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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Who] 한라그룹 흥망성쇠 다 겪어, 정몽원 그룹 재건 분투하다

남희헌 기자 gypsies87@businesspost.co.kr 2021-05-20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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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그룹은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겪었다.

창업주인 정인영 회장은 정부의 입김으로 무너졌던 그룹을 재계 12위까지 올렸다.

하지만 정몽원 회장의 2세시대가 시작됨과 동시에 IMF 위기를 겪으면서 그룹이 공중분해 되는 시련을 겪었다가 다시 만도를 인수하며 재건의 신호탄을 쐈다.

한라그룹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 정인영이 키운 한라그룹, “중화학공업에 한국의 미래 달렸다”

한라그룹의 모태는 1962년 설립된 현대양행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인 정인영 회장이 세웠다.

정인영 회장은 동아일보 기자를 하는 등 한때 언론인을 꿈꿨으나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미군 통역장교로 근무하면서 서서히 진로를 틀었다.

정 회장은 자서전에서 “전쟁이 나를 사업가로 바꿔놓았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발주하는 공사를 형인 정주영 회장이 수주할 수 있게 다리를 놓으며 기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정인영 회장은 전쟁 중인 1951년 향후 현대건설에 합병되는 현대상운의 전무로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전쟁이 끝난 뒤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합류해 1961년 현대건설 사장까지 올랐다.

정인영 회장이 형의 품을 떠나 독립적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현대건설 사장을 지낼 당시 미국 AID차관을 얻은 뒤 AID의 소개로 미국 보스턴의 첨단 기계공업 현장을 둘러보고 큰 충격을 받은 때부터였다.

정인영 회장은 “나는 그때 한국경제의 미래가 바로 중화학공업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며 “그렇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중공업이다”고 회고했다.

중공업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통해 만든 회사가 바로 현대양행이었다. 정 회장은 처음 무역업부터 시작해 1964년 만도기계의 전신인 현대양행 안양공장을 세웠고 1969년 자동차부품분야로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했다.

그는 이후에도 한라건설과 한라자원, 인천조선, 한라시멘트 등을 설립하며 그룹의 토대를 다져나갔다.

하지만 새길을 걷기 시작한 지 20년도 지나지 않은 1979년 정인영 회장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정부는 1979년 발전설비의 과잉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중화학공업 투자조정대책’을 발표하는데 이에 따라 현대양행은 강제로 쪼개져 다른 기업에 넘겨진다.

한라그룹은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신군부의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조치로 한라그룹의 자동차사업은 현대로, 발전설비 제작부문은 대우로 넘어간다.

◆ 만도기계 성장으로 한라그룹 재건한 정인영, 재계 부도옹(오뚝이)으로 불리는 이유

1980년 8월 정인영 회장에게 남은 사업체는 만도기계와 한라해운, 한라자원, 한라시멘트, 인천조선 등 5개 기업뿐이었다.

정 회장은 대우에 넘어간 발전설비 제작부문(당시 한국중공업, 현재 두산중공업)에 합류하기를 포기한 임직원 18명과 함께 압구정동 자택에 모여 이곳을 ‘재기의 거점’으로 삼아 시련을 뚫고 나아갈 채비를 갖추는 계기로 만들기로 했다.

현대양행 시절부터 자동차부품에 특화한 안양 공장의 이름을 ‘인간은 할 수 있다’는 뜻을 담은 ‘만도(Mando)기계’로 바꾸며 새 법인으로 독립시켰고 1980년대 후반기에 만도기계는 연간 150만 대의 자동차를 조립할 수 있는 자동차부품 선도기업으로 성장했다.

정 회장은 자동차 핵심부품인 공조기기의 성장성을 내다보고 1986년에 미국 포드와 50대 50으로 합작해 알루미늄라디에이터를 생산하는 한라공조를 만들기도 했다.

정 회장의 중공업에 대한 뚝심은 1990년대 들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다 무너졌던 그룹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국내외 경제계와 관심의 집중이 시작됐는데 그 중심에는 만도기계의 급성장이 있었다.

