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은 ‘채 모 해병대 상병 순직’ 수사 외압과 관련해 국방부 장관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고 있는데 윤석열 대통령의 개각 구상에 차질을 빚는 사태를 막으면서 수사 외압 논란의 확산을 조기 진화하려는 대응책으로 풀이된다.
▲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9월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12일 정치권과 KBS 등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종섭 장관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에게 직접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이날 “이 장관이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들었다”며 “최근 정치권서 탄핵 얘기가 거론되는 상황에서 장관으로서 안보 공백 사태를 우려해 결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이 장관의 사의 표명 여부와 관련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국방부를 비롯해 문체부, 여가부 등 일부 장관 인사를 앞두고 있어 말을 아끼는 것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장관의 사의 표명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인사 관련해선 발표 전까지 추가로 언급하지 않는다”며 “만약 인사가 난다면 인사 발표할 때 왜 이번 인선이 이뤄지고 후임자를 왜 선택했고 정책방향이 어떻게 될지와 관련해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다만 이 장관이 이날 오후 일부 부대의 고별 순시에 나선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이 이 장관의 사의를 사실상 수용했다는 해석에 무게가 쏠린다.
이 장관의 사임 소식이 들리자 야권에선 즉각 반발했다.
김희서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국회 소통관에서 진행한 브리핑을 통해 “경질돼야 할 사람이 사의표명으로 책임을 빠져나가는 꼴”이라며 “대통령 주변에서 국방부장관 개각 교체설이 이미 흘러나왔는데 주거니 받거니 하며 사의를 표명한 것은 수사 은폐와 외압을 감추고 덮으려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자 꼬리 잘라 빼돌리기”라고 비판했다.
이종섭 장관의 갑작스런 사의 표명엔 더불어민주당에서 ‘채 모 해병대 상병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해 이 장관 탄핵을 추진하기로 한 일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보유한 만큼 당론으로 탄핵을 진행하면 이 장관이 탄핵 절차를 회피할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앞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 과정에서도 이를 당론으로 채택한 뒤 사실상 단독처리를 강행했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월11일 국회 본청 앞 단식투쟁 천막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1일 입장문을 통해 “국방부 장관 탄핵은 국민의 명령”이라며 “민주당은 이종섭 국방부 장관을 탄핵한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 주 대정부질문 과정에서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법을 어기고 부당하게 수사에 개입한 사실이 낱낱이 드러났다”며 “장관을 해임하지 않은 것은 수사 외압이 대통령 지시였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국회에서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이종섭 장관 탄핵소추 방침을 논의한 뒤 당론으로 채택하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장관이 사의를 표명했다는 소식을 듣자 관련 논의를 14일로 미뤘다.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의원총회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사의 표명을 했지만 아직 공식 교체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고려해 의총에서 다시 한 번 논의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회법에 따르면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되면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장관 직무가 정지된다. 국방부는 장관이 공석인 상태에서 운영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앞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탄핵으로 직무정지가 되면서 올해 집중호우 대처 과정에서 행정 공백의 여파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 장관 사의 표명에 탄핵 추진이 직접적 원인이 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이 장관은 KBS와 통화에서 “안보 공백만큼은 막기 위해서 깊은 고민을 했다”며 “먼저 사의를 표명하지 않으면 (정부에) 엄청난 부담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말 진정성 있게 일을 하려고 했는데 참 어려웠다”며 “일부 언론과 정치권 등의 공세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더해 윤석열 대통령의 개각 기조가 선명했던 것 또한 이종섭 장관이 자발적으로 선제적 조치에 나선 이유 가운데 하나로 풀이된다. 장관 탄핵 절차가 진행되고 있을 때는 대통령이 장관 임명 권한을 행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이르면 13일 일부 개각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후임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 등이 거론된다.
다만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해 자잘못을 가려 책임지는 대신 장관의 자진 사임으로 문제를 마무리하는 방식을 놓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는 정권 초기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만 5세로 낮추는 정책을 추진하다 논란이 커지자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자진 사퇴하는 형식으로 해당 문제를 무마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종섭 장관의 사의 표명과는 상관없이 채상병 수사 외압 의혹 진상 규명에 화력을 집중시키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박 전 부총리 때와 달리 이번엔 이 장관의 사임만으로는 문제가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한규 원내대변인은 “탄핵안이 반드시 추구해야 되는 절차는 아니고 우리 목표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제재다”며 “내일 법사위 현안질의를 통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특검법 추진을 통해서 국방부 장관 교체가 되더라도 외압 관련자들의 책임은 계속 확인·추궁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