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연 기자 nuevacarta@businesspost.co.kr2017-03-24 09: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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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명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인명진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이 박근혜 게이트로 혼란에 빠지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돼 수습을 맡고 있다.
1946년 6월1일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났다. 한신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목사로 활동하며 민주화운동에 몸담아 4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김영삼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기구인 ‘행정쇄신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정치권과 연을 맺었다.
한나라당이 ‘차떼기당’ 문제 등으로 쇄신요구가 빗발쳤을 때 윤리위원장으로 영입됐다. 당내 보수세력과 충돌하면서도 부패한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성공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집권을 도왔다.
공천갈등 등으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재야에서 한나라당을 비판하면서도 애정을 보여왔다.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비슷한 태도를 지켰다.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자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들어와 쇄신작업을 주도했다. 당내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했지만 친박세력과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잠재돼 있다. 경쟁력 있는 대선후보를 만들어 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원칙주의자이지만 보수와 진보 양족을 중재하는 데 능숙하다.
경영활동의 공과
△ 대선후보 경선과 흔들리는 리더십
인명진은 자유한국당의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 규칙을 마련하는 과정을 주도했다. 외부의 거물급 인사를 영입하는 데도 힘썼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17년 1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불출마를 선언한 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영입하는 데 주력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당원권 정지도 풀어주면서 대선후보 경선흥행을 노렸다.
그러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2017년 3월15일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인명진의 구상은 어긋났다.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친박세력인 김진태 의원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인명진을 겨냥한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2017년 3월17일부터 진행된 경선후보 비전대회에서 김진태 의원의 지지자들이 인명진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박근혜 게이트 혼란 수습
인명진은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자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쇄신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으로 이름도 바꿨다.
2016년 12월29일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공식 추인됐다. 인적청산을 위해 친박계 핵심세력을 대상으로 1월6일까지 자진 탈당할 것을 요구했다. 인적청산 대상으로는 박근혜 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지냈던 사람, 총선 참패의 책임자, 막말 논란에 휩싸인 인사 등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친박계인 서청원 최경환 의원과 갈등을 빚었다. 새누리당 윤리위원회가 2017년 1월20일 서청원 최경환 의원에게 당원권 3년 정지를 각각 처분하면서 인명진이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징계대상에서 제외돼 인명진이 한계를 보여줬다는 지적도 나왔다.
2017년 2월13일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꾸고 새 강령을 확정하면서 ‘박근혜 지우기’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강령의 제목을 ‘국민과의 약속’에서 ‘우리의 사명’으로 바꾸고 첫머리에 언급된 ‘국민의 행복’도 삭제했는데 이 문구는 박근혜 대통령의 2012년 대선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한계도 보인다. 친박세력이 2017년 2~3월 내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집회에 참여했지만 이를 막는 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부 친박세력이 헌재의 결정에 반발하거나 ‘삼성동계’를 결성할 움직임을 보이자 직접 당론과 지도부를 흔들지 말 것을 경고했다.
△ 한나라당-새누리당 비판적 지지
인명진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한나라당에 여러차례 쓴소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이명박 정부를 심정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는 등 호의적인 태도도 같이 보였다.
2008~2012년 동안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의 부패비리가 잇달아 터질 때마다 언론을 통해 부패는 한나라당의 고질병이라고 여러차례 꼬집었다. 2009년 10월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던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위촉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쇄신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국민과 소통하는 방법과 리더십 등을 많이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보수논객인 윤창중 칼럼세상 대표를 수석대변인으로 임명한 사실을 비판하면서 폭넓은 등용을 주문했다. 2014년 8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두고 여야가 대립했을 때도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양보할 것을 제안했다.
2016년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3주년을 맞았을 때 유승민 전 원내대표와 갈등 등을 들면서 “지난 3년이 솔직히 무서웠다”고 평가했다.
△ 한나라당 공천 파문
인명진은 2008년 4월9일 총선에 관련된 한나라당의 공천갈등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가 2008년 7월 윤리위원장에서 물러난 데도 공천갈등이 크게 작용했다.
