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사진)이 정기 임원인사에서 쇄신 의지를 보였다. 사업군별 총괄 체제를 폐지하고 유통과 식품 계열사를 중심으로 대대적 인적 쇄신을 했으며 부회장단도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자리 변화가 적었던 유통과 식품 계열사의 수장들을 대거 바꿨다. 10년 가까이 유지한 사업 총괄체제도 폐지하고 이를 이끌어온 부회장들도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수년째 위기라는 소리를 듣는 처지인 만큼 나태해질 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신동빈 회장의 판단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26일 실시된 롯데그룹 정기 임원인사의 특징은 그룹의 모태사업처럼 여겨지는 유통과 식품 계열사를 중심으로 쇄신 인사가 실시됐다는 점이다.
롯데쇼핑에서는 대표가 3명이나 바뀌었다. 김상현 롯데그룹 유통군HQ 총괄대표 겸 롯데쇼핑 대표이사 부회장과 정준호 백화점사업부장(롯데백화점 대표) 사장, 박익진 이커머스사업부장(롯데온 대표)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 부회장과 정 사장 등 2명은 롯데쇼핑의 혁신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롯데쇼핑 최초로 최고경영자(CEO)에 선임된 외부 출신 인재라는 점이 이를 설명한다. 정 사장은 롯데그룹의 라이벌인 신세계그룹 출신이다.
실제로 김 부회장과 정 사장은 롯데쇼핑에서 변화의 바람을 주도했다.
정 사장은 취임 이후 한 달 만에 사내망에 글을 올려 “(조직문화는) 숨 쉬는 공기와 같다”며 “가장 부정적인 조직문화는 상명하복이며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고 시키기만 하는 사람은 더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롯데그룹의 수직적 조직문화를 꼬집은 셈이다.
김 부회장 역시 사내망에 편지 형식으로 “롯데가 갖춘 장점은 극대화하고 부족한 부분은 빠르게 개선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불필요한 허례허식을 과감하게 버리겠다”며 롯데그룹의 위기 극복을 위해 조직문화 개선부터 손대겠다는 뜻을 명확히 전달했다.
이번에 자리에서 물러난 이창엽 롯데웰푸드 대표이사 역시 미래로 가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순혈주의를 과감하게 버리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를 대변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 대표는 글로벌 회사를 두루 거친 해외사업 전문가로 꼽힌다. 내수 중심의 사업구조를 지녔던 롯데웰푸드가 해외 매출 비중을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 있었던 데는 이 대표의 경험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인물들을 선임 3~4년 만에 교체한 것은 다소 뜻밖이다. 그럼에도 신 회장이 변화를 선택한 것은 혁신의 바람이 한 차례 더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말이 재계 안팎에서 나온다.
롯데그룹은 2024년 말 정기 임원인사를 실시할 당시 주요 유통·식품 계열사의 CEO를 모두 유임했다고 강조했다. 전체 계열사 CEO의 36%를 무더기로 교체한 역대급 쇄신 인사였음에도 그룹의 모태사업만큼은 무풍지대였던 셈이다.
당시 롯데그룹은 “식품군과 유통군은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사업 전략의 일관성을 유지하되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해 사업실행력을 높인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년이 흐른 현재 시점에서는 과거 세웠던 방침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전략적 기조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직에 다시 긴장감을 불어넣고 변화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내부에서조차 “외부 출신 대표들이 선임된 초기만 해도 ‘변해보자’, ‘해보자’,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직원들 사이에서 많았다”며 “하지만 같은 CEO 체제가 오래 지속되면서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고 다시 예전처럼 일하는 것 같다는 말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는 말이 돌 정도인데 이를 바로잡으려면 쇄신이 필요했을 수밖에 없다.
신 회장이 이번에 실시한 인사의 또 다른 큰 특징은 부회장단을 없앴다는 점이다.
▲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전경. <롯데그룹>
김상현 부회장뿐만 아니라 이영구 식품군HQ 총괄대표 부회장 역시 앞으로 롯데그룹에서 볼 수 없는 인물이 됐다. 이 부회장은 2020년 11월 실시된 정기 임원인사 때 식품군HQ의 전신인 식품BU(비즈니스유닛) 장에 올라 6년째 식품 계열사를 총괄해왔다.
2020년 8월 롯데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롯데지주에 대표이사로 부임한 이동우 부회장 역시 이번 인사를 끝으로 그룹에서 더 이상 역할을 맡지 않기로 했다. 이 부회장은 롯데그룹 핵심 참모 역할을 했던 황각규 전 부회장의 후임으로 롯데지주의 유일한 전문경영인 부회장으로 일해왔다.
롯데건설의 재무를 안정화하기 위해 구원투수로 투입됐던 박현철 롯데건설 대표이 부회장 역시 이번을 끝으로 용퇴했다.
부회장단이 한 번에 물갈이된 것은 그만큼 이번 인사의 쇄신 폭이 컸다는 점을 의미한다.
롯데그룹이 2017년 비즈니스유닛 체제, 2022년 헤드쿼터 체제를 도입하면서 유지해온 사업군별 총괄 체제를 폐지하기로 가닥을 잡으면서 이런 역할을 맨 윗단에서 수행해왔던 부회장들을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롯데그룹은 “젊고 새로운 리더십 중심으로 혁신의 문화가 확산할 수 있도록 4명의 부회장이 용퇴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롯데그룹은 앞으로 사업군 총괄대표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체제를 폐지하는 대신 대표이사와 이사회 중심의 자율경영과 책임경영에 더움 힘을 싣기로 했다. 오히려 이런 체제가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더욱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판단이 실린 것으로 풀이된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