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한국 정부가 반도체와 배터리 등 첨단 산업에서 미국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는 동시에 중국과 관계 악화를 피하려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

두 강대국 사이에서 한국이 전략적으로 시간 끌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중국 권력 '서열 3위' 리잔수 상무위원장의 한국 방문이 변곡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시각도 고개를 든다.
 
한국의 미국과 중국 사이 줄타기, 중국 '서열 3위' 리잔수 방문이 변곡점 될까

▲ 윤석열 대통령(왼쪽)이 9월1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리잔수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맞이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19일 “한국이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 정부와 관계 악화에 불만을 내놓고 있다”며 “미국에 대한 한국 정부의 신뢰가 위기에 놓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바이든 정부가 인플레이션 완화법 시행 과정에서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일부 기업의 전기차를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한 점을 두고 두 국가 사이에서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중국과 전기차 및 배터리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목표를 두고 미국 내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지원금을 제공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의 말을 인용해 “미국 정부는 한국 기업을 확실하게 차별하고 있다”며 “이런 행동은 한국에서 감정적, 정치적 반발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반도체 지원법 시행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의 중국 반도체 시설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도 한국과 뚜렷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는 영역이라고 전했다.

안 본부장은 한국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보복에 나서는 등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은 피하려 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다면 유연한 전략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 정부가 그동안 중국과 다소 거리를 두면서 미국과 배터리, 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서 협력 강화를 적극 추진해 왔지만 이런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미국과 중국 사이 경쟁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갈수록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있다고 바라봤다.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에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국가인 만큼 두 강대국 사이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될수록 한국이 균형을 잡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 본부장은 중국 정부가 직접적으로 한국의 주요 산업에 개입하려 하는 점,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을 차별하고 있는 점이 모두 한국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 양측에서 한국을 향한 압박이 거세질수록 앞으로 한국의 외교 및 무역 정책에도 영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이런 상황에서 당장 어느 한 쪽 편을 들거나 미국 또는 중국과 관계 악화를 감수하기 어려워 최대한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이런 시점에 중국 권력서열 3위로 꼽히는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한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 등 정부 관계자와 만났다는 점에 주목했다.

글로벌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반도체 등 산업에서 한국을 압박하고 있지만 아직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며 “한국이 중국과 거리를 두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에 협력을 추진하며 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서 중국과 교역을 축소하는 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글로벌타임스는 전문가 분석을 인용해 한국 반도체기업들이 미국의 압박에도 중국 내 반도체공장 가동을 축소하거나 중국과 반도체 무역 거래를 줄일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다만 한국 정부가 미국의 거센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어 최대한 시간을 끄는 태도를 이어가려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한국이 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 쪽과 관계를 강화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면 반대편에서 한국을 향한 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최대한 눈치를 보면서 타격을 최소화하려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리잔수 위원장의 한국 방문이 한국의 외교적 태도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고개를 든다.

리잔수 위원장은 중국 정부를 대변해 한국 정부 관계자들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관련한 논의를 진행하는 데 적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한국 정부의 태도를 확실히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과 자유무역협정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이는 미국 정부의 압박에 반발한 셈으로 볼 수 있고 중국과 협력에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미국의 편을 들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국익을 우선시하겠다는 태도를 유지하며 미국과 중국 양쪽의 압박에 확실한 입장 표명을 피해 왔지만 이처럼 시간을 끄는 일이 계속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른 시일에 진행될 미국 주도의 반도체 국가 연합 ‘칩4 동맹’ 예비회의 역시 한국 정부가 앞으로 반도체산업에서 미국이나 중국과 협력에 관련해 더욱 확실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타임스는 “한국 정부는 미국과 중국 어느 한 쪽을 적으로 두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시간을 지연시키는 전략을 써 왔지만 점점 더 거센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