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관저 '구중궁궐' 논란 부상, 실제 조선왕들 살던 거처 살펴보니

▲ 시민들이 11일 시작한 경복궁 야간 개장에 참가해 관람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서울 용산 한남동 대통령 관저가 감사원 결과 발표에 이은 김용현 국방부 장관의 ‘문재인 정부 탓’ 발언으로 인해 다시금 도마 위에 올랐다.

청와대에 이어 대통령 관저가 구중궁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실제 조선시대 궁궐에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자 했던 신진사대부들의 긍지가 담겨 있었다.

29일 정치권에 따르면 대통령 집무실 및 관저 이전 불법 의혹이 10월 예정된 국회 국정감사에서 뇌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통령 집무실 및 관저 이전 과정에서 관련 법규를 다수 위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26일 전체회의를 열고 국정감사 증인 및 참고인 채택 안건을 의결했다. 해당 목록에는 대통령 관저 증축 공사에 참여한 김태영 21그램 대표 등 관련자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준호 더불어민주장 최고위원은 27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통령) 관저 불법 공사를 수의계약한 것으로 알려진 인테리어 업체 '21그램'에 주목해 달라”며 “김 여사가 기거하는 관저 공사를 수의계약했다고 하는데, 하필 같이 전시회도 하고 코바나 사무실 설계 시공한 업체가 공사를 해서 이득을 얻었다면 이것이 특혜다”고 지적했다.

앞서 감사원은 추석 직전인 12일 참여연대의 국민감사청구로 시작한 대통령 집무실·관저 이전 과정의 감사 결과를 공개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한남동 대통령 관저는 예산 편성 단계에서 사업계획이 수립되지도 않았으며 계약이 체결되기도 전부터 공사를 시작하는 등 법령으로 정해진 절차를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지어졌다.

시공업체가 무자격 업체에 하도급을 맡기는 등 건설산업기본법 위반 사례가 발생했음에도 비서실이 이를 업체에 맡겨둔 채 확인하지 않는 등 공사감독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에 더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진료체계가 원활하게 가동중”, “우리 경제가 확실히 살아나고 있다” 등의 발언이 현실과 괴리됐다는 지적을 받으며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는 구중궁궐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졌다.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2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계속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비상의료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셈이냐”라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는 윤 대통령이 청와대 이전을 발표하며 ‘구중궁궐’인 청와대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을 밝혔던 것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한 부분으로 꼽힌다.

앞서 윤 대통령은 2022년 3월20일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발표하며 “청와대는 조선 총독 때부터 100년 이상 사용해 온 제왕적 권력의 상징”이라며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대통령 관저 '구중궁궐' 논란 부상, 실제 조선왕들 살던 거처 살펴보니

김용현 국방부 장관이 25일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대 정치권에서 ‘구중궁궐’이라는 단어가 ‘불통’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지만 실제로 구중궁궐에 속하는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에는 백성을 중심에 두고 정치를 하겠다는 신진사대부들의 의지가 담겼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경복궁을 검색해 가장 처음으로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면 판삼사사 정도전이 경복궁 전각의 이름을 지으면서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왕이 일상을 보내는 ‘강녕전’이라는 이름은 편안함 속에서도 임금이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에서 지어졌다. 평상시 업무를 보는 ‘사정전’에는 백성의 임금이 된 사람이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는 경고가 포함됐다.

정도전은 국가적인 행사가 열리는 정전에 부지런해야 한다는 의미의 ‘근정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임금이 단순히 부지런한 게 아니라 어떤 것에 부지런해야 하는지 깨우쳐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임기 대부분을 경복궁에서 보내며 전각 이름에 담긴 의미를 충실히 수행하며 살았던 임금으로는 세종이 꼽힌다.

세종은 임기 말년에 몸이 좋지 않아지면서 아들, 사위, 형제 등의 집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던 것을 제외하면 재위 32년 가운데 대부분의 시간을 경복궁에서 머물며 정무를 돌봤다.

다만 대부분의 임금은 업무 중심 구조로 조성된 데다가 건물명에서부터 압박을 가하는 경복궁을 그리 선호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 경복궁은 명실상부한 조선시대 제1궁궐인 ‘법궁’의 역할을 수행하긴 했으나 실제 임금들의 대부분의 생활은 제2의 궁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궁’인 창덕궁, 창경궁 등에서 이뤄졌다.

