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텔 미국 오리건주 반도체공장 참고용 이미지. |
[비즈니스포스트] 인텔이 미국 정부에서 추진하는 52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지원법안 통과가 늦어지는 데 대응해 오하이오주에 신설하려던 대규모 반도체공장 투자가 늦어질 수 있다며 ‘강수’를 내밀었다.
삼성전자와 TSMC 등 미국 의회의 조속한 반도체 지원법안 합의를 요구하는 반도체기업들이 인텔을 뒤따라 현지 공장 건설 속도를 늦추며 협상력을 강화하려 할 가능성이 떠오른다.
미국 CNBC 보도에 따르면 인텔은 현지시각으로 23일 성명을 내고 “오하이오주 반도체공장 착공을 앞두고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며 “주지사를 포함한 현지 관계자들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텔은 오하이오주 공장 투자 규모와 속도가 반도체 지원법안을 통한 인센티브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진척 상황이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는 데 유감을 나타냈다.
미국 정부와 의회에서 반도체 지원법안 통과에 속도를 내지 않는다면 공장 착공 시기를 늦추거나 투자 규모를 기존 계획보다 축소할 수 있다며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돼 오던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지원법안은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는 반도체기업들에 지원금과 세제혜택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텔에 이어 오하이오주에 새 반도체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대만 TSMC와 텍사스주 파운드리공장 신설을 결정한 삼성전자도 지원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유력하다.
그러나 미국 의회에서 해당 법안을 두고 의견이 충돌해 장기간 계류 상태에 놓이고 올해 여름 회기가 끝나면 자동적으로 법안이 폐기될 상황에 놓이면서 지원 여부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6월 중 텍사스주 테일러공장 착공식을 열고 본격적으로 반도체 생산투자를 진행할 가능성이 거론됐는데 아직 뚜렷한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인텔이 반도체 지원법안 통과에 협상력을 갖추기 위해 공장 투자 지연과 축소 가능성을 앞세운 것처럼 삼성전자도 투자 계획을 다시 검토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인텔이 오하이오주 반도체공장 건설에 들이는 금액은 200억 달러(약 26조 원), 앞으로 미국에서 이어질 추가 투자까지 고려하면 모두 1천억 달러 규모에 이른다.
삼성전자의 반도체공장 투자 금액도 170억 달러(약 22조 원)으로 적지 않은 수준이다.
미국 반도체 공급망 강화와 제조업 경기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됐던 인텔과 삼성전자의 투자가 미뤄지거나 위축된다면 미국 경제 전반에 중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이 이런 점을 고려해 반도체 지원법안 통과에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인텔이 총대를 메고 협상력을 강화하고 있는 셈이다.
TSMC는 이미 공장 건설을 상당 부분 진행했기 때문에 투자 계획을 크게 바꾸기 어렵겠지만 공장 건설 속도를 늦추는 등 방식으로 반도체 지원법안 통과를 압박할 수 있다.
▲ 삼성전자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반도체공장. |
바이든 정부에서 추진하는 520억 달러(약 68조 원) 규모 지원법안은 미국이 중국에 반도체 공급망 의존을 낮추고 앞으로 기술 패권 경쟁에서 승기를 잡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의회를 향해 여러 차례 지원법안 통과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최근 지지율이 낮아지고 총기규제와 경기침체 등 다른 문제들이 더 부각되면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자칫하면 삼성전자와 인텔, TSMC가 미국 정부의 지원 약속을 바탕으로 추진했던 현지 반도체공장 건설에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막대한 자금을 들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최시영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사장과 겔싱어 CEO를 포함한 세계 주요 반도체기업 및 IT기업 CEO들은 최근 미국 의회에 직접 반도체 지원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공동 성명도 전달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미국 정치권에서 큰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고 있어 삼성전자도 결국 인텔과 마찬가지로 투자 축소와 착공 시기 지연을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여당인 민주당 대변인은 최근 반도체 지원법안에 양당 합의가 가까워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법안 통과를 위해 많은 부분을 양보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야당인 공화당이 이른 시일에 큰 이견 없이 법안 통과에 함께 힘을 실어줄 가능성은 아직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지원법안 통과가 11월 이뤄지는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측에 유리한 경쟁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 백악관 관계자는 인텔의 발표가 나온 뒤 겔싱어 CEO에 직접 전화를 걸어 투자 축소 여부를 확인할 정도로 이번 사안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미국 신규 반도체공장 투자에도 변수가 발생한다면 반도체 지원법안 통과를 위한 미국 정부와 의회의 노력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될 수 있다. 김용원 기자