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의정 갈등 해결을 위한 여야의정협의체가 제안 뒤 한달 이상 지나도록 출범조차 못하는 사이 ‘응급실 뺑뺑이’로 대표되는 의료공백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완강히 버티는 의료계를 여야의정협의체 대화자리로 이끌기 위해 의료수가 인상을 제안할 가능성이 나온다.
 
의료 공백에도 의정갈등 장기화, 복지장관 조규홍 설득카드 '수가 인상'  꺼낼까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18일 정치권 이야기를 종합하면 조규홍 장관이 의료계 설득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카드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대한 국고지원 확대를 통해 의료수가를 인상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의료수가란 건강보험공단이 의료서비스 제공자에게 의료행위에 대해 지급하는 비용을 의미한다. 환자 본인이 10~30%를 부담하면 나머지를 건강보험공단이 지급하므로 의료수가 구조에 병원의 수익성이 좌우된다.

의료수가를 인상하려면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국민의 병원진료비를 뒷받침하는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은 국민이 직접 납부한 보험료와 국고지원분으로 구성된다. 

건강보험료를 인상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은 만큼 국고지원 확대가 의료수가 인상에 필요한 현실적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이미 7월 건강보험료율 동결(7.09%)을 확정짓기도 했다.

정부가 건강보험재정에 대한 국고지원 확대를 통해 의료수가 인상 문제를 내세우면 여야의정협의체 참여를 위해 의료계를 설득한 명분이 될 수 있다.

의료수가 인상은 의료계의 숙원이다. 의료계는 국민건강에 필수적인 분야이지만 의사들이 지원을 꺼리는 흉부외과와 소아과 등에 대한 의료수가 현실화를 역대 정부에 요구해왔지만 그동안 논의가 지지부진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의대 정원 확대를 포함한 대대적인 의료개혁에 나서자 의료계에선 의료수가 현실화를 강력해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정부와 의료계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5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진행한 2025년도 수가협상에서 의료수가 10% 인상안을 담은 ‘2025년 수가계약 요구안’을 내놨다. 

최안나 대한의사협회 이사는 당시 "적정 수가가 있어야 국민이 양질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부는 2025년도 수가 인상률을 1.6%로 정했으며 지난 7월에는 건강보험료율도 7.09%로 동결했다. 하지만 지난 2월부터 8개월 이상 이어진 의료 공백 문제를 풀기 위해 정부로서는 의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처지가 됐다.
 
의료 공백에도 의정갈등 장기화, 복지장관 조규홍 설득카드 '수가 인상'  꺼낼까

▲ 대한의사협회 임현택 회장과 최안나 대변인이 9월21일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전공의를 면담한 뒤 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의 2천 명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패키지 도입에 반대해 전공의 사직을 비롯한 의료계의 집단행동이 지난 2월 시작되면서 전국적으로 의료공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국민 피해가 누적되고 현장에 남은 의료진은 과부하를 겪고 있는 상황이다. 치료해 줄 병원을 찾아 응급환자가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길 위에서 사망하거나 계속된 24시간 운영을 견디지 못한 일부 병원이 응급실 운영을 중단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회장은 지난 8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 나와 “환자들의 생명이 의정갈등으로 희생돼도 되는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며 “지난 8개월 동안의 환자 피해는 누구도 보상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9월6일 여야의정협의체를 제안했지만 한 달여가 지나도록 구성조차 못하고 있다.

의료계에선 여야의정협의체 참여의 전제조건으로 2025년 의대 증원 철회를 주장하고 있으나 입시 절차가 진행되고 있어 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이에 보건복지부가 건강보험공단에 대한 국고지원 확대를 통한 의료수가 정상화를 내걸어 의료계 대화참여를 이끌어내는 편이 더 현실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물론 건전재정을 최우선순위에 둔 기획재정부와 대통령실을 설득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있지만 시급하게 의료공백을 해소해야 할 필요성이 높다는 점에서 명분은 충분이 갖춰진 것으로 분석된다.

이미 응급의료체계 유지를 위해 정부가 지불한 비용이 만만찮은 상황이다. 

정부는 의료공백 해소를 위해 월 1천억 원 이상의 지원액을 투입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정부가 사용한 국민건강보험 재원만 해도 1조 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건강보험공단 국정감사에서 "의료공백이 더욱 장기화하면 2025년부터 건보 재정수지가 적자로 전환되고 2028년에는 안전준비금이 고갈돼 굉장히 심각한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규홍 장관은 2022년 장관 임명직후부터 국민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국고지원 제도를 이어가자고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의료공백 상황을 자신의 소신을 펼칠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조 장관은 2022년 12월 첫 기자간담회에서 "국민건강보험재정에 대한 국고지원을 존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2024년 5월에 열린 의료개혁 토론회에서는 "보건의료가 국가의 본질적 기능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건강보험뿐만 아니라 정부 재정을 과감하게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구나 야당에서 발의한 국민건강보험재정에 대한 국고지원을 확대하도록 하는 국민건강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계류돼 있어 정부로선 입법 차원의 부담도 덜 수 있다.

법안을 발의한 소병훈 민주당 의원은 "장기간의 의료대란으로 건강보험 재정 파탄에 대한 국민적 우려가 큰 만큼 정부는 재정 안정화를 도모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조충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