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나온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험할 일이 없다는 의미이다.

중국 기업은 세계무대에서 다방면에 걸쳐 우리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 이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 기업이라도 이들을 이끄는 핵심 인물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기업의 경쟁상대인 중국 기업을 이끄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경영전략과 철학을 지니고 있는지 집중적으로 탐구해 본다. <편집자주>

[노녕의 중국기업인 탐구] CATL 쩡위췬→비야디 왕촨푸
[1] 형 부부 손에 자라다
[2] 배터리사업 본격 시작
[3] 전기차 제조에 도전
[4] 전기차 제국을 꿈꾸다

1995년 왕촨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비야디를 세웠다. 2003년 왕촨푸는 비야디를 휴대폰 배터리 업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리고 같은 해 왕촨푸는 인생에서 가장 무모한 결정을 내렸다. 508억 원에 시안친촨모터스의 77% 지분을 사들여 자동차 제조 사업과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동시에 시작했다.
 
[노녕의 중국기업인 탐구] 비야디 왕촨푸(1) 형 부부 손에 자라다

▲ 왕촨푸 비야디 회장.


비야디는 배터리 사업부터 시작해 지금은 세계적 전기차 제조 업체로 성장했다.

2021년 기준 비야디의 전기차 시장점유율은 중국 1위이다. 배터리 사업의 시장점유율은 10% 안팎으로 세계 4위이다.

왕촨푸는 2021년 포브스에서 선정한 중국 최고 CEO 3위에 올랐다.

비야디는 워렌 버핏이 투자한 것으로 알려지며 더 큰 화제를 모았다.

왕촨푸는 현재 비야디의 상무이사 겸 회장직을 맡고 있다. 자산은 29조 원 안팎으로 중국 10대 갑부 가운데 한명이다.

◆ 일찍 부모 여의고 또래보다 성숙

왕촨푸는 1966년 안후이성 우후시 우웨이현의 가난한 가정에서 6녀2남 가운데 7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술력이 훌륭한 목공이었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열 명의 대가족은 아버지가 목수일로 벌어오는 돈에 의지해 살았기 때문에 넉넉하진 않았으나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왕촨푸가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는 오랜 기간 앓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의 경제 상황이 급격히 악화해 바닥을 치면서. 왕촨푸의 누나 5명은 앞뒤로 급하게 시집을 가버리고 막내 여동생은 다른 집에 맡겨졌다. 

그리고 왕촨푸와 형, 두 형제와 어머니만 집에 남았다. 왕촨푸의 형 왕촨팡은 학교를 그만두고 사회에 나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어린 남동생이 남아있는 집안을 이끌기 위해 형은 밤낮없이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왕촨푸 역시 어머니와 형의 기대감에 부담을 느꼈으나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더 열심히 공부했다. 가정 상황 때문인지 왕촨푸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했고 점잖았으며 말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하고 책 읽는 데에 쏟았다. 

가족은 모든 희망을 왕촨푸 한 사람에게 걸고 있었고 왕촨푸는 훌륭한 성적으로 보답을 해내야 했다. 그래서인지 왕촨푸의 마음 속에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압박 혹은 신념이 자리잡았다.

1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 뒤 왕촨푸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다. 세상에는 정말로 두 형제만 남겨졌다.

강인하고 독립적인 성격은 이 때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왕촨푸도 약점이자 강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는 “나는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려 하고 또 모든 일을 다 직접 확인해야 하는 스타일이다”고 말한 적 있다.

왕촨푸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잇따라 부모를 여읜 충격에 목표로 하던 중등직업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러나 직업학교 입학 실패는 왕촨푸 인생에서 또 다른 길을 가는 기회가 됐다.

◆ 아버지 같은 형, 어머니 같은 형수

80년대 중국에서는 중등직업학교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중등직업학교는 기술인력,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 지방정부의 유관부처 승인 아래 세워졌다. 80년대 초반 중국에선 모든 산업이 새롭게 시작하던 시기였으나 인재가 부족했다. 따라서 필요한 부분에 전문인력을 배치하기 위해 중등직업학교 제도가 생겨났다.

중등직업학교를 졸업하면 일자리가 확보돼 오히려 중등직업학교에서 떨어지면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분위기가 당연할 정도였다. 이 제도는 90년대 후반에 국가교육정책이 바뀌면서 점차 사라졌다. 

왕촨푸는 중등직업학교에서 떨어지고 막 생겨난 일반 고등학교인 ‘우웨이 제2중학교’에 입학했다. 만약 직업학교로 입학했더라면 왕촨푸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일반 고등학교에 가면서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형 왕촨팡은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인 18세부터 가족을 책임지며 학업을 중단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동생에게 공부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줬다. 

형수인 장쥐슈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시기에 형과 결혼해 이 가족의 일원이 됐다. 왕촨푸의 고등학교 3년은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는데 형수는 이 시기에 들어와 신혼생활도 즐기지 못하고 가족을 돌보기에 바빴다.

왕촨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주말이면 집에 돌아가 형수에게 10위안(현재 한국 돈 1800원)의 용돈을 받아 갔다. 한 번은 집안에 도저히 10위안조차 나올 길이 없자 형수는 마을 이집저집 다니며 돈을 꿔와 겨우 5위안(900원)도 안 되는 돈을 왕촨푸 손에 쥐어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왕촨푸는 가정의 어려움과 형의 고생을 알았다. 마음 속에서 공부를 그만두고 얼른 뛰쳐나가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형은 “아무리 힘들어도 심지어 집을 팔아야 돼도 너는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만이 출세하는 길이다”고 마음을 다잡아 줬다.

형이 고등학생 왕촨푸에게 바라는 것 딱 한가지가 있었다. 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왕촨푸는 형의 바람에 부응해야 했다.

1987년 왕촨푸는 드디어 중난공업대학 야금물리화학과에 입학했다. 형은 결혼할 때 혼수로 받은 시계와 집안의 모든 새 물건을 왕촨푸 손에 들려 보냈고 첫 대학입학 등록하는 날에는 먼 길을 함께 했다. 

그리고 왕촨푸가 학사와 석사를 동시에 공부하는 동안 형은 뒷바라지를 위해 왕촨푸가 살고 있던 도시로 삶의 터전까지 옮겼다.

형은 왕촨푸가 석사를 마칠 때까지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했다. 이뿐 아니라 근검절약은 하되 쓸 때는 써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정도로 형은 왕촨푸에게 사람 됨됨이도 가르쳤다.

다섯살 터울에 불과하지만 형은 왕촨푸에게 아버지였고 형수는 어머니였다. 형은 왕촨푸가 비야디를 세웠을 때도 뒤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줬다. 두 형제는 지금까지도 애틋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2022년 1월 현재 왕촨푸의 형 왕촨팡은 비야디의 부사장직을 맡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노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