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준 기자 hjkim@businesspost.co.kr2024-01-21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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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삼성그룹 오너가에서 상속세 납부를 위해 약 2조7천억 원 규모의 주식을 매각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지나친 부담을 명분을 내세운 상속세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공약 가운데 하나로 상속세 개편을 내세웠으나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최근 관련 논의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결국 상속세 제도 개편 논의는 총선 이후 정치 지형도에 따라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2023년 10월19일 경기도 용인 삼성전자 인재개발원 콘서트홀에서 열린 '이건희 선대회장 3주기 추모 음악회'에 참석하고 있다. <삼성전자>
21일 재계 및 학계에 따르면 부의 양극화를 막기 위해 도입된 상속세가 대한민국 저성장 장기화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며 제도 개편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경제·경영학과 교수 211명을 대상으로 최근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0.6%가 상속세 최고세율(50%)을 낮추거나 폐지한 뒤 자본이득세로 전환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상속세 문제는 기업 활동의 활력을 낮출 뿐 아니라 특히 외국인의 한국 투자를 저해하는 주요한 요소로도 꼽힌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앤드컴퍼니(맥킨지)는 지난해 12월 보고서를 통해 “기업은 투명한 이사회를 구축하고 배당·자사주 매입 등 적극적인 주주 환원책을 도입해야 한다”며 “정부도 상속세 부담 감소 등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대주주가 증여·상속 때 세금을 덜 내려고 주가 상승을 회피하려는 것을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상장 기업 주식의 저평가 현상)의 핵심 요인으로 짚은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의 오너가도 상속세 문제로 애를 먹고 있다.
삼성전자는 15일 공시를 통해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삼성전자 보통주 모두 2982만9183주(약 2조1900억 원)를 블록딜(시간 외 대량 매매)했다고 알렸다.
매각 지분은 홍라희 전 관장이 1932만4106주, 이부진 사장이 240만1223주, 이서현 이사장이 810만3854주였다. 이부진 사장은 삼성전자 외에도 삼성물산, 삼성SDS, 삼성생명 지분도 추가로 처분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 별세 이후 삼성전자 일가는 상속세로 약 12조 원을 신고했다. 이들은 상속세 연부연납제도를 활용해 2021년부터 5년에 걸쳐 상속세를 분할납부하고 있다.
이들은 애초 주식담보대출을 통해 해결하려 했으나 이자 부담이 커지자 결국 이재용 회장을 제외한 오너가에서 삼성전자 주식을 매도했다.
상속세 문제는 정부가 게임회사 넥슨의 지주회사인 NXC의 2대 주주로 오르는 해프닝도 일으켰다. 고 김정주 넥슨 창업자 유족이 상속세 납부를 위해 29.3%(약 4조7천억 원)의 NXC 주식을 정부에 물납했기 때문이다.
▲ 2021년 12월1일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선거 후보가 충남 천안 충남북부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기업인 간담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에 상속세 개편을 대선공약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다. 하지만 올해 총선을 앞두고 개편 논의가 현재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황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2월1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충남북부상공회의소 기업인 간담회에서 "상속세 부담 때문에 기업이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며 "기업이 영속성을 갖고 잘 운영돼야 근로자의 고용안정도 보장된다"고 말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은 당선 이후 상속세 개편 작업을 추진했다. 기획재정부는 2022년 9월1일 상속세 유산취득 과세체계 도입을 위한 법제화 방안 연구’ 용역에 입찰 공고를 냈다.
추경호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또한 2022년 7월 세제 개편안을 발표하며 "전반적인 상속 세제 개편 문제는 사회적으로 많은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라면서도 "올해 하반기에 집중적으로 개편 작업을 시작해 전면적인 검토를 통해 2023년 중으로 상속세를 유산세에서 유산취득세로 개편하려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상속세 논의를 ‘너무 큰 작업’이라고 보고 개편을 미루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최근 공개한 2024년 경제정책방향에도 상속세 개편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
최영전 기획재정부 재산세제과장은 지난해 8월22일 국회에서 열린 ‘기업존속을 위한 상속세제 개편 세미나’에서 “70년이 넘게 이어져 온 상속세이기 때문에 근본적 틀을 바꾸는 것을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2023년 12월17일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인사청문회 답변서를 통해 “상속세 개편은 사회 각계각층과 긴밀히 소통하고 충분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추진해야 할 사안”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올해 4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상속세 개편을 논의했다가 자칫 부자감세 논란에 휩싸일 수 있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최근 성명을 통해 “경제단체의 상속세율 인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정치권은 소수 자산가를 위한 입법·행정을 멈추고 민생을 촘촘히 들여다보길 바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상속세 제도 개편은 법률 개정이 필요한 만큼 정부는 올해 총선 결과를 지켜본 뒤 다시 논의의 불씨를 살려 나갈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상속세 개편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 언론 텔레그래프 등의 보도에 따르면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올해 3월 발표할 예산안에 상속세 폐지 문제를 담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부자 감세 등의 논란을 의식해 총선을 앞두고 상속세 논의가 지지부진해진 한국과 달리 수낙 총리는 총선 전략의 하나로 상속세 폐지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낙 총리는 상속세 폐지 등 감세 정책을 통해 0%대에 그친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10월 영국의 2024년 국내총생산(GDP)가 0.6% 증가하는데 머물 것으로 추산했다.
영국 언론 더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영국 정부 관계자는 상속세 폐지 추진을 두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부를 물려줄 수 있는 ‘열망하는 나라’가 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국민들의 여론도 상속세 폐지 쪽으로 쏠리고 있다.
영국의 인터넷 기반 시장 조사 및 데이터 분석 기업 유고브가 지난해 9월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1%는 상속세가 부당하다고 답변했다.
상속세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응답자 가운데 42%는 '이중과세'를 원인으로 들었다. 자산을 축적하는 과정에 소득세 등을 납부했기 때문에 추가로 상속세를 거두는 것은 이중과세라는 것이다.
이어 ‘정부가 상속세를 걷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 17%,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을 아낀 사람들을 위한 처벌이다’ 11%, ‘주택 가격과 물가를 따라잡지 못한 너무 낮은 기준 액수’ 10%였다.
영국은 상속세의 원조로 1796년 상속세를 도입한 이래 200년이 넘도록 유지해왔다. 현재 영국의 상속세는 32만5천 파운드(약 5억4천만 원)를 초과하는 유산에 40%가 부과되고 있다.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