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대외통상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
우리 정부가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를 놓고 중국·유럽연합(EU)과 달리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무역전쟁으로 비화하는 국면에서 몸집이 작은 우리나라가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은 데다 한미FTA 개정협상, 대북정책 공조 등의 현안이 얽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5일 대외통상관계장관회의를 긴급 소집해 수입산 철강에 25% 관세를 일괄 부과하는 등 미국 정부의 보호무역조치를 놓고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김은경 환경부 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등이 참석했다.
김 부총리는 “정부는 대외통상 상황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다”며 “3월 열리는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서 미국 등 주요국과 양자회담을 추진해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정부에 우리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의회, 주정부, 경제단체와 접촉해 설득노력을 강화할 것”이라며 “민간과 공동대응하고 산업 전반의 체질을 개선해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김 부총리가 미국과 장관급 양자회담을 열고 통상압력에 대응하겠다고 했으나 중국·EU 등 다른 나라들과 대응 수위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미국을 상대로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무역흑자를 내는 중국과 EU는 미국의 보호무역조치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왕허쥔 중국 상무부 무역구제조사국장은 미국이 수입 철강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 중국도 미국산 수입품에 긴급수입제한(세이프가드) 조치를 발동하겠다고 경고했다.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할리데이비슨, 버번, 리바이스 등 미국 제품과 오렌지 등 농산품에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중국과 EU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 달리 우리 정부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아웃리치(외부접촉) 활동을 강화해 미국 내 여론을 움직이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가 통상협정을 위배하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다는 계획도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WTO 제소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강제성도 없어 실효성이 크지 않다.
우리 정부가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이유로 우선 경제규모가 작고 대외의존도가 높다는 점이 꼽힌다. 중국이나 EU가 미국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의 13분의1, EU의 11분의 1, 중국의 8분의 1에 불과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EU가 보복 움직임을 나타내자 “유럽산 자동차에 세금을 적용하겠다”며 확전을 예고했다. 이처럼 보호무역조치가 무역전쟁 수준으로 확대되면 우리나라는 회복이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한미FTA 개정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그러잖아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FTA 폐기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우리나라를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조치에 맞불을 놓았다간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미FTA 폐기 명분만 제공하는 꼴이 될 수 있다. 폐기까지 가지 않는다 해도 한미FTA의 호혜성을 주장하는 우리 쪽 협상전략이 틀어져 개정협상이 어렵게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외교안보적 특수성이 따라온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의 중요성이 크다. 한미동맹의 틀 속에서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EU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다.
외교부는 2월 정례브리핑에서 “미국은 안보와 통상이슈를 구분해 접근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철강 관세 조치의 근거가 된 무역확장법 232조는 안보에 따라 통상을 제한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실질적으로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힘들다는 관측이 많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 EU 등의 반발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과 대화가 재개되면서 미국과 공조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어 섣불리 미국에 대립각을 세우기도 쉽지 않다. 북미대화와 남북정상회담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 미국과 관계에 신중해야 한다는 관측이 많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