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기업에 최고경영자 후보를 추천하면서 한국기업의 현실을 절감한 적이 있다. 회사에 CEO 후보 추천을 의뢰한 고객기업은 브랜드나 규모 면에서 한국을 대표할만했다. 그런 만큼 컨설턴트들도 후보자 발굴과 평가에 역량을 집중했고,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많이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돼 있는 후보들을 직접 만나면서 컨설턴트들의 실망감은 상당히 컸다. “아, 이 정도인가”라는 탄식이 계속됐다. 후보자로 올라 있는 경영인들은 주요 그룹에서 CEO를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경력만 놓고 보면 흠잡을 데가 없었다. 프로젝트를 맡은 컨설턴트들 사이에서 “이런 사람들이 적격자가 아니라면 누가 적격자인 거야”라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해 보니 이름과 내용의 차이가 너무 컸다. 이들은 대부분 국내 명문대학 출신으로 석사나 외국대학의 명문MBA를 마쳤다. 입사해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으며 주요 임원을 거쳐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몇 년씩, 어떤 경영자는 10년 이상 CEO를 지냈다.

그러나 업무내용을 점검해 보니 CEO로서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예를 들면 이들은 독자적으로 주요 임원의 인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신규사업 투자도 직접 결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모두 위에서, 소위 말하는 그룹의 회장 비서실에서 결정됐다. 계열사 사장들은 그룹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우리나라에 스타기업은 많지만 스타경영자는 별로 없다. 기업규모는 이미 세계적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경영진들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에 스타 CEO가 없는 까닭  
▲ 부실 계열사를 부당지원해 회사에 수천억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된 김승연(62) 한화그룹 회장이 2월 11일 오후 파기환송심 선고를 위해 구급차를 타고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룹의 '선단식 경영' 때문이다. 한국 주요그룹은 계열사의 독자적 경영을 허용하지 않는다. 투자나 인사 등 주요 의사결정은 그룹 수뇌부가 한다. 오너경영체제이기 때문에 대부분 그룹 총수나 대주주가 하는 것이다.

계열사 사장은 그런 점에서 사업본부장이나 영업본부장일 뿐이다. 인사권도 투자결정권도 없다. 이 때문에 그룹 총수가 유고상태에 빠지면 그룹 계열사의 주요 의사결정이 유보된다. 회장이 복귀할 때까지 인사도 투자도 운영에 필요한 최소 수준에 그친다.

최근 총수가 유고상태인 SK그룹이 대표적이다.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1년째 수감돼 있다. 동생인 최재원 수석부회장도 법정구속됐다. 총수가 구속된 뒤 SK그룹에서 발탁인사도 대규모 투자도 사라졌다. 최근 대법원이 총수 형제에 대해 3~4년 실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자 SK그룹은 지금 공황상태에 빠졌다. 주요 현안에 관한 의사결정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SK그룹만이 아니다. 김승연 회장이 수사와 재판으로, 그리고 이에 따른 입원으로 경영일선에서 빠지면서 한화그룹은 긴 동면상태에 들어갔다. CJ그룹, 효성그룹, 태광그룹... 이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황은 비슷하다.

이렇게 그룹 중심의 선단식 경영 때문에 그룹의 주요 계열사 사장을 거쳐도 CEO로서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고 보기 어렵다. 반쪽짜리 CEO다. 영업은 잘 할지 모르지만, 투자나 인사 등 다른 핵심분야에서 제대로 된 경험을 쌓지 못했다.

한국 주요 그룹 계열회사의 대표이사를 CEO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CEO가 아니라 COO이거나 CMO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룹이 하나의 회사처럼 운영되기 때문에 CEO는 그룹 총수이지 계열회사 사장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그룹 계열회사 출신 사장들이 독자적으로 기업경영을 맡으면 쩔쩔맨다. 삼성이나 현대차 LG 출신 경영자들이 그룹의 울타리를 떠나면 순식간에 경쟁력을 잃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과 현대차 SK LG 등 그룹 출신의 경영자들 가운데 그룹을 떠난 뒤에도 경력이 살아있는 경영자가 얼마나 될까? 재직하고 있을 땐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던 내로라하는 경영자였지만, 그룹을 떠나면 순식간에 존재감이 없어지고 만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외국계 기업들은 한국 기업인들의 이런 사정을 잘 안다. 이 때문에 헤드헌팅회사는 외국계 기업에 CEO 후보를 추천할 때 차라리 스펙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중견기업의 CEO나 외국계 기업의 CEO에 관심을 갖게 된다. 물론 이들도 독자경영 경험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기가 참 어렵다.

포브스의 '글로벌 2000'에 포함된 기업의 수로만 보면 한국은 세계 5~6위의 글로벌기업을 갖고 있는 나라다. 그러나 경영자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 순위는 내려갈 것이다. 어쩌면 한참 낮은 수준에 포진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주영 이병철 박태준 등 창업해서 회사를 일군 경영자들과 이건희 정몽구 등 오너경영자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한국을 대표할 경영자로 누구를 꼽아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한국도 이제 스타경영자들이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그룹 계열사의 자율경영의 폭이 확대돼야 한다. 그룹 소속이 아닌 대기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경영자 배출구조는 그룹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계열사에 대한 그룹의 경영통제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규모를 키우고 있는 중견기업들도 이들 대기업처럼 그룹 중심 경영을 흉내내고 있다.

답답한 현실이다.

신현만은 한국 최대 헤드헌팅회사인 커리어케어의 회장이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한양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겨레신문에서 창간 때부터 기자를 했고 한겨레신문 자회사 사장을 맡아 경제주간지를 발행하고 컨설팅사업을 전개했다. 아시아경제신문사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보스가 된다는 것> <능력보다 호감을 사라> <회사가 붙잡는 사람들의 1% 비밀> <이건희의 인재공장> 등 많은 베스트셀러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