이러한 궁궐 운영을 흔히들 양궐체제(兩闕體制)라고 부른다. 태종이 창덕궁을 지으면서 시작된 양궐체제는 성종이 창덕궁 옆에 위치한 수강궁을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한 창경궁으로 고쳐 지은 이래 완전히 자리잡았다.

태종은 ‘1차 왕자의난’ 등 골육상쟁이 벌어졌던 경복궁에서 상주하는 것을 꺼려해 창덕궁으로 옮겨 가 집무를 보고 생활을 했다.

태종실록 11년 10월4일의 기록을 살펴보면 경복궁에서 업무를 봐야 한다는 신하들의 상소를 받은 태종은 “내가 경복궁을 만드신 아버님의 뜻을 알지만 경복궁이 좋은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며 “또 무인년(1398년)에 일어난 집안일은 내가 경들과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찌 차마 이곳에 거처할 수 있겠느냐”며 “명의 사신이 오는 것과 명절 행사 같은 것을 반드시 경복궁에서 하기 때문에 고쳐서 기울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조는 창덕궁을 본격적 거주지로 삼기 위해 창덕궁 뒤편에 자리 잡은 정원인 ‘후원’ 확장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민가 73채를 철거하고 기존 거주민에게는 빈 땅을 나눠줬다.

중종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일본군 사신을 접견하고 잔치를 벌이고 백관의 하례를 받는 등 창덕궁을 사실상의 법궁으로써 사용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러면서 실거주는 정궁이 아니던 창경궁에서 했다.

대사헌 최숙생은 1517년 8월20일 중종에게 직접 “창덕궁에 상시 거처하시도록 신이 전에도 아뢰었으나 임금께서 듣지 않으셨다”며 “정궁에 상시 거처해 조상들이 하신 일을 행하시는 것이 옳습니다”고 말했다.

이에 중종은 “평상시에는 창덕궁에 거처하는데 더울 때만 창경궁으로 옮겨와 어머니를 뵙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중종은 그 뒤에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오가며 생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몸 상태가 안 좋아지자 창경궁으로 다시 옮겨 가 1544년 창경궁 환경전에서 사망했다. 이 바람에 아들인 인종이 정궁이 아닌 창경궁에서 즉위식을 올리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 역할을 하고 경희궁이 이궁의 역할을 하게 됐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전부 소실된 가운데 창덕궁과 창경궁이 각각 1609년, 1616년 중건됐지만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까지 폐허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 중건 이래 경복궁은 법궁 역할을 다시 수행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는 등 신변의 위험을 느꼈던 경복궁을 꺼려한 고종이 1896년 아관파천 이래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삼으면서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는 1907년까진 덕수궁이 임금의 집무실로 기능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양궐체제를 넘어 두 개의 수도를 갖춰 황제국으로서의 체면을 갖추겠다는 시도가 진행되면서 평양에 조선의 마지막 궁궐인 풍경궁 건설이 추진되기도 했다.

특진관 김규홍은 고종 39년(1902년) 5월1일 상소를 통해 “지금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두 수도를 두는 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데가 어디에 있느냐"며 “지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두 개의 수도를 두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고종이 5일 뒤에 조령을 내려 “평양에다 행궁을 두고 서경이라고 부름으로써 나라의 천만년 공고한 울타리로 삼겠다”라는 뜻을 밝히면서 평양에 풍경궁 건립이 시작됐다.

고종의 풍경궁 건립은 나름의 의의도 있었지만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적받는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지만 당시에는 애국계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윤치호는 1904년 5월27일 자신의 일기를 통해 “황제는 이 저주받은 나라의 저주받은 백성들로부터 갈취한 몇백만 원의 돈을 ‘불타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쓸모없는 궁궐’을 짓는 데 낭비하고 있다”는 강력한 비판을 남기기도 했다.

장영숙 상명대학교 교수는 연구과제 ‘대한제국기 고종의 풍경궁 건립을 둘러싼 제 인식’의 결과 보고서에서 “풍경궁은 고종이 황권 강화를 통해 대민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성한 것”이라며 “평양이 갖는 지역적인 가치, 기자조선의 중심지로서 서경복설과 황실의 정통성 확보, 러일 간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이이제이 방책이라는 복합적인 의미가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서경 공사를 핑계로 국가의 재정과 인민의 혈세가 낭비됐고 행궁 공사 기간에 저지른 평안도 관찰사 민영철의 부정과 탐학은 지배층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며 “풍경궁은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의 군용지와 철도부지로 편입됐는데 결국 급박한 대외정세 속에서 애당초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채 아까운 혈세와 국가재정만 낭비하게 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