2008년 1월 안강진 공천심사위원장이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씨나 김무성 의원 등을 의식해 부정비리에 연루된 사람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당규 3조2항을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하자 인명진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2008년 3월 한나라당의 총선 공천 내정자들과 관련해 윤리적으로 하자가 있는 김영일 전 강릉MBC 보도국장과 안홍렬 당협위원장을 다른 후보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새’ 논란에 휩싸인 정덕구 전 의원의 공천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공천심사위원회와 윤리위원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그러나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결국 금고형 이상을 받은 사람에게만 공천 신청을 불허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 3월13일 인터뷰에서 ‘철새 공천자’ 5~6명의 공천을 철회하지 않으면 윤리위원장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2008년 3월18일 회의 결과 인명진의 요청을 기각했다.
2008년 5월4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당시 인명진은 “지난해 12월 대선이 끝난 뒤 최근까지 강재섭 대표에게 여러차례 사의를 밝혔고 총선이 끝나면 더 이상 안 하려고 생각했었다”며 “윤리위원장으로서 내 역할은 끝났다”고 말했다.
△ 이명박-박근혜 대선후보 검증 주도
인명진은 17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후보검증 경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2007년 7월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시장을 대상으로 한 검증청문회를 주도했다. 이때 박 전 대표에게 최태민 목사의 뇌물수수 의혹을 직접 질문했다. 이 전 시장에게는 병역면제 과정을 둘러싼 논란을 추궁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와 이 전 시장이 대부분 ‘모른다’로 일관해 검증청문회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많았다.
△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인명진과 자유한국당의 인연은 한나라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명진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으로 영입된 진보 측 인사로서 부패 이미지를 청산하는 일을 주도했다.
한나라당은 2006년 당시 ‘차떼기당’ 이미지와 의원들의 음주 추태 등으로 쇄신 요구가 강해지자 개혁적 인사였던 인명진을 윤리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윤리위원장은 당헌이나 당규를 위반하거나 비위행위를 저지른 당원의 징계를 심의하고 의결하는 자리다.
인명진은 “6.15 민족대축전 당시 광주는 해방구였다”는 발언을 한 김용갑 의원, 국정감사 피감기관인 해군사령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송영선 의원 등에게 강력한 징계를 추진하며 당 내부 갈등을 빚었다.
정석래 당시 충청남도 당진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이 20대 여성 성폭행을 시도한 사건이 일어나자 인명진은 윤리위원회를 열어 제명을 결정했다. 제명은 당규상 가장 높은 단계의 징계로 제명된 당원은 5년 동안 다시 입당할 수 없다.
△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헌신
1970년대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든 재야 민주화운동 인사다. 부유한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가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장로대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과 노동자 김진수씨의 억울한 죽음 등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 도시산업선교회에 들어간 뒤 1년 동안 공장에서 빨래비누를 만들며 노동자의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 명절이나 자식의 돌 때도 가족을 찾는 대신 노동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긴급조치 위반, YH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등에 연관돼 10년 동안 3년에 걸쳐 네차례 투옥됐으며 국외추방된 적도 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당시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으로서 민주화운동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다.
1986년 서울 구로에 갈릴리교회를 세우고 노동자와 빈자를 위한 목회활동을 표방했다. 1990년대 들어 이주노동자를 돕는 일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교회 차원에서 헌금의 50% 이상을 사용해 독거노인에게 도시락을 매주 전해주고 베트남에 송아지를 보내는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 인명진 당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왼쪽)이 2008년 3월2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택기 후보의 금품살포 의혹과 관련해 공천심사위원회를 비판하고 있다. <뉴시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인명진은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으로 혼란에 빠진 자유한국당을 수습하고 경쟁력있는 대선후보를 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영입해 보수세력을 결집하고자 했지만 황 권한대행이 대선에 나오지 않기로 하면서 경선 흥행에 빨간불이 켜졌다. 인명진의 리더십도 크게 흔들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친박세력이 모이면서 자유한국당의 당내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인명진은 강경책으로 맞서고 있지만 친박세력의 반발도 만만찮다.
