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 활성화를 위한 ‘금산분리 규제 완화’ 논의가 촉발되자 신중론을 내세우며 사실상 제동을 걸고 나섰다.

주 위원장의 태도는 금산분리 규제 완화 가능성을 시사했던 이재명 대통령,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온도차'를 드러내는 것이다. 국가 전략산업 육성과 금융 안정성 확보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낼지 주목된다.
 
공정위원장 주병기 금산분리 완화에 '신중론'으로 제동, AI 대규모 투자와 절충점 모색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재계와 경제부처에서 거론되는 금산분리 규제 완화에 반대 입장을 나타내면서 향후 논의 결과에 관심이 모인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11월21일 정부세종청사 공정위 기자실에서 출입기자단 간담회를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25일 오전 MBC라디오 시선집중에 출연해 “금산분리 원칙이라는 게 모든 선진국이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산업과 금융의 위기 전이를 차단하기 위한 원칙”이라며 금산분리 완화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주 위원장은 이어 “우리나라는 총수 일가가 서로 관계없는 업종에 평균 40여개에 이르는 계열사를 지배하고 2세, 3세, 4세 세습하는 비정상적 경제를 유지하고 있다”고 금산분리 규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이재명 대통령이나 기획재정부의 인식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 대통령은 지난 10월 샘 올트먼 오픈AI CEO를 만난 뒤 “안전장치가 마련된 범위 내에서 현행 금산분리 규제를 재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은 금산분리를 포함해 첨단 전략산업 투자를 위한 규제 완화 실무 검토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19일 기자간담회에서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엄중한 환경 속에서 (규제 완화를) 안 한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선은 아니다”라며 금산분리 규제 완화 가능성을 거론했다.

이처럼 금산분리 규제 완화가 정부 경제부처 내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이유는 국제경제환경의 변화와 재계의 요구가 맞물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재계는 AI와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가 필수적인데 현행 금산분리 규제가 자금 조달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기업성장포럼에서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숫자들을 각 나라들이 투자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나'라고 할 정도의 숫자”라며 “규모뿐만 아니라 속도의 게임도 있는데 집중화된 자금과 플랜을 만들지 못하면 이 AI 게임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공정위원장 주병기 금산분리 완화에 '신중론'으로 제동, AI 대규모 투자와 절충점 모색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린 '제2차 기업성장포럼-기업성장이 미래다'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 미국의 차세대 AI 구동을 위한 인프라 구축 사업인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는 챗GPT 개발사인 오픈AI와 클라우드 기업 오라클, 일본 투자회사 소프트뱅크(SBG) 등이 4년 동안 최대 5천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736조 원을 투자한다.

인텔도 2022년 향후 10년 간 유럽연합(EU)에 800억 달러(135조5천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대규모 투자자금 조달을 위한 기업들의 규제완화 요구를 고려할 때 AI, 반도체 등 특정 산업에 한정해 △지주회사가 투자 전문 회사를 설립해 펀드를 조성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 △손자회사의 증손회사 지분 보유 요건 완화 등이 금산분리 규제 완화 방안으로 거론된다.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월17일 손자회사의 특수목적법인(SPC)에 ‘첨단전략산업기금’ 투자를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특히 손자회사의 증손회사 지분 보유 요건 완화는 SK하이닉스를 겨냥한 맞춤형 규제완화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오픈AI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설비투자를 대폭 늘려야 하는 상황인데 이 가운데 SK만 지주회사 체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주 위원장은 2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업들이 투자회사를 만들어서 (소프트뱅크 회장) 손정의씨처럼 여기저기 투자를 확대하고 이거는 좀 아닌 것 같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기업이 투자회사를 설립하게 되면 제조업 등 본업에 대한 투자보다 금융 및 자본 거래에만 치중하는 방식으로 기업 경영이 변질될 위험이 존재한다는 지적으로 풀이된다.

주 위원장은 이날 라디오 방송에서도 첨단전략산업 투자를 위한 특수목적법인 설립 허용에 관해 “공정거래법은 일반법이기 때문에 그것을 개정하는 것보다는 특별법을 한시적으로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정거래법 규제 주무부처의 수장인 주 위원장이 금산분리 규제를 직접적으로 푸는 것을 ‘최후의 카드’라 보고있는 만큼 논의 과정에서 재계나 기재부의 현실론과 절충점을 찾으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주 위원장은 금산분리 규제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기업의 대규모 투자금을 조달할 대안으로 정부의 첨단전략산업 기금을 언급했다.

주 위원장은 이날 라디오 방송에서 “정부가 첨단전략기금의 지분에서 후순위 채권 방식으로 투자해 민간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후순위 채권은 채권을 발행한 회사가 파산하거나 청산할 경우 변제(상환) 순위가 일반 채권자보다 뒤진 채권을 뜻한다. 즉 정부가 첨단전략산업에 들어가는 투자의 위험을 일부분 떠맡아 민간 자금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실제 재계도 금산분리 완화에만 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절충점을 찾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기업들이 금산분리 완화를 직접적으로 요구한다는 해석이 나올 것을 우려한 듯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해달라는 건 아니지만 이 숙제를 해낼 수 있는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