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에서 도입이 진행되고 있는 공급망 실사법은 국내 기업에도 강한 파급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송수영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공급망 실사법이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지 못해 공급망에서 배제된다면 그냥 관련 매출 전체가 사라진다고 보면 된다"고 말한다. 사진은 송 변호사(왼쪽)와 장윤제 법무법인 세종 ESG연구소장이 비즈니스포스트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유럽연합(EU)의 공급망 실사법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지 못해 공급망에서 배제된다면 그냥 관련 매출 전체가 사라진다고 보면 된다.” (송수영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ESG 전체를 100이라 친다면 준법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이라고 본다.” (장윤제 법무법인 세종 ESG연구소장)
오늘날 세계의 주요 국가들은 대부분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법의 내용에 따라 민주주의 국가인지, 권위주의 국가인지는 다를 수 있으나 결국 국가의 의지는 어느 곳에서나 최종적으로 법의 형태로 표출된다.
뒤집어 보면 특정 흐름이 법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그만큼 그 현안에 국가와 사회의 동의와 추진 의지가 강하다는 의미도 된다.
유럽에서 마련되고 있는 ‘공급망 실사법’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현재 기업환경의 가장 큰 흐름인 ESG는 더 이상 유행이나 권유의 영역이 아니다. 대중의 동의와 이에 따른 각국 정부의 의지를 바탕으로 분명하게 강제력을 지닌 국가 규범의 영역으로 점차 들어오고 있다.
유럽연합은 프랑스, 네덜란드 등 일부 국가에서 시행 중인 공급망 실사법을 표준화해 회원국 전체로 확장하려 한다.
세계 경제가 여러 가치사슬에 묶여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지금, 유럽의 공급망 안에 들어가 있는 한국의 기업들은 모두 이 법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비즈니스포스트는 법무법인 세종의 송수영 변호사와 장윤제 ESG연구소장을 만나 공급망 실사법의 파급력, 국내 기업의 대응 방향을 물었다.
송 변호사는 법무법인 세종에서 금융, ESG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특히 ESG 자문 분야에서는 전문성을 인정받아 한국회계기준원의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자문위원회’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금융지주 사외이사로도 발탁돼 이사회 ESG경영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장 소장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현 한국ESG기준원) 재직 시절 5년 동안 연간 800개 이상의 상장기업에 ESG 평가 및 자문을 제공했던 ESG 전문가다. 2019년 한양대학교 법과대학원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했고 다수의 ESG 관련 등재학술논문을 게재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 상근전문위원실에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민간전문가로 근무하기도 했다.
▲ 장윤제 법무법인 세종 ESG연구소장은 "ESG 전체를 100이라 친다면 준법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이라고 본다"며 공급망 실사법을 비롯한 ESG 현안 대응에서의 준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즈니스포스트> |
◆ 유럽이 원청이면 한국도 해당, EU기업지속가능성실사지침 입법 초읽기
공급망 실사법이 국내 기업에 미칠 파급력이 어느 정도일지를 묻는 질문에 송 변호사의 대답은 단호했다.
송 변호사는 “수출 등으로 유럽연합과 사업적 연관이 있는 기업이라면 바로 생존의 문제로 직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급망 실사법이 무엇이기에 유럽의 법이 한국 기업의 생존에 이토록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일까?
공급망 실사법은 대기업 등 원청 사업자가 협력업체 등 자기 사업의 공급망 전반에 걸쳐 노동, 인권, 안전, 환경 등 ESG 현안 관련된 위험을 관리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각 나라별 법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대기업 등 공급망 내 주요 주체가 ESG 관련 위험을 다른 기업에 떠넘기는 일을 막자는 것이 공급망 실사법의 주된 취지다.
가령 완성차 기업이 전체 자동차 제조 공정 가운데 온실가스 배출이 심각한 공정 일부를 직접 하지 않고 별도 자회사 혹은 하청업체에 맡겨 놓더라도 공급망 실사법이 도입된 곳에서는 온실가스 배출과 관련해 완성차 기업의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2017년부터 ‘기업 실사 의무법(Duty of Vigilance Law)’, 네덜란드에서는 2020년부터 ‘아동노동 실사 의무법(Child Labour Due Diligence Act)’이 시행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공급망 내 기업 실사 법안(Act on Corporate Due Diligence in Supply Chain)’이 2023년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밖에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 국가에서 공급망 실사법 도입이 논의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도 아동노동에 국한된 기존 법과 별도로 범위를 확대한 공급망 실사법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회원국에 표준화된 공급망 실사법의 제·개정을 요구하기 위해 2022년 2월 ‘EU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EU 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Directive)’ 초안을 마련한 바 있다.