개헌을 매개로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등과 연대하는 방안도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김 전 대표는 자유한국당과 손을 잡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 평가
세 가지 어리석은 일을 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삼우(三愚)라는 호를 보유하고 있다.
증조할머니 때부터 기독교를 믿은 모태 기독교도다. 그가 태어난 충청남도 당진은 김대건 신부의 고향이기도 하다.
종교인으로서도 개혁적인 인사로 알려졌다. 종교인 과세의 법제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가로 개혁적인 인사로 평가되지만 2006년 북한의 핵실험 이후 햇볕정책 폐기를 촉구하는 특별선언서를 채택하는 데 참여하는 등 다소 보수적인 모습도 보였다. 2011년 인터뷰에서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운동권 출신이면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은 것 때문에 진보진영에서는 ‘배신자’, 보수진영에서는 ‘위장취업자’로 취급받기도 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쓴소리를 하고 있다.
친 김영삼계 인사로 알려졌다.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을 할 때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국민운동본부를 종종 찾으면서 서로 알고 지내게 됐다. 1987년 대한민국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김대중 경쟁구도에서 김영삼 후보로 단일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부정방지대책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일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대우조선 노조파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도와주다가 구속됐을 때 구치소로 직접 면회를 갔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인명진은 국민운동본부 대변인, 노 전 대통령은 상임부산집행위원장으로 일했다.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인명진을 ‘선배님’으로 불렀다.
그러나 북한 관련 문제에서 노 전 대통령과 반대 입장을 취했다. 2006년 12월 19일 한나라당 국회의원 부인들을 대상으로 열린 워크숍에서 “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미국에 한 번도 안 가봤다고 말한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어떻게 그런 사람이 대통령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보기보다 마음이 약하고 눈물이 많다’고 표현했지만 한나라당 윤리위원장과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등을 맡았을 때 강한 고집과 리더십을 보여줬다.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시절 ‘저승사자’로 불리기도 했다.
2006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은 뒤 부패정당 이미지를 걷어내는 데 힘썼다. 강재섭 당시 대표는 인명진을 ‘정의의 화신’으로 부른 적이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인 2007년 12월 인명진을 두고 “윤리위원장을 무서운 사람으로 바꿔 놓았는데 참 잘 뽑았다”며 “그 사람은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삶의 태도와 원칙으로 ‘사람들이 볼 때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들었다. ‘가난한 사람을 죽이면 하늘도 돌아선다’고 여러차례 말해왔다.
목사이지만 불교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낸다. 사찰 특별법회에서 설교를 하거나 그가 목사인 갈릴리교회로 승려를 초빙해 법문을 듣는 행사도 종종 주최했다.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 쓸데없이 책을 잡힐까 두려워 북한 문제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를 맡으면서 북한 주민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태도를 지켰다.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스승으로 문동환 목사, 존 브라운 목사, 곽선희 목사를 들었다. 문동환 목사는 문익환 목사의 동생이다. 존 브라운 목사는 호주 출신으로 인명진이 투옥됐을 때 호주 정부를 움직여 구명을 요청하기도 했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함석헌)을 인생에 영향을 준 책으로 꼽았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2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84년까지 서울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총무로 일했다.
1986년부터 서울 구로 갈릴리교회 목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는 원로목사를 맡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을 맡았다.
1993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부정부패추방운동 본부장을 역임했다.
1993년~1998년 감사원 자문기관인 부정방지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1994년 바른언론을 위한 시민연합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95년 국민복지기획단 위원이 됐고 바른언론신문사 발행인으로 일했다.
1996년 행정쇄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사랑의채널 이사가 됐고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위원도 맡았다.
1996년~2000년 한국방송공사 이사를 역임했다. 2001년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명예옴부즈맨이 됐다.
2006년 10월~2008년 5월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2월 코리아몽골포럼 이사장을 맡았다.
2009년 3월 대북지원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가 됐고 7월에는 대통령에게 통일정책을 조언하는 통일고문으로 위촉됐다.