한라그룹은 급기야 1996년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재계순위 12위의 대기업집단에 오르기도 했다.

한라그룹 50년사를 보면 정몽원 회장은 아버지를 돌이키며 ““중공업으로 산업보국을 해야 한다는 아버님의 신념이 굉장히 강했다”며 “재기할 때 만도의 성장이 큰 힘을 보탰지만 아버님의 중공업에 대한 애착은 ‘자서전’에서도 표현되어 있듯이 중후장대한 중공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크기가 작은 자동차부품은 취급도 안 했다”고 한다.

정인영 회장은 1989년 7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몸이 불편해졌는데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해마다 평균 200여 일 넘게 해외출장을 다니면서 한라그룹을 일궜다. 정인영 회장이 “재계의 부도옹(오뚝이)”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정몽원의 계속되는 그룹 재건 도전

정인영 회장은 한라그룹을 창업한 지 35년 만인 1996년 12월24일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 둘째 아들인 정몽원 회장의 2세경영체제가 시작됐다.

하지만 정몽원 회장체제가 시작되자마자 한라그룹은 다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재계 12위의 그룹을 이끌게 됐다는 화제도 잠시 1997년 터진 IMF 외환위기로 무리하게 투자한 한라중공업이 휘청거리면서 다른 계열사까지 영향을 받았고 결국 그룹의 핵심인 만도기계까지 팔면서 사실상 그룹이 공중분해 된다.

한라그룹이 IMF 때 판 회사는 한라중공업(현 현대삼호중공업), 만도기계(현 만도), 한라펄프제지 등 18개였다.

한라그룹은 2000년에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30대 기업집단 지정에서 탈락하기까지 했다. 정몽원 회장에게 남은 것은 사실상 한라건설과 한라콘크리트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라그룹이 팔았던 계열사들 지분이 대부분 사모펀드 소유였다는 점이 한라그룹에는 기회가 됐다.

한라그룹이 1999년 만도 지분을 매각했던 대상은 미국계 사모펀드인 선세이지였다. 당시 한라그룹은 회사를 팔면서도 선세이지가 향후 지분 50% 이상을 매각할 때 주식을 우선 사들일 수 있다는 우선매수청구권을 걸어뒀다.

정인영 회장은 때만 되면 정몽원 회장에게 “만도를 꼭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런 의지가 회사를 팔 때부터 있었던 셈이다.

2003년부터 건설경기가 되살아나면서 한라건설 실적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2005년 선세이지가 만도를 팔겠다고 나서면서 한라그룹의 만도 인수 의지는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정몽원 회장은 범현대가인 KCC의 도움을 받아 2008년 초 그룹의 모회사나 다름없는 만도를 10년 만에 되찾아오는 데 성공한다.

한라그룹 재건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정몽원 회장은 만도 인수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인 임직원들과 함께 경기 양평에 있는 정인영 명예회장의 묘소를 방문해 참배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만도 인수를 통한 그룹 재건의 약속을 지켜냈다는 소회를 담담히 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몽원 회장의 그룹 재건 의지는 계속됐다.

그는 만도가 재상장된 2010년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그룹의 과거 계열사였던 한라공조는 자동차 핵심기술을 지니고 있고 1986년 창립 당시 임직원들이 많이 남아 있어 관심이 무척 많다”며 공개적으로 한라비스테온공조(옛 한라공조, 현 한온시스템)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한라공조는 한라그룹이 창업한 자동차 공조분야 글로벌 빅4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인수할 경우 만도와도 상당한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룹 재건의 의지는 또다시 좌절된다.

한라비스테온공조가 2014년 매물로 나오면서 정몽원 회장은 다시금 인수 의지를 불태웠지만 한앤컴퍼니와 한국타이어 컨소시엄에 밀려 완벽한 그룹 재건의 기회를 놓쳤고 그 다음부터는 만도 키우기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그리고 한온시스템이 최근 다시 매물로 나왔다. [채널Who 남희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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