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사법적 족쇄를 벗어던진 만큼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에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그룹은 삼성물산을 실질적 지주회사로 두는 단순화된 지배구조 체제를 가장 유력하게 검토할 것이라는 시선이 많다.

가능성은 낮아보이지만 이 부회장이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았다고 밝힌 만큼 삼성그룹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야 하기 위해 비영리 공익재단을 활용하는 방법도 거론된다.

◆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 속도내나

17일 재계에 따르면 올해 2월에 출범한 2기 삼성준법감시위원회는 이 부회장의 광복절 복권을 계기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이찬희 삼성준법감시위 위원장은 16일 준법위 정례회의 참석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해 “위원회도 지금 계속 준비하고 있다”며 “아직 공개할 정도는 아니고 좀 더 진행되면 밝히겠다”고 말했다.

삼성준법감시위는 지배구조 개편을 위해 세계적인 경영자문업체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용역을 의뢰했으며 최종보고서는 아직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최근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둘째 딸인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삼성글로벌리서치 CSR연구실 고문을 맡게 된 것을 두고도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시각이 있다.

삼성글로벌리서치 CSR연구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전략과 사업개발을 담당하는 연구 부서이지만 최근에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까지 연구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글로벌리서치는 삼성그룹의 전략을 짜는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곳으로 경영환경, 미래산업 등을 연구하는 곳이다.

이서현 이사장의 남편인 김재열 사장도 삼성글로벌리서치에 근무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기술경영 분야 전문가인 김원준 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을 부사장급으로 영입하는 등 조직을 강화하고 있다.

다만 삼성전자 관계자는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이서현 이사장이 삼성글로벌리서치 고문을 맡은 것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려는 것이지 지배구조 개편과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올해 3월에는 삼성전자에서 지배구조 개편 전문가를 영입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IR팀으로 영입된 오 다니엘 부사장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근무한 머로우소달리는 글로벌 컨설팅업체로 의결권 대응 자문과 지배구조 개편 컨설팅 등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머로우소달리는 2019년부터 삼성전자, 신한금융지주 등의 주주총회 대응 자문을 수행했고 금호석유화학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사측의 자문을 맡는 등 최근들어 국내 기업과 관계를 확대하고 있다. 

◆ 삼성물산의 지주회사 전환 방안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은 삼성물산을 지주회사로 만드는 방안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는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 오너일가→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기타계열사’로 이뤄져 있다. 
 

이 부회장과 삼성 오너일가가 삼성물산 지분 31.31%(이 부회장 지분 17.97%)를 가지고 이를 통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형태다. 

하지만 현재 야당이 발의한 보험업법 개정안에 따라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더 이상 보유할 수 없게 된다면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지배권을 잃게 된다.

보험업법 개정안은 보험사가 계열사 주식을 기존 ‘취득원가’가 아닌 ‘시장가격’ 기준으로 총 자산의 3%까지만 보유할 수 있도록 변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보험사의 투자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인데 이 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은 현재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지분율 8.51%) 대부분을 처분해야 한다.

삼성생명이 현재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8.51%는 취득가액으로 계산하면 5조6천억 원이지만 개정안 기준인 시장가격으로 평가하면 30조 원을 넘는다.

이 때문에 증권가에서는 삼성물산이 삼성생명으로부터 삼성전자 지분을 넘겨받은 뒤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지배구조 개편 방식이 가장 현실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시나리오대로 진행된다면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 오너일가→삼성물산→삼성전자, 삼성생명으로 이어지는 단순화된 지배구조 체제를 갖출 수 있게된다.

다만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지분을 매입하기 위해서는 수십조 원에 이르는 자금이 필요한데 이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그룹은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지분을 얼마만큼 확보하느냐가 지배구조 변화의 핵심”이라며 “생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삼성물산이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 43.4%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을 삼성전자에 매각하고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매입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공익법인 활용 가능성

일각에서는 삼성그룹이 스웨덴 발렌베리그룹의 경영모델을 참조해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발렌베리그룹은 1856년 스톡홀름엔스킬다 은행(현재 스칸디나비아엔스킬다 은행)에서 시작된 기업으로  160여 년 동안 발렌베리 가문이 5대째 경영권을 이어오고 있는 대기업집단이다.

 

통신기업 에릭슨, 방산기업 사브, 미국 증권거래소 나스닥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으며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오너일가가 3개의 비영리재단을 통해 그룹을 지배한다는 특징이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크누트앤앨리스’, ‘마리안느앤마르쿠스’, ‘마르쿠스앤아멜리아’ 등 3개 비영리재단을 소유하고 있다. 3개의 비영리재단은 그룹 중간지주회사 ‘인베스터’ 등의 지분을 보유함으로서 그룹 전체를 통제한다.

유럽에는 이처럼 비영리재단을 통해 그룹을 몇 세대에 걸쳐 한 가문이 소유하는 사례가 많다.

BMW, 포르쉐, 크루프, 자이스, 보쉬, 베텔스만, 머크 등 유럽의 오래된 기업들은 지배구조의 정점에 비영리 공익재단이 있고 이 재단을 오너일가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배구조 방식은 오너일가가 세대가 변해도 기업을 소유하며 기업의 핵심가치를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소유와 경영을 분리함으로써 경영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삼성그룹이 발렌베리그룹처럼 비영리재단을 활용한 지배구조개편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선 발렌베리의 3개 비영리재단은 차등의결권을 활용해 인베스터 지분 23.3%만으로도 50%의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자본시장에는 아직 차등의결권이 도입되지 않았다.

게다가 발렌베리가 비영리재단을 통해 그룹을 5대째 승계할 수 있었던 것은 스웨덴이 공익재단에 상속·증여세를 부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익재단으로 인정되면 상속세 없이 재단 이사장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승계가 가능하고 법인세도 실효법상 가장 낮은 수준이 부과된다.

대신 발렌베리의 비영리재단은 계열사로부터 받는 배당금의 80% 이상을 과학 연구와 교육 등 사회공헌 활동을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에 따르면 공익재단은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 또는 출자총액에 5% 미만에 한해서만 세금이 면제된다. 5% 이상에 대해서는 최대 60%의 증여세를 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제단체들은 공익법인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승계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8월9일 ‘기업승계 활성화를 위한 공익법인 상속세제 개선방안’ 보고서를 통해 “공익재단에 대한 주식 출연, 차등의결권 등이 제한된 우리나라에서는 원활한 경영권 승계가 어렵다”며 “현행 제도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바람직한지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