2010년 4월 사회적기업활성화포럼 공동대표를 맡았다. 2011년 4월 서울 금천구의 시민단체인 지밸리녹색산업도시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2년 2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됐고 2013년 11월에는 정치권 원로 33인이 주도해 만든 국민동행의 공동대표단에 들어갔다.
2015년 3월~2016년 2월 안양대학교 교양대학 석좌교수로 일했다.
2016년 3월~2016년 12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2016년 3월부터 숭실대학교 숭실평화통일연구원 석좌교수로 일하고 있다.
2016년 12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됐다. 2017년 2월에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학력
대전고등학교과 한신대학교를 졸업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샌프란시스코신학교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숭실대학교 노사관계대학원을 석사로 졸업했다.
◆ 가족관계
◆ 상훈
1973년 한국인권을 위한 북미주협의회 인권상을 받았다.
1998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탔다.
2013년 제4회 민세상을 수상했다.
◆ 기타
주민등록상으로 1946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45년에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한국교회를 새롭게’(2010), ‘성문 밖 사람들 이야기’(2014), ‘위대한 부르심’(2015), ‘신들의 수다1’(2015) 등 저서 4권을 썼다.
케이블 방송채널 tvN에서 ‘종교인들의 세상 이야기’(2014), ‘오 마이 갓’(2014~2016) 등 프로그램 2편도 진행했다.
어록
“친노 친문은 이념 패권인데 친박 패권은 이념이 없다. 친박은 이념도 없이 권력 중심에서 삥땅 좀 쳐볼까, 공천 좀 받아볼까 일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그 이해관계 의핵심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물러나 이제는 쓸 필요가 없는 단어가 됐다.” (2017/03/21,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다른 정당은 지금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회의원을 한차례씩 했지만 장관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사람이 최고의 지지를 받고 있다. 두 번째 지지를 받는 사람도 도지사 2선 정도를 했다. 그런데 자유한국당 후보들을 보면 시장, 도지사, 6선 의원 등이 있고 광역시장과 3선 의원 등도 있고 화려하기 그지 없다. 경력으로 보면 이 후보들의 국민적인 지지율이 오르지 않을 리가 없다. 지금처럼 지지율이 지지부진한 건 시간과 홍보의 문제다.” (2017/03/20, YTN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겨냥해)
“친박계 의원들의 징계가 미흡하다는데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판이다.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설화를 일으킨 사람들은 자유한국당에 오면 징계감이다. 정당 역사상 국회의원의 당원권을 정지하는 일은 거의 없다. 서청원 의원을 징계한 것을 두고도 사람들이 우리 집 앞에서 3개월 동안 항의하고 있다. 징계를 내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고 나는 목숨을 걸고 했다. 징계가 가볍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비상대책위원장 자리를 내놓을 테니 와서 징계를 마음대로 했으면 한다. 정말로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있다.” (2017/03/16,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친박계 의원들의 징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점을 질문받자)
“우리 정당의 개혁은 당과 우리나라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피눈물 나는 과정이다. 고통이 헛되지 않도록 서로 힘을 합쳐서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살을 아물게 해 새로운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2017/02/13,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당명 개정과 강령 개정안 등을 의결하면서)
“무슨 책임을 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렇게 결정해야 명예로울 수 있다.” (2016/12/30,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된 뒤 친박 핵심세력의 탈당을 촉구하며)
“제정신인지 모르겠다. 동상이라는 것을 옛날 어렸을 때인 자유당 시절에 봤다.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있었는데 시위하는 사람들이 새끼줄로 끌어내려서 끌고 다녔다.” (2016/11/03,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박정희 출생 100년 기념사업회가 서울에 박정희 동상을 건립할 계획을 발표한 점을 비판하며)
“성추행과 성희롱은 한나라당 시절부터 심하게 앓던 병인데 새누리당에서도 다시 도졌다. 내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으로 있을 때 이 문제 때문에 많이 고생을 했지만 그때 일벌백계를 해 많이 개선됐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무튼 유감스러운 일이다.” (2015/08/04, TBS교통방송 ‘퇴근길 이철희입니다’ 인터뷰에서 성폭행 의혹을 받던 심학봉 새누리당 의원이 탈당한 것을 비판하며)
“측근 중의 측근으로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주변에 배치해야 한다. 썩어빠지고 무능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무너지지 않은 이유가 뭔가. 사간원이다. ‘아니 되옵니다’ ‘죽이시옵소서’를 외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정권의 체질이 건강해진다.” (2013/02/14, 한겨레21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권의 성공요건을 제시하면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타임스퀘어에 사람이 많이 다닌다고 소통을 위한다며 거기서 대선출마를 선언했는데 거기가 어떤 자리인지 아는지 모르겠다. 타임스퀘어는 70년대에 경성방직과 방림방적이 있던 자리로 노동자들의 피눈물과 땀이 밴 곳이다. 박 전 위원장이 출정식에서 제시한 ‘행복’의 개념에도 한계가 있다.
