으로 전락하는 일도 있다.
이익과 돈 문제를 기준으로 볼 때, 먼저 소인이기를 자처하고 나중에 군자가 되는 걸 생각하는 사람이 중국인이라면, 나중에 소인이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먼저 군자이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한국인이다.
중국인의 문제는 소인에서 군자로 나아가지 않고 소인 단계에 머무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문제는 군자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나중에 소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미중 대립 시대에 한중 비즈니스 차원은 물론이고, 외교 차원에서도 한중 관계를 잘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중국은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움직이는데 우리는 가치와 의리, 명분을 중심으로 움직이면 나중에 손해를 입는 쪽은 한국이다.
진정 군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먼저 소인이 된다고 하여 무엇이 나쁠 것인가? 비즈니스도, 인간관계도 그렇고, 외교도 그렇다. 이욱연 서강대 교수
현재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사범대학교 대학원 고급 진수과정을 수료했고 하버드대학교 페어뱅크 중국연구소 방문교수를 지냈다. 중국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며 여러 권의 책을 냈고 jtbc '차이나는 클래스', EBS '내일을 여는 인문학'에 출연하는 등 대중과 소통에도 활발하게 나서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이욱연의 중국 수업',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이만큼 가까운 중국',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의 중국 지성' 등이 있고, 번역한 책으로 '들풀', '광인일기',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아큐정전'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