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전환에 산유국 경제 붕괴 우려 커져, '연쇄 충격' 오기 전에 주요국 개입 목소리 잇달아

▲ 이라크 바스라 인근 해안에 한 유조선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해 갇혀 정박해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글로벌 재생에너지 전환으로 석유 수요가 급감할 경우, 산유국의 재정 붕괴가 벌어지며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이에 시장의 자율 조정에만 맡기면 발생하게 될 '무질서한 전환'의 피해를 막기 위해 주요 석유 수요국과 국제금융기구의 선제적 개입이 시급하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8일(현지시각) 국제 기후변화 연구 싱크탱크 E3G는 글로벌 에너지 전환이 진행되면서 산유국들이 겪게 될 경제적 문제에 관한 분석을 담은 '석유 엔드게임: 산유국과 수요 감소의 지정학'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에는 에너지 전환이 진행됨에 따라 산유국들의 경제가 붕괴하면서 연쇄적 충격이 발생해 지정학적 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담겼다.

나이지리아,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 주요 산유국 17곳은 정부 재정의 약 40% 이상을 석유 및 가스 수익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2030~2035년을 기점으로 석유 수요가 정점에 달한 후 하락하면서 이들 국가가 심각한 재정 악화에 직면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로 인해 산유국들은 국가 부채 위기, 환율 불안정, 투자금 이탈 등 거시경제 차원에서 여러 악재를 겪을 것으로 분석됐다.

E3G는 상황이 이렇게 되면 산유국들의 국가 재정 시스템과 공공 서비스가 붕괴하면서 대규모 소요 사태와 난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제재로 석유 수출길이 끊겼던 베네수엘라가 주요 예시로 꼽혔다.

그럼에도 산유국들이 산업 다각화를 통해 석유 수요 감소를 극복하기보다는 단기적으로 석유 생산을 극대화해 빠르게 현금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더 강하다는 점이 더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베스 워커 E3G 에너지 전환팀 선임 정책 고문은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산유국 정부들은 석유 수요 감소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거나 대비하지 않고 있다"라며 "산유국들이 스스로 석유 공급을 조정하도록 내버려 두고 시장을 자율에 방치하면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모두가 위험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에너지 전환에 산유국 경제 붕괴 우려 커져, '연쇄 충격' 오기 전에 주요국 개입 목소리 잇달아

▲ 이라크 바스라에 위치한 석유 정제 설비. <연합뉴스>

이에 E3G는 주요 석유 수요국인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인도 등이 국제 공조 체계를 통해 산유국의 위기를 방지하는데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구체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관이 산유국 부도 사태 이전에 선제적 금융 지원을 제공하여 이들의 산업 다각화를 도와야 한다고 분석했다.

E3G가 석유 수요국에 이 같은 역할을 요구한 이유로 향후 석유 공급망 내에서 수요국의 영향력이 산유국보다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되는 점이 제시됐다.

현재는 이란 전쟁 과정에서 호르무즈 해협처럼 '물리적 요충지'가 수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석유 수요가 축소되는 미래에는 보험, 해운 서비스, 금융 제재, 항만 접근 통제 등 규제적 권한을 가진 '서류상의 요충지'를 장악한 수요국의 지위가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에너지 전환 속도가 상대적으로 완만하고 제조업 비중이 커 미래에도 석유 수요가 비교적 높게 유지될 것으로 전망되는 한국, 일본 등도 이러한 수요국 주도권을 가지게 될 것으로 예상됐다.

앞서 영국 서식스대 세계정치경제연구센터도 지난 2월 논문 '전기 국가의 이해'를 통해 E3G와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서식스대 연구진은 "석유 수요 감소와 가격 불안정은 산유국의 재정 기반을 위협하고 좌초 자산(경제적 가치가 사라진 자산), 부채, 다양한 형태의 산업 고착 및 관성 등의 취약성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도 지난 4월 정책토론 문서 '무질서한 기후 전환의 관리 및 분석 - 세계 석유 시장의 무질서한 전환'을 통해 산유국 경제의 취약성을 지적했다.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석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진다면 글로벌 거시경제 안정성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무질서한 에너지 전환에 따른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도구 개발 및 정책적 개입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마리아 파스투호바 E3G 베를린 사무소 프로그램 책임자는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에너지 전환 속도를 늦추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느리고 혼란스러운 에너지 전환은 빠른 전환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더 큰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