잘 먹고 배부르게만 되면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천박하고 잘못된 것이다. 배부르다고 행복한 줄 아느냐. 국민은 돼지가 아니다.” (2012/07/12,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대선출마 선언을 비판하며)
“종북이란 기준도 애매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검증하겠다는 건지 납득하기 어렵다. 정치권의 종북 색깔 논쟁을 두고 새누리당이 좀 ‘오버’하는 것 같다.” (2012/06/12,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종북주사파 의원을 제명해야 한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을 놓고)
“일희일비하지 말고 긴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길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단기적 관점에서 옳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보고 세상을 볼 것인지가 중요하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구분도 필요하다. 무엇을 위해 권력이 필요하고 무엇을 위해 돈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2011/05/23,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한나라당이 망하는 건 괜찮은데 그러면 보수 세력이 함께 망한다는 게 문제다. 나는 북한 급변사태 등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보수 세력의 역할이 있다고 본다. 여당이 든든한 기둥으로 서있어야 나라가 유지되는데 당 지도부가 매일 회의하는 걸 보면 가려운 데는 놔두고 엉뚱한 곳만 긁고 있다. 따로국밥에 봉숭아학당이 따로 없다.” (2011/04/30, 중앙선데이 인터뷰에서 2011년 4월27일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한 뒤 심정을 묻자)
“우리나라 기독교는 근본주의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더욱 공격적이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으로 정착된 측면이 강하다. 이 정도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도 그동안 종교 간 갈등이 그나마 심각하게 표출되지 않은 것은 이웃 종교의 너그러움 덕이 크다.” (2011/03/01,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애당초 고향 사람들, 교회 사람들, 도와줬던 사람들을 멀리하고 좀 야박하고 냉정하다 하더라도 선거기간에 도와줬던 사람들을 딱 끊어야 했다. ‘뗏목을 타고 왔으면 버려야 한다’는 ‘뗏목론’이 있다. 이 대통령도 이렇게 생각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여간 지금까지는 그렇게 안 됐다.” (2010/07/19,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 인터뷰에서)
“한나라당 안에서는 당을 떠난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하니까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나라당에 대해 애정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권 창출을 놓고 도덕적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2010/04/14, 내일신문 인터뷰에서)
“미운털이 박혔다. 청와대로부터 두 번 경고를 받았다. 사람들이 청탁을 안 해서 편해졌다. 벼슬을 원하는 게 아니라 쓴소리를 하는 게 목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정부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2009/09/10, 시사인 인터뷰에서)
“보통 청와대 참모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우리가 정보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보가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고, 역사는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상식으로 움직인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 보면 정보부가 있고 막강한 권력기관들이 있으니 정권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 순리와 상식대로 간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권력은 정보기관이나 위성에서 보내주는 정보를 우선하는데 거기에 의존하면 망한다.” (2009/06/14,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자기하고 의견이 조금 다르면 ‘좌파다’ 이런 식으로 매도되는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참 안타깝다.” (2009/03/10, 불교방송 라디오 ‘김재원의 아침저널’ 인터뷰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인간미가 있어서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는데 청와대로 간 뒤 처음 2년은 조언을 경청했다. 그 다음부터는 자기 얘기만 계속하고 안 들었다. 