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현재 미국에 생산시설을 두고 있지 않는데도 주요 반도체기업들과 함께 미국 현지에서 정부의 반도체 지원을 확보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산업환경의 급변을 고려해 반도체 지원 의지가 뚜렷한 미국에서 연구개발거점 구축을 넘어서 생산시설 투자를 추진할 수 있다는 시선이 나온다.
 
SK하이닉스 미국반도체연합과 보조 맞춰, 미국에 생산시설 투자하나

▲ 박정호 SK하이닉스 각자대표이사 부회장(왼쪽)과 이석희 각자대표이사 사장.


13일 미국반도체연합(SIAC)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단체가 최근 미국 의회로 반도체산업에 관한 예산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보낸 서신의 공동명의에 SK하이닉스도 포함됐다.

미국반도체연합은 글로벌 반도체 제조기업,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 장비기업, IT기업 등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미국 정관계의 반도체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최근 결성됐다. 국내기업으로는 삼성전자와 함께 SK하이닉스가 이름을 올렸다.

현재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시설이 한국과 중국에만 집중돼 있다는 점을 놓고 보면 미국 정부가 반도체 지원을 본격화해도 SK하이닉스의 실익은 거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와 달리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SK하이닉스의 미국 투자가 반도체 생산시설 쪽으로 확대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2012년 미국 새너제이에 연구개발법인 SK하이닉스메모리솔루션아메리카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연구개발 인프라를 더욱 확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앞서 이석희 SK하이닉스 각자대표이사 사장은 3월 주주총회에 참석해 미국과 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연구개발거점을 추가로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연구개발거점은 미국 정부가 원하는 반도체 제조시설과 거리가 멀다. 

미국 정부는 최근 중국과 갈등에 따른 안보 위험성, 세계적 반도체 공급부족 등을 계기로 자국 내 반도체 생산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미국은 1990년까지만 해도 세계 반도체의 37%를 생산했는데 현재는 12% 수준으로 비중이 축소됐다.

이에 미국 의회는 국방부 연간 예산을 정하는 2021년도 국방수권법(NDAA)에 반도체 지원법(CHIPS for America Act)을 포함해 올해 초 통과시켰다. 이 법은 신규 생산시설 건설, 기존  생산시설 확장 등 반도체 시설투자에 관해 건별 최대 30억 달러(약 3조4천억 원)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았다.

반도체공장을 새로 구축하는 데는 최소 조 단위의 금액이 필요하다. 미국 정부의 지원이 확정될 경우 현지에 투자하는 반도체기업들의 수혜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정부는 이미 법 시행을 위한 예산 확보에 들어갔다. 조만간 도출될 반도체 공급망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구체적 지원방안을 수립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2월24일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품목의 미국 공급망과 관련해 제조역량 및 위험요인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이 조사는 100일의 기간을 두고 있어 6월 초 마무리될 것으로 예정됐다.  
 
SK하이닉스 미국반도체연합과 보조 맞춰, 미국에 생산시설 투자하나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화상으로 열린 반도체 긴급대책회의에서 반도체 재료 웨이퍼를 집어들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위축된 미국 반도체산업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배타적 반도체 생태계를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SK하이닉스 같은 선두권 반도체기업이 특히 영향을 받을 것으로 분석된다.

산업연구원은 3월 보고서에서 “메모리부문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부문에서 대만 TSMC의 독주에 미국이 일정 부분 제동을 걸 가능성이 있다”며 “미국 입장에서는 첨단 반도체칩 수급이 특정 국가에 과도하게 편중된 점을 위협요인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은 이미 세계 1위 파운드리기업 TSMC를 상대로 반도체공장을 미국에 지으라는 압력을 넣은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도 최근 오스틴 반도체공장의 증설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 경영진은 이런 국제동향을 고려해 생산시설 구축을 포함한 여러 방향의 투자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정호 SK하이닉스 각자대표이사 부회장은 4월15일 서울 여의도 켄싱턴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반도체시장에서 큰 움직임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4월21일에는 서울 코엑스 월드IT쇼에 참석해 “파운드리에 더 투자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주일 사이 연달아 적극적 투자 의지를 보인 셈이다.

SK하이닉스의 모회사 SK텔레콤 역시 최근 통신사업과 비통신사업을 분할해 ICT(정보통신기술)투자전문회사를 설립하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반도체사업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SK하이닉스는 신설 ICT투자전문회사 자회사로 들어간다.

SK하이닉스가 미국에서 연구개발거점 강화을 넘어 생산시설 투자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까닭이다.

SK하이닉스는 SK그룹에 인수되기 전 하이닉스반도체였던 시절 미국에서 반도체 생산시설을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 오리건 유진의 하이닉스반도체 미국생산법인은 8인치(200mm) 웨이퍼 기반으로 반도체를 만들었다. 하이닉스반도체가 더 효율성 높은 12인치(300mm) 웨이퍼로 사업구조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2008년 문을 닫았다.

다만 SK하이닉스가 이른 시일 안에 미국에서 반도체 생산시설 등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시선도 있다. 이미 상당한 수준의 투자계획을 수립해놨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먼저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에 10조3천억 원에 이르는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당장 올해 말 8조 원가량을 지급할 것으로 예정됐다. 또 장기 프로젝트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전체 사업비 120조 원 규모로 계획됐다.

메모리반도체 분야로 한정하면 투자는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SK하이닉스 같은 대형 반도체기업이 메모리반도체 생산시설을 확대해 시장에 반도체가 과잉공급될 경우 제품 가격이 낮아지면서 수익성이 악화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SK하이닉스가 미국 정부 지원과 관련한 미국반도체연합의 움직임에 동참한 것을 놓고 그 의미를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반도체 표준규격을 정하는 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JEDEC)와 같은 여러 단체에 수많은 반도체기업과 동참하고 있다”며 “이번에도 업계 공통의 이익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고 바라봤다. [비즈니스포스트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