장 소장은 “유럽연합 의회가 이 지침을 승인하면 2년 안에 모든 유럽연합 회원국이 지침의 내용을 국내법화 해야 한다”며 “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자발적으로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공급망 실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위험이 확인되면 해당 위험을 개선하도록 요구하고 개선이 되지 않으면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등 조치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 국내 기업들, 대응 필요성은 느끼지만 실제 대응은 21%
유럽연합에서 공급망 실사법 도입이 본격화되는 만큼 상당수 국내 기업들도 대응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업들의 구체적인 대응 움직임으로는 연결되지 않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12월에 내놓은 ‘공급망 대응 K-ESG 가이드라인’을 보면 국내 수출 중소·중견기업 가운데 50.4%는 공급망 ESG 진단 및 실사 대응에 중요성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대응을 준비하는 기업은 21%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대응이 어려운 이유로는 ‘공급망 실사에 대한 정보 및 내부 인식 미흡’이 35.8%로 가장 많이 꼽혔다.
하지만 공급망 실사법을 비롯해 각종 ESG 관련 현안은 피할 수 없는 데다 지속적으로 이어질 흐름인 만큼 언제까지나 대응하지 않을 수는 없다.
▲ 송수영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기업의 ESG 대응이 당장 마주한 현안을 단편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ESG 관련 현안은 환경, 노동, 공정거래, 개인정보, 보안 등 다양한 분야가 망라돼 있는 만큼 첫 대응부터 회사를 조금씩 체계적으로 바꿔나간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
◆ 환경부터 보안까지 총망라, "첫 단계부터 체계적 접근 필요"
송 변호사는 기업이 ESG 현안 대응에서는 당장 필요한 사안만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는 “기업이라는 조직이 한두 군데 고쳐서는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다”며 “게다가 ESG 관련 현안은 환경, 노동, 공정거래, 개인정보, 보안 등 다양한 분야가 망라돼 있는 만큼 첫 대응부터 회사를 조금씩 체계적으로 바꿔나간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이 ESG 관련 현안에 대응하며 경험을 쌓는 일도 중요하다. 기업 내부의 인식을 개선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송 변호사는 “ESG에 관심이 없던 어느 기업이 사업의 인허가 문제에 걸리면서 ESG 평가등급 대응을 위한 자문을 요청한 사례가 있다”며 “자문 결과 해당 기업의 ESG 평가등급이 오르고 성과가 나자 기업 내부에서도 ESG에 관심이 높아지는 등 긍정적 효과를 봤다”고 말했다.
ESG가 아직은 완전히 정립된 개념이 아닌 데다 범주가 넓은 만큼 국내 기업들이 담당 부서 편성이나 업무분장에서 다소 혼란을 겪고 있다는 점은 극복해야 할 주요 과제로 꼽혔다.
장 소장은 “한국에서 ESG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개념이다 보니 범주가 불명확해 결국 기업에서는 ESG 부서에 관련된 모든 일을 넘기는 현상이 발생한다”며 “업무영역이 다양한 만큼 여러 부서 사이 협업도 필요하지만 국내 기업에는 익숙치 않은 업무방식”이라고 말했다.
◆ 결국은 준법, "국내 법만 잘 지켜도 어느 정도 대응은 이뤄진다"
공급망 실사법과 같이 법의 영역에 들어선 ESG 현안의 대응에서는 무엇보다 준법이 중요하다.
특정 ESG 관련 기준이나 규제가 법제화됐다는 것은 해당 내용에 사회적 논의가 끝나 강제력이 부여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현재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ESG 관련 다양한 기준들은 대부분 법제화를 위한 과정인 셈이다.
장 소장은 “기업이 ESG 현안 대응에서 아무리 평가지표를 잘 지킨다 하더라도 법 위반이 나오면 전체적으로 평가가 크게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연합의 공급망 실사법 대응 관련해서도 국내법 준수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장 소장은 “공급망 실사법에서 위반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국제조약 등을 보면 대체로 국내법화 된 것들”이라며 “국내법만 잘 지켜도 어느 정도 공급망 실사법 도입에 따른 대응이 이뤄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공급망 실사법 대응을 위해 기업의 법률자문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만큼 국내 법무법인들의 움직임 역시 분주하다.
공급망 실사법의 요구에 따라 대기업이 정한 규정을 협력사가 잘 지키는지 실사하거나 관련 규정을 정하고 수정하는 일은 법무법인에 강점이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송 변호사는 “공급망 실사법 관련해 자문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며 “올해 국내 법무법인들이 진행한 세미나 가운데 절반쯤은 공급망 실사법 관련 내용일 정도”라고 말했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