그러더니 실수하고 망했다. 요새 주변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가서 얘기 좀 하라고 하는데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고 물리친다. 지금쯤 가면 대통령이 자기 말 하느라고 바쁜 만큼 대통령에게 충고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일단 대통령이 되면 나머지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의 몫이다.” (2008/05/15,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나는 정치평론가가 아니라 목사다. 이제 교회로 돌아가는 게 맞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 했는데 안 되는 걸 더 이상 어떻게 하나? 이제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낫겠다. 앞으로는 조용하게 살려고 한다.” (2008/05/04,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날 뜻을 밝히면서)
“상가가 되니 다 만난다. 합당했네, 뭐. 하지만 (친박세력이) 지금 오면 서로 싸워서 아무것도 안 된다.” (2008/04/11, 강재섭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부친상 자리에서 친박세력의 복당 문제에 관련해 강 대표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공천이 안 됐다고 쫓겨났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이렇게 경선 불복을 하고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나오거나 다른 당으로 나온다는 건 해당행위다. 이런 분들이 한나라당에 복당한다는 건 쉽게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그리고 당규에 의하면 이런 사람이 한나라당에 들어오더라도 공천은 못 받게 되어 있다. 이게 한나라당 당규이고 원칙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에 한나라당이 공천을 하면서 그렇게 했던 사람들에게 당규를 어기고 다 공천을 줬다.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경선 불복하고 나간 사람, 탈당한 사람, 다른 당으로 출마했던 사람들에 대해 당규대로 공천 안 준다고 엄격하게 했으면 이분들이 다시 들어올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 그렇게 안 했기 때문에 이분들이 복당하겠다고 한다면 무슨 명분으로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나.
이방호 사무총장이 절대 복당은 안 받아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으며 그런 말을 할 수도 없다. 지금은 복당한 사람들까지 공천을 주면서 복당을 안 받아주겠다는 게 말이 되나.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내가 윤리위원장으로 있는 동안에 복당은 안 된다.” (2008/03/26,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박근혜 당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친박연대는 한나라당에서 쫓겨난 사람들인 만큼 2008년 4월9일 총선 이후 복당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을 놓고)
“철새 정치인은 사람이 아니라 새다. 한나라당이 사람이 아닌 새를 공천하고 있다.” (2008/03/04,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당적을 바꾼 정치인의 공천을 비판하며)
“현재 지역구별로 진행되고 있는 4월 총선 후보 공천 심사가 철저하게 이명박-박근혜 계파 안배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식이면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찍지 않겠다.” (2008/02/20,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아직도 옛날식으로 정치를 하려고 하는 구태의연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다. 눈속임으로 또 일시적으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패거리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도덕적 윤리적 수준이 아직도 국민들 눈높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한나라당 내에는 과거 공화당 때부터 시작해 민주정의당, 신한국당, 민자당 등 과거부터 오랫동안 정치한 사람들이 많다. 정치를 오래한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지역적으로 한쪽의 지지를 계속 받다 보니 인적으로 정체돼 청산되지 않은 요소도 있다. 그런 부분을 과감하게 쇄신하는 것이 국민이 바라는 일이다.” (2008/01/02,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해)
“한나라당에서 20일마다 큰 사건이 터진다는 ‘20일 주기설’도 옛말이 되었고 지금은 윤리위원회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윤리위원회가 세간의 관심을 받으면 당내 사정이 어렵다는 것인데 요즘은 전화하는 기자도 없고 그만큼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당으로 바뀌었다.
