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야권이 단독의결한 양곡법을 비롯한 농업 4법안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문제를 두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한덕수 권한대행으로서는 이 법안들이 그간의 정부 정책기조를 뒤집는 내용을 담고 있어 거부권을 행사할 필요성은 있다. 하지만 권한대행을 맡은 초반부터 거부권을 행사했다가 탄핵정국 내내 거대 야당과 불편한 관계로 지내게 될 수 있다는 점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한덕수 양곡법안 거부권 고심, 정책 일관성 지키자니 야당과 관계악화 부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1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17일 정치권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한 권한대행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양곡법을 비롯한 농업 4법안의 거부권 심의 안건을 보류하고 이르면 오는 19일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다시 심의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로선 한 권한대행이 기존 정부 정책의 기조를 고려해 양곡법 포함 농업 4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농업 4법이란 '양곡관리법(양곡법)'과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 '자연재해대책법(재해대책법)', '농어업재해보험법(재해보험법)'의 개정안을 말한다.

식량주권 보호를 비롯해 △쌀 가격 안정화 △농가 생활 안정 △기후위기 대응 등의 내용을 담았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진보당, 사회민주당 등 야4당은 지난 11월28일 농업 4법을 야당 단독으로 의결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농업정책 기조와 충돌하는 부분이 있어 정부와 여당의 반대에 부딪혀 있다.

윤석열 정부는 시장원리에 입각한 농업과 농촌 개혁을 추진해왔으며 특히 쌀 가격과 관련해서는 직접개입을 줄이고 벼(쌀)재배 농가를 도태시켜 초과생산량을 줄이는 식으로 안정화하는 정책을 펴왔다.

송미령 농리축산식품부 장관은 지난 11월28일 브리핑을 열고 "농업4법은 시행이 곤란할뿐 아니라 다른 법률, 기존 제도와 충돌하고 국제 통상규범 위반, 수급 불안 심화, 막대한 재정 부담 등의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4월에도 야당이 단독의결한 양곡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적이 있다.

당시 한덕수 국무총리는 △시장의 수급조절 기능 마비 △쌀 수매에 연간 1조원 이상의 재정 부담 △해외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밀 콩 등 다른 작물 생산 저해 등을 들어 대통령에게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다.

현재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 탄핵소추에 따른 직무정지 상태에 있지만 한 권한대행이 기존 정부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대통령의 권한인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농업 4법안 외에도 '국회증언 감정법'과 '국회법' 개정안도 거부권 대상으로 거론된다. 

국회증언 감정법은 개인정보나 영업비밀 보호를 이유로 정부가 국회에 자료제출을 거부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국회법 개정안은 정부예산안이 여야 합의를 이루지 못할 때 자동으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도록 하는 것을 폐지하는 내용이 뼈대다.

민주당 내부에선 정권이 바뀌면 이 두 법안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이견도 있어 한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를 묵인하자는 의견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국회의 정부 견제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견해에 따라 결국 가결시켰다는 점에서 거부권 행사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우세한 상황으로 파악된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정국에서도 고건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2개 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적이 있다. 국민의힘 측은 이같은 과거 사례를 들어 한 권한대행에게 적극적 거부권 행사를 주문하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당대표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16일 당 의원총회에서 "한덕수 권한대행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법과 법률 원칙이 정한 범위 내에서 당당히 권한을 행사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최형두 국민의힘 의원은 17일 YTN라디오 뉴스파이팅에 나와 "한덕수 총리가 양곡법 등에 대해 국무회의에서 반대했던 것이 단순히 윤석열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서가 아니다"며 "시장경제 원리와 농민에 대한 소득보전 사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문재인 정부를 포함해 우리 정부가 줄곧 견지해오던 원칙"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거대야당과 관계 악화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은 한 권한대행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배경인 것으로 분석된다. 탄핵 정국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한 권한대행은 15일 우원식 국회의장을 예방한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일상이 흔들림 없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라며 "정부는 이를 위해 국회와 긴밀히 협력하고 소통하겠다. 정부가 먼저 협조를 구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에서는 한 권한대행의 거부권 검토 움직임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7일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를 통과한 법안들에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전망이 나오는데 사실이라면 큰 착각을 하고 있다"며 "소극적 권한행사를 넘은 권한 행사는 갈등만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덕수 양곡법안 거부권 고심, 정책 일관성 지키자니 야당과 관계악화 부담

▲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2004년 5월11일 서울 종로구 정부중앙청사(현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앞서 국무위원들과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권한대행 자신이 내란죄 관련 수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도 거부권을 행사에 껄끄러운 지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내란죄를 수사하고 있는 경찰 국가수사본부 특별수사단은 지난 11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직전 국무회의에 참석한 한 권한대행에게도 피의자 신분 출석을 통보했다. 한 권한대행은 13일 긴급 현안질의에서 "수사 절차에 따라서 잘 협력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당초 내란죄 수사대상인 한 권한대행에도 책임을 물어야한다는 입장이었으나 국정안정을 위해 일단 국무총리의 권한대행 체제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부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민주당과 관계가 틀어진다면 당장 윤 대통령에 집중된 책임추궁이 한 권한대행을 향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5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대한민국 정상화가 시급하다"며 “당내에 한 권한대행을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지만 국정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일단은 그리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직무 대행은 교과서적으로 보면 현상 유지 관리가 주 업무이고 현상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대행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당내 분위기를 고려할 때 한 권한대행이 국회와 대립각을 세운다면 내란 혐의와 관련해 민주당을 중심으로 탄핵을 추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한 대표가 임시국무회의 법안심의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는 다가올 '쌍특검법' 거부권 행사 여부에서도 가늠자가 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민주당은 지난 12일 '윤석열 정부의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행위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내란 특검법)'과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의 주가조작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김건희 특검법)'을 의결했다.

민주당은 이 두 특검법안에 대해서는 한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일에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박성준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시선집중에 나와 “의회 권력이 행사한 입법권에 대해서 국민의 선택을 받지 않은 단순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탄핵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며 “여러 법률에 대한 것이 있겠지만 가장 핵심은 내란 특검과 김건희 특검법”이라고 말했다.

김용민 원내정책수석부대표는 17일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한 권한대행은 두 특검법을 즉시 공포해야 한다"며 "윤석열 대통령처럼 거부권을 행사하면 한덕수 권한대행도 사실상 내란공범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한 권한대행이 정치적 쟁점이 큰 법안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정책적 사안에 선택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정치권에서 흘러 나온다. 조충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