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스제 슈라이네마허 네덜란드 무역부 장관이 미국 정부의 반도체장비 대중국 수출규제 요구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
[비즈니스포스트] 미국 정부가 네덜란드와 일본 등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핵심 역할을 하는 국가들과 힘을 합쳐 중국을 규제하는 데 더욱 힘을 싣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런 움직임에 반발하며 맞서고 있는데 한국과 일본, 대만 등을 포함하는 반대 세력을 구축하려 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17일 로이터에 따르면 리스제 슈라이네마허 네덜란드 무역부 장관은 현지매체와 인터뷰에서 “미국의 반도체장비 수출 규제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 등을 대상으로 중국에 반도체장비 공급을 사실상 차단하는 규제를 도입하려 하는 데 반대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ASML은 2019년 트럼프 정부에서 처음 규제를 시행한 뒤 중국에 EUV(극자외선)장비 등 고사양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일부 장비를 수출하지 않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 ASML의 반도체장비 대부분을 중국에 판매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두고 네덜란드 정부와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 대만도 미국 정부에서 이와 비슷한 압박을 받고 있다. 일본과 네덜란드는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핵심 소재와 장비 공급을 대부분 책임지는 주요 국가에 해당한다.
한국과 대만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TSMC 등 중국에 반도체 생산공장을 운영하거나 반도체 수출 물량이 많은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규제 영향권에 놓여있다.
네덜란드 정부 측에서 ASML을 비롯한 자국 기업이 실적에 타격을 받을 가능성을 우려해 이런 상황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는 셈이다.
슈라이네마허 장관은 “미국은 네덜란드에 (반도체 규제와 관련한) 공식적인 서명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한국과 일본, 대만, 독일과 프랑스 등 국가와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한국과 일본 등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국가와 대화를 통해 미국의 압박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실상 미국 정부의 중국 반도체산업 규제를 위한 압박을 두고 관련된 국가들의 힘을 모아 반대하는 세력을 구축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 대만 등 국가는 모두 미국 정부가 중국 수출규제에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데 따른 고민을 안고 있다. 중국이 반도체 및 관련된 장비와 소재 수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가 미국의 의도에 따라 대중국 사업을 축소한다면 이는 자국 기업에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고 자연히 경제적 악영향을 받게 될 수 있다.
중국 정부가 해당 국가를 대상으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보복조치에 나선다면 국가 차원에서 받는 피해는 더욱 커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네덜란드 정부가 미국의 수출 규제 압박에 대해 주요 국가들과 논의를 이어가기로 한 것은 이들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슈라이네마허 장관이 현지 매체를 통해 미국 정부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은 시점도 중요하다.
마르크 루테 네덜란드 총리가 이른 시일에 미국을 방문해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진행하며 반도체장비 수출규제 등 현안을 논의할 계획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정부의 입장을 고려하면 루테 총리는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미국 정부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을 전할 공산이 크다.
만약 바이든 정부가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를 더욱 압박하려는 태도를 전면에 내세운다면 네덜란드 정부가 한국과 일본, 대만 등 국가와 더 활발하게 대응책을 논의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이 중국 반도체산업 규제에 여러 국가의 힘을 합치려는 의도를 두고 있는 만큼 이런 상황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 관련기업에 더 큰 불확실성을 안길 수도 있다.
다만 슈라이네마허 장관은 “반도체 공급을 아시아 지역에 의존하는 데 대한 미국 정부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며 네덜란드 역시 이와 관련한 리스크를 인식하고 있다고 전했다.
바이든 정부가 중국 반도체산업을 압박해 반도체 공급망을 아시아 이외 여러 지역으로 다변화하려는 행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있다는 의미다.
슈라이네마허 장관은 “현재 여러 국가들은 특정 기술이 쉽게 해외에 수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데 뜻을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세계 반도체시장 판도는 루테 총리와 바이든 대통령 사이 정상회담에서 논의되는 내용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ASML이 네덜란드에서 해외로 수출하는 EUV장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TSMC 등 주요 기업의 첨단 반도체 생산 투자에 필수적으로 활용된다. 해당 업체들도 네덜란드 정부의 대응 방향을 주시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