다만 한나라당이 야당을 10년 했는데도 지역에 가면 지방자치를 통해 토호세력과 깊이 연결된 부패의 냄새가 난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높은 지지를 받지 못하며 설사 정권을 잡아도 얼마나 신뢰를 받을까 걱정이 된다.” (2007/10/25,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취임 1주년을 맞은 소감으로)
“나는 한나라당 당원도 아니고 박근혜 전 대표도 오늘 처음보고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행사장에서만 가끔 봤지 이렇게 한자리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캠프 내에 있는 참모들이 말씀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윤리위에 회부된 사람이 여러 명 있는데 바로 제명처리하기도 어렵고 고민이 많다. 말의 품위가 있으면 좋겠다. 내가 너무 어려운 지경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 (2007/06/25, 상생경선을 위한 한나라당 지도부와 대선후보 긴급간담회에서)
“이번 선거 결과는 한나라당이 오만한 모습, 부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데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다. 이번 일에 책임져야 한다면 책임질 마음이 있다. 50%대의 당 지지율도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 모습 그대로 정권 잡은들 국민들만 불행해질 뿐 아무 의미도 없다.” (2007/04/26, KBS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이몽룡입니다’에 출연해 한나라당의 4.25 재보궐선거 참패를 놓고)
“내가 계속 이렇게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지 답답하다. 당 윤리위원회가 이런 조치만 취할 게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윤리위원회가 근본적인 구조적, 제도적 문제에 접근 못하고 파생되는 문제를 뒤치다꺼리하는 상황이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탈당할 때부터 한나라당이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새롭게 각성하고 변화해야 하는데 무엇이 변했나. 대선 주자 한 사람이 당을 뛰쳐나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당이 충격을 받고 왜 나갔는지, 고쳐야 할 부분이 뭔지 반응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정말 여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나쁜 일은 다 나에게 떠맡기려고 데려갔나’라는 생각을 한다. 모르겠다. 너무 고민이 많다.” (2007/04/23,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싸움이 볼썽사납다.” (2007/01/23, 당시 한나라당 대선주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을 지적하면서)
“노무현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좌파는 그래도 품위가 있다. 정책이 있다. 그런데 어느 좌파 정권이 핵을 용납하느냐. 이 정권은 얼치기 정권, 전혀 준비가 안 된 정권이다.” (2006/12/19, 한나라당 국회의원 부인들을 대상으로 열린 ‘한나라당 이대로는 안 된다’ 워크숍에서)
“어떤 때는 나보고 위원장이니까 사회만 보라고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또 위원장은 대법원장이고 판결로 말하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다. 나는 초등학교 교장선생이고 담임선생이다. 사사건건 이야기할 생각이다. 나 때문에 골치 많이 아플 것이다. 개혁이 아픔이 아닌가.
한번은 강재섭 대표가 나보고 ‘너무 강성으로만 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강 대표에게 ‘아예 윤리위원장까지 겸임하라’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무 말 없더라.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말조심 하라고 하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도 내 입은 못 막았다. 징역살이 하면서도 할 말 다했는데 몇 사람 심기가 불편할 정도라면 왜 말을 못하겠나.” (2006/12/02,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질문받자)
“맞는 말이다. 송영선 의원이 목사들의 특징을 잘 간파한 것 같다. 송 의원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는데, 특별히 나 같은 경우는 그런 경향이 있다. 송 의원이 아주 사람 볼 줄 아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2006/11/22, KBS라디오에 출연한 자리에서 송영선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현직 목사인 오충일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장의 인사청문회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목사들은 자기 말이 절대권력인 줄 안다’고 말해 파문이 일어나자)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내게 ‘목사님,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면서요? 근데 목사님 보시기에 한나라당이 썩었죠? 희망이 없고, 냄새가 나죠? 그럼 왜 소금이 밖에서 썩었다고만 하나요? 소금이 필요한 곳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달라고 하는데 왜 거절하시나요? 세상 사람들의 생각처럼 한나라당이 그런 상태라면 목사님이 오셔서 바로 될 수 있는 역할을 해달라는데 왜 거절하십니까? 그건 상당히 위선적인 모습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도 한나라당의 잘못을 쉽게 욕했는데 직접 들어가 희생해서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6/11/08, CBS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 출연해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자리를 수락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한나라당이 변해야 나라가 변한다는 생각 하나를 가지고 윤리위원장직을 수락했다. 도덕선생님처럼 잔소리를 거침없이 하겠다.” (2006/10/23,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으로 내정된 뒤 문화